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5월22일 제410호 

플레이! 장외 월드컵

‘라이브’만 재미있다고? 입장권 없는 당신도 축제를 빵빵하게 즐길 수 있다


사진/ 광화문 앞에 모인 붉은악마 회원들. 단체관람은 경기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용호 기자)

피버노바의 반지름은 10.8cm. 이 작은 축구공이 내뿜는 열기가 지구를 뒤덮는다. 4년에 한번씩 세계인의 눈길은 푸른 잔디 위를 구르는 둥근 축구공의 궤적을 좇는다.

지구 적도의 반지름은 6억3780만cm, 2002년 한·일 월드컵 공인구인 피버노바의 5900만배가 넘는다. 축구공의 열기 또한 5900만배로 뜨거워진다. 월드컵을 향한 별들의 질주, 충혈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전 세계 축구팬들의 꿈과 희망. 1.1기압(??기압의 단위는 헥토파스칼/hPa?)의 축구공에 담긴 또 다른 원소다.

모여서 중계 보면 재미가 두배

이윽고 지상 최대의 축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2002년 5월31일 오후 7시30분 서울은 월드쇼의 무대로 바뀐다. 세계인의 축제의 꼭지점이 된다. 아니 축제는 이미 시작됐다. 축구팬들의 가슴은 들썩이고 있다. 지단·호나우두·베컴·나카타·홍명보…. 별(노바)들을 향한 열기(피버), ‘피버노바’는 벌써부터 그라운드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열기의 최정점을 느끼고 싶다면 역시 그라운드를 찾아야 한다. 새로 지은 월드컵 경기장에서라면 이제 한국의 축구팬들도 하프라인에서 순식간에 골문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폭격기의 터질 듯한 심장박동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관중과 선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머나먼 육상 트랙은 더 이상 없다. 선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과 눈물까지 들여다보는 감동은 마땅히 경기장을 찾은 관중의 몫이다.

그러나 모두가 경기장의 관중일 수는 없다. 한국이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배정받은 입장권은 전체 148만2천장의 절반인 74만1천장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판매분은 52만장이다. 가장 관심 있는 한국팀의 경기 수는 16강전 전까지 3번에 불과하다. 절대 다수가 서 있을 자리는 어차피 경기장 밖일 수밖에 없다. “‘라이브’를 보고 나면 음반 따위는 장난일 뿐”이라는 명제는 분명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러나 그 아픔은 일단 잊기로 하자. 그것은 불가피한 운명 같은 것 아닌가.

경기장 바깥에서도 축제의 환희는 식지 않는다. 미디어 세상이다. 경기장의 안과 밖은 단절돼 있지 않다. 방송사들은 월드컵 전 경기를 생중계한다. 절대 다수의 월드컵 즐기기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일 수밖에 없다. 바깥에서 즐기기는 아쉬우므로 일단 모두 다음의 한 명제를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중계를 라이브로 만들기’.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모이는 것이다. 김승호(33·회사원)씨는 “떼거리로 모이면 그보다 더 재미있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와 그의 대학 동아리 친구들은 이미 월드컵 ‘단체시청’ 일정을 다 잡아놓았다. 형편되는 집에 한꺼번에 들이닥쳐 떠들썩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것이다. 90년 이탈리아월드컵 이래 4년마다 해오던 방법이다. 편한 옷차림은 기본이다. 소파를 차지하면 금상첨화다. 여기서 밀리면 벽이나 에어컨 모서리에라도 기대야 한다.

‘단체시청’에서 건져 올리는 즐거움의 백미로는 중구난방 해석전의 묘미가 꼽힌다. “잘하는 선수들을 보고 ‘역시 누구’라고 함께 찬탄하는 것도 좋지만, 최고는 역시 누군가를 질타할 때다. 결정적 순간 헛발질하고 돌아서는 누군가를 향해 한꺼번에 ‘저 XX 빼’라고 소리지를 때의 쾌감이다.” <동정없는 세상>의 소설가 박현욱(36)씨는 “축구는 집단적 기운을 고양시키는 원초적 마력이 있는 종목”이라며 “모여서 볼 때 그런 기운이 한층 커지고 짜릿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준결승 한 경기를 서울 상암구장에서 가족과 함께 직접 볼 계획이다. 그러나 그는 “그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볼 시간이 기다려진다”고 털어놓았다.

