사진/ 5년 만에 600배로 고도성장한 붉은 악마. 붉은악마는 카니발의 자발성을 상업주의와 국가주의의 구도 안에 담아내려는 자본과 국가의 동원전략을 거부한다. (이정용 기자)

“단순히 축구가 좋아 응원을 하던 모임이 월드컵을 계기로 너무 규모와 호응이 커져 문제점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구성원들 간의 의논을 거쳐 발전적인 해체 또는 순수하게 비정부기구(NGO)와 비슷한 집단으로 남는 것 가운데 하나의 길을 택할 예정이다.” 지난 6월7일 한달여 만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붉은악마 신인철 회장은 “월드컵이 끝난 뒤 붉은악마의 진로”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붉은악마 내부에서도 붉은악마의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성장과 그에 따른 깊은 골패임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독도가 제주도만하게 커지다

사진/ 새롭게 등장한 KTF 응원단. (한겨레 서경신 기자)

붉은악마는 지난 2월만 해도 5만명 정도이던 회원 수가 6월 들어 무려 15만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1997년 200명 정도의 컴퓨터통신 축구동호회로 출범한 데 대면 5년 만에 600배의 고도성장을 이뤄낸 셈이다. 단순히 회원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지난해 컨페더레이션컵대회 때만 해도 붉은 옷을 입고 열광적으로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붉은악마의 수는 많아야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독도에서 제주도만하게 커지긴 했지만, 대다수 관중 사이에서 붉은악마는 여전히 하나의 섬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불과 몇달 만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혼연일체, 수만 관중 모두가 붉은악마가 되어 관중석 스탠드가 완전히 빨갛게 물드는 일대장관이 펼쳐지고 있다. 거리에서도 수십만 시민이 빨간 티셔츠에 빨간 머플러를 두루고 “오! 필승코리아”를 함께 외친다.

문제는 그 열정적 성취에 뒤섞인 안팎의 힘들이다. 붉은악마는 분명 축구를 흥겨운 축제의 마당으로 변모시키고자 한 순정한 의지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을 현실로 만들어낸 데는 저마다의 이익과 욕망을 향한 국가와 거대자본, 매스미디어의 치열한 각축이 개입됐다. 붉은악마의 성장사는 곧 축제를 향한 붉은악마 회원들의 투명한 욕구가 국가, 자본, 미디어라는 외부의 힘들과 한데 뒤엉켜 만들어낸 거대한 혼돈의 파노라마이기도 하다.

가장 직접적으로 붉은악마의 정체성을 위협한 힘은 거대자본과 미디어의 상업주의이다. 거대기업들에게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이벤트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선전의 마당이다. 월드컵 공식 후원사의 반열에 들기 위해 기업들은 저마다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씩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그 경쟁에서 탈락한 기업들 또한 월드컵과 기업 홍보를 결합시키기 위해 나름의 묘책을 찾느라 온 힘을 쏟는다. 붉은악마의 구호 아래 집결되는 시민들의 거대한 참여 물결은 기업들에 놓칠 수 없을 만큼 군침도는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붉은악마 또한 한낱 섬처럼 고립된 서포터스의 처지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했다. 이른바 ‘비더레즈’(Be the Reds)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해 1월은 지금과 모든 것이 달랐다. 월드컵은 여전히 먼 훗날의 얘기였다. “어떻게 맞이한 축구 붐의 계기인데, 입이 바싹 마를 정도였다.” 당시 붉은악마의 대외협력국장을 맡고있던 고용국씨는 “내부 운영진 회의를 통해 온 국민이 참여하는 월드컵 홍보 이벤트를 벌여 월드컵을 준비하자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돌이켰다. 몇 가지 안이 제출됐고, 그 가운데 두 가지 안이 먼저 실행에 들어갔다. 하나는 여름방학 동안 붉은악마들이 직접 월드컵 개최도시들을 돌며 홍보와 응원활동을 펼치는 것이었고, 또 하나가 ‘국민 모두가 붉은악마가 되자’는 ‘비더레즈’ 활동이었다. ‘비더레즈’의 핵심은 축구를 사랑하는 시민 모두가 국가대표 유니폼과 같은 색깔인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붉은악마와 함께 열광적 응원의 카니발에 나서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붉은악마는 이를 위해 몇개 기업의 지원을 받아 무료로 붉은색 티셔츠를 나눠주는 협찬계약을 맺었다. ‘비더레즈’라는 글자가 쓰인 빨간색 붉은악마 티셔츠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더레즈’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사진/ 기독교의 이름으로 붉은악마의 카니발리즘을 규제하려는 시도 또한 붉은악마의 정체성에 위협이 되고 있다. 국가대표팀 응원에 나선 '백의천사' 서포터스들. (뉴스앤죠이)