단체관람에 맥주가 빠질소냐

이번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다. 한국 팬들은 시차 없이 가장 좋은 황금시간대에 경기를 볼 수 있다. 4년 전 프랑스월드컵을 보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이다. 이병욱(37)씨처럼 “새벽까지 고스톱을 치며 경기를 기다리던 경험도 즐거웠다”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음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회사에 출근해보면 다들 표정이 비슷해 함께 웃은 적이 있다”며 “월드컵이니까 다 이해한다는 분위기였다”고 돌이켰다.

이번엔 유럽 쪽의 축구팬들이 월드컵 시청에 몸살을 앓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일본과 유럽과의 시간 차 때문에 독일에서 월드컵 중계가 시작되는 시간은 오전 8시30분과 오후 1시30분이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베를린의 필립스 공장에선 원하는 노동자들은 근무시간 중 도장을 찍고 나가 월드컵을 TV 생중계로 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유일한 조건은 이 휴식시간에 대한 급여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 내에 TV를 설치하자는 요구도 빗발치고 있다. 그 자신 열광적인 축구팬으로 알려진 쿠어트 베크 라인란트-팔츠 주지사는 “나는 축구팬으로서 훌륭한 경기를 놓친다는 것이 얼마나 화가 나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며 “가능한 한 근로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부족한 시간은 보충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라고 기업들에 제안하기도 했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축구 종주국 영국에선 무려 700만명의 축구팬들이 영국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 휴가를 신청할 것이라는 각오를 밝혔다. 이 때문에 패트리시아 휴잇 영국 재무장관은 “월드컵 대회기간 중 유연한 근무시간을 적용하라”고 오래 전부터 촉구해왔다.

황금시간대에 맥주라도 한잔 어우러지면 단체관람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김승호씨는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볼 수 있는 자유는 경기장 바깥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라고 주장한다. 경기장에선 원칙적으로 주류 판매가 금지돼 있다. 다만 공식 스폰서인 버드와이저에 한해 어른 한 사람당 한잔씩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김씨는 “경기를 보는 데 가장 좋은 주종은 단연 맥주, 그것도 캔맥주”라고 말한다. “서로 부어주고 받느라 결정적인 골장면을 놓치는 불상사도 일어날 일 없고, 별다른 안주가 필요치 않으니 부담도 없다”는 것이다.

거대한 스크린과 빵빵한 음향효과를 갖춘 조건이라면 금상첨화다. 용산 등 전자상가에선 월드컵을 앞두고 홈시어터시스템이 특수를 누리고 있다. 고화질 TV 또는 대형 스크린에 5.1스피커라고 하는 6개의 스피커를 둥그렇게 설치해 마치 현장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시스템이다. 김승호씨는 “얼마 전 신혼살림을 차린 친구 한명이 40인치 대형 TV를 장만했다”며 “결승전은 모두 그 집에 모여 보기로 예약해뒀다”고 자랑했다.

축구바나 광화문에서 맛보는 짜릿함


사진/ '오예오예오'. 한데 모여 응원과 관람을 함께 할 때 월드컵의 재미는 더욱 커진다고 팬들은 말한다. (SYGMA)


주위에서 그런 자리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하기는 이르다. 지난 프랑스월드컵 때는 서울시내 극장에서 영화 종영과 함께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생중계하기도 했다. 이번엔 시간대가 달라져 ‘극장 상영’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코엑스 3층 국제미디어센터(IMC)에 가면 월드컵 개막식과 개막경기, 한국팀 경기, 프랑스-우루과이전 등을 한층 발전된 3차원 입체영상으로 볼 수 있다. 준비된 스크린의 크기는 무려 300인치다.

정보통신부는 월드컵 경기 전에 8개 도시, 10개 지역 월드컵 경기장 주변에 마련된 월드컵 플라자에 ‘디지털 방송관’을 마련해 이런 시스템을 선보인다. 3차원 입체영상 생중계 관람을 원하면 디지털TV 홈페이지(www.digital-tv.or.kr)로 신청하고 초대권을 받아야 한다. 에버랜드 등 놀이동산에서도 프랑스월드컵과 마찬가지로 대형 멀티비전을 동원해 집단관람을 계획하고 있다.

예닐곱명이 모여 함께 보는 것만으로는 뭔가 모자란다고 하는 이들도 많다. 환상적인 별들의 플레이에 근질거리는 몸을 한껏 풀어주고 싶다면, 집단응원이 가능한 장소를 찾는 것이 좋다. 한국-스코틀랜드 평가전이 벌어진 지난 5월16일 서울 명동 밀리오레 9층의 축구바 밀리오레스타디움. 500여석의 넓은 홀에 빈자리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홀 곳곳엔 120인치, 60인치 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10여명씩 집단으로 자리잡은 손님들 사이엔 쌍쌍이 모여든 아베크족들도 볼 수 있었다.

이천수의 첫 골이 골그물을 뒤흔든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손뼉을 치며 껴안았고, 환호했다.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 오예오예오.” 붉은악마 29살 모임 회원 10여명의 주도로 집단응원도 펼쳐졌다. 붉은악마 회원 한정호씨는 “축구경기가 열릴 때마다 경기장에 가지 못하면 이리로 온다”며 “신명 나는 응원전을 펼치다 보면 꼭 경기장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남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박수연(27)씨는 “영화를 보면 영국이나 미국에선 퍼브나 스포츠바에서 단체로 응원과 관람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며 “직접 해보니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다.

월드컵 기간 중엔 대형 전광판이 설치된 광화문에서도 붉은악마의 주도로 대규모 응원전이 열린다. 붉은악마 회원 김형열씨는 “월드컵 개막과 함께 이렇게 집단으로 응원을 펼칠 수 있는 장소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색다른 재미를 느껴보라”고 권했다.

응원의 길로 들어선 김에 아예 응원의 범위를 확 넓혀보면 어떨까. 다른 나라 팀을 응원하는 세계 시민의 보람과 재미를 느껴보는 일이다. ‘코리안 서포터스 프로젝트’. 서울 광화문 빌딩 10층에서 준비하는 월드컵 초유의 이벤트명이다. 한국에서 월드컵 본선 조별 예선을 치르는 나라는 모두 15개국이다. 코리안 서포터스들은 이 가운데 한 나라를 정해 응원에 나선다. 자기 돈으로 표를 산 뒤 프랑스에서 슬로베니아까지 응원할 나라의 유니폼과 국기를 갖춘 채 열광적으로 응원전을 벌여야 한다.

세계 각국의 서포터가 돼보자

5월1일 현재 신청자는 6만2064명에 이른다. 프랑스 응원 지원자가 1만8104명으로 가장 많다. 세네갈(3178명)과 슬로베니아(2052)에도 응원단의 환호가 준비되었다(문의 02-2233-3318). 이와 독자적으로 세네갈을 응원하는 ‘세네갈 서포터스’에도 시민 2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월드컵의 열기가 질린다는 사람들이 없을 수 없다. 대학생 이형기(24)씨는 “공 하나에 22명이 몰려다니는 게 뭐 재미있느냐”고 말한다. 월드컵은 그런 이들을 위해 차분한 문화축제 또한 마련하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월드컵에 남편을 빼앗긴 주부들이라면, 한산한 극장가나 공연장을 찾아보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월드컵이 모두에게 열린, 참여의 축제로 빛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다. 이제 곧 막이 오른다. 쇼는 시작됐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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