협찬계약의 당사자는 그러나 그때까지 붉은악마가 아니었다. 붉은악마는 당시까지 영리계약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동아리 형태의 임의단체에 머물러 있었다. 상표권이나 저작권 등의 권리도 누릴 수 없는 처지였다. 지난 5월5일에야 비영리 법인단체로 등록을 마쳤다. 이 때문에 붉은악마는 ‘비더레즈’ 프로젝트를 위한 계약주체로 대행사인 토피안을 내세웠다. 고용국 대외협력국장이 토피안과 협찬사들을 오가며 실무를 도맡았다. 몇달의 협상을 거쳐 협찬계약에 참여한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외환카드, 동양제과, 타이거풀스 등 모두 4개사였다. 이들 기업은 각각 1만장에서 3만장의 ‘비더레즈’ 티셔츠를 장당 1만원에 사서 무료로 배포하는 ‘백기사’ 역할을 했다. 붉은악마는 티셔츠 대금의 절반 정도를 현금과 물품으로 지원받아 운영비와 활동경비로 쓸 수 있게 됐다. 고용국씨는 “타이거풀스는 약속한 협찬금을 지불하지 않아 토피안과 소송까지 갔다”며 “이 때문에 실제 붉은악마가 확보한 금액은 3억원 정도였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확보한 금품은 붉은악마 사무국의 경상비와 단체응원 지원비용, 원정활동 비용 등으로 투명하게 집행됐다. 고용국씨는 “홈페이지 유지비 200만원과 사무실 임대료 250만원 등 붉은악마 사무국의 기본 운영비만 한달에 600만원가량 한다”고 붉은악마의 씀씀이 규모를 전했다. 이런 경비는 애초 회원가입비와 축구협회 지원으로 충당됐지만, 월드컵을 맞아 씀씀이가 커지면서 한계에 이르렀다. 가입 때 5천원씩 받던 회원가입비는 지난해 폐지했다. 회비를 낸 사람과 안 낸 사람을 구분하느라 업무량만 늘어난데다, 무엇보다 빨간 옷을 입고 오면 모두 붉은악마라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축구협회 지원은 국가대표팀 경기 때마다 5천석 정도의 좌석을 정가의 50% 수준에 미리 붉은악마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붉은악마는 이를 응원에 참여하기 원하는 회원들에게 20∼30% 정도의 웃돈을 받고 되팔아 그 차액을 경비로 썼다. 고용국씨는 “그러나 지역별로 서포터스를 위한 버스비용을 일부 보조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지출이 1천만원대에 이르는 실정에서 무언가 다른 대책이 필요한 때였다”고 말했다.

상업성 논란이 불거진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비더레즈’ 프로젝트가 급격한 도약을 맞이하면서였다. 붉은악마의 대행사 토피안은 지난해 6월 SK텔레콤과 광고지원 계약을 체결한다. 모두가 12번째 선수가 되자는 ‘비더레즈’의 개념을 광고로 홍보하고 3억원을 돈과 물품으로 지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계약서에 “광고와 함께 프로모션을 위한 부대행사를 지원대상에 포괄하며, 그 구체적 내용은 협의에 의한다”고 명시한 데서 논란의 단초가 생겨났다. SK텔레콤이 붉은악마의 합의 없이 자체 홍보행사를 마구 펼치면서 붉은악마가 011의 전위부대냐는 비판이 커져갔다. 붉은악마 2대 회장을 지낸 김태호씨는 “대다수 회원들은 지금 상황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 않다”며 “SK텔레콤이 단물을 다 빼먹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고용국씨는 “애초 계약 때 협의가 아닌 합의로 명시했어야 한다”며 “지금으로선 SK텔레콤이 합의 없이 마음대로 붉은악마를 이용해 자체 행사를 벌이는 일을 막을 수 없게 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관중석을 붉게 물들인다는 애초의 구상이 실현돼 기쁘기도 하지만, 결국 상업주의 시비에 휘말려 순수성이 훼손된 것은 정말 가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붉은 호랑이? 붉은 표범?

수십만장의 유사 ‘비더레즈’ 티셔츠가 일반인들에게 팔려나간 것도 붉은악마를 의혹에 빠트렸다. 붉은악마 쪽은 “현재 팔리고 있는 티셔츠는 토피안 쪽이 일방적으로 판매를 결정한 것으로 붉은악마와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최근엔 그나마 토피안 쪽의 허가도 없이 베껴 만든 유사품들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마구 팔려나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애국심과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국가의 개입도 붉은악마의 진로를 흐트려놓는 외부 요인의 하나이다. 최근의 반미응원에 우려를 표시한 정부의 행태나 붉은악마의 단결된 함성을 애국주의의 배경음향으로 활용하려는 매스컴의 시도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잠깐 잠잠해졌지만, ‘붉은악마’라는 이름에 대한 일부 기독교계의 집단적 반발 또한 붉은악마의 정체성을 흔드는 바깥의 힘이다. 보수 기독교계는 지난해 ‘백의천사’라는 교인 서포터스 조직을 새로 선보인 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붉은호랑이’나 ‘붉은표범’ 등으로 붉은악마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해왔다. 지난 4월엔 월드컵 관련 교계 단체들이 긴급회의를 열고 붉은악마의 명칭 변경을 위한 소송을 법원에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정아무개 목사는 지난 5월22일 “붉은악마 응원단의 월드컵 경기장 출입을 국가가 막아달라”며 가처분 항고신청을 서울고법에 냈다.

붉은악마는 일단 월드컵을 치른 뒤 붉은악마를 둘러싼 여러 논란을 공개적으로 검토해 대안을 찾는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신인철 회장은 “붉은악마와 관련된 기업들이 최근 월드컵 첫 승으로 사전협의 없이 붉은악마의 이름을 빌려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며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붉은악마는 전혀 상업성에 휘둘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붉은악마가 100억원의 수익을 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사실무근으로, 현재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은 1억8천만원 정도”라며 “월드컵 뒤 남는 돈은 유소년 축구기금으로 모두 내놓을 생각”이라고 해명했다. 붉은악마 회원인 문화평론가 이동연씨는 “월드컵의 과열된 열기가 일부나마 붉은악마의 순수한 욕망을 왜곡시켜 드러낸 것은 사실”이라며 “붉은악마의 선택은 상업주의와 국가주의의 동원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카니발의 욕망을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