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5월02일 제407호 

당신이 만든 비극 울지 마세요 아버지

DJ 정부 5년을 무너뜨린 ‘홍삼트리오’…되풀이된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엽기영화의 속편이 5년 만에 제작돼 상영되고 있다. 줄거리는 비슷하다. 주연배우의 수가 늘었고,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대통령의 아들’에서 ‘대통령의 아들들’로 업그레이드 됐다. 주연은 ‘소통령’에서 ‘홍삼트리오로’ 바뀌었다. 5년 전엔 현철씨의 YTN 인사청탁 관련 비디오테이프가 소품으로 등장했는데, 이번엔 홍걸씨와 연루된 최규선씨의 수많은 녹음테이프가 나온다는 점도 차이라면 차이다.

집권 초기의 결연한 자세는 어디로…



국민은 이제 분노를 넘어 무심해보인다. 이전에 한번 봤던 영화를 또다시 감상해야 하는 지겨움 탓일까, 아니면 체념한 것일까. 새삼스럽게 흥분할 일도 없다는 냉소어린 태도다. 지난 4월27일 민주당 대선후보 서울경선이 열린 잠실체육관에서 만난 김연숙(43)씨는 “우리 국민이 불쌍하다”고 말했다.

역사는 놀라운 반복을 보이고 있다. 1997년 4월27일,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김현철씨 처리문제는 법대로 해야 한다. ‘법대로’라는 말에는 구속까지 포함된다”고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이로부터 꼭 5년 뒤인 지난 4월23일 일본 방문 중에 특파원들과 마주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목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국민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법에 따라 (대통령 아들들을) 철저히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흘 뒤인 4월26일 김 대통령은 결국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제들 문제로 물의를 빚고 있는데 대해 국민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김 대통령은 침통한 심정이다.”(박선숙 청와대 대변인) 양파껍질 벗겨지듯 속속 불거지는 자식들의 허물에 김 대통령은 간접적이나마 국민에게 사과했다. 5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도 현철씨의 국정농단이 드러나자 “자식의 허물은 부모의 허물”이라며 국민에게 2차례나 머리를 조아렸다.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다.

김 대통령은 왜 하필이면 현직에 있을 때 자식을 감옥에 보낸 YS의 뼈저린 실패를 벤치마킹해 그대로 되밟고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저런 험한 꼴은 안 봐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을 텐데.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김 대통령도 처음엔 자식들에게 매몰차게 경고했다. 대통령 취임을 사흘 앞둔 98년 2월22일 DJ는 삼청동 임시공관으로 세 아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불러들여 조신한 처신을 강조했다. “대통령의 가족은 때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대통령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무슨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 DJ는 특히 선거광고기획사 ‘밝은세상’을 운영하며 의욕적으로 활동했던 차남 홍업씨에겐 “제2의 현철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친인척의 부패와 비리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그러면 부자의 인연을 끊어버리겠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YS와 현철씨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결연한 다짐인 셈이었다. 이에 앞서 1월19일 국민과의 텔레비전 대화에서도 DJ는 “친인척 관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경계해야 할 문제로 지금까지 대통령 주변에서 이 문제들이 발생해왔기 때문에 국민이 걱정하는 것을 안다”며 “친인척 관리를 잘하겠으며 그들도 잘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대통령을 괴롭힌 ‘마음의 빚’



하지만 집권 초기의 맹약과 달리 4년이 흐른 지금 두 아들의 사법처리가 당연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김 대통령은 왜 YS를 반면교사 삼지 못하고 세 아들 관리에 실패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김 대통령과 세 아들들의 특수한 관계에 주목한다. 김 대통령이 자식들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아들문제에 단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맏이 홍일씨는 아버지의 정치를 돕다가 겪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말과 거동에 불편을 겪고 있다. 자식의 신체적 결함의 원인제공자가 된 아버지의 자책이야 오죽했겠는가. 가슴속 깊이 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대선을 앞둔 국민회의 시절, 당시 특보단 단장이던 문희상 의원은 김홍일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간언했고, 이런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는 불같이 화를 냈고, 결국 특보단은 이 일 때문에 해체되고 말았다. 김 대통령에게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은 정치적 고려보다도 우선순위가 앞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김대중 대통령의 경희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때 자리를 함께 한 대통령의 가족.


비교적 활동적이었던 차남 홍업씨 주변엔 그만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몰렸다. 그래서 가까운 몇몇 친구들과 그렇게 유난스럽게 어울린 것일까. “나 어디 가서 좀 숨어서 살고 싶어요. 어디 가서 이름도 없이 조용히 살고 싶어요. 사람 기피증에 걸릴 지경입니다.” 홍업씨가 문희상 의원에게 했다는 얘기다. 김 대통령은 이런 홍업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 30이 넘도록 아버지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두번이나 결혼의 길을 잃었으며… 직장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너의 행복을 가로막는 결과만 빚어내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고 자책했다.

막내 홍걸씨에 대한 김 대통령의 애틋함과 마음의 빚은 더욱 특별한 것이다. 전처 소생인 두 형들과 달리 이희호씨가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라는 점은 홍걸씨를 출생 때부터 유별난 존재가 되게 했다. 홍걸씨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 납치사건을 겪었고, 중학시절 내내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며, 고등학생이 돼서는 사형선고를 받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동교동 비서 출신인 배기선 의원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고,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다”고 홍걸씨를 기억했다. 이강래 의원은 “마음이 순수하고 여리지만 생각이 깊고 책을 많이 읽은 홍걸씨가 어쩌다 사기꾼 꼬임에 빠졌는지 모르겠다”고 최규선씨를 원망했다. 1992년 대선 패배 이후 김 대통령 부부와 영국에 함께 체류한 이 의원은 “김 대통령 부부가 홍걸씨 얘기를 제일 많이 했다”고 회상하며 “지금도 대통령 부부가 막내아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홍걸씨를 잘 아는 동교동계 의원들은 “여우 같은 최규선이가 순진한 홍걸씨를 온갖 사탕발림으로 꼬드겨서 사단이 생긴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청와대 친인척 관리시스템 무너져


사진/ 아버지가 대통령에 재직하는 동안 포승줄에 묶인 김현철씨. 대통령 가족의 비극은 되풀이 되는 것일까. (강재훈 기자)


그러나 김 대통령이 부채의식만으로 자식들의 대책 없는 일탈을 방치했으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겨레> 기자시절 김현철씨 비리사건을 특종보도한 김성호 의원은 조금 다른 견해를 내놨다. “김 대통령은 현철씨의 경우처럼 자식들이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만 용납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 아들 주변엔 파리떼가 들끓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이런 점을 간과한 것 같다.” 김 대통령이 자식들의 국정개입은 차단했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해선 너무 안이하게 대처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실제로 97년 당시 DJ는 대통령이 되면 자녀의 국정개입을 차단할 방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현철씨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있다. 아버지가 안 시키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모든 책임을 최규선씨에게 덮어씌우는 것도 문제다. 홍걸씨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2000년 2월8일 당시 이신범 한나라당 의원의 호화주택 폭로였다. 이후 홍걸씨 문제는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대통령과 면담기회가 있었던 재야인사들도 홍걸씨 등 자식들 문제를 여러 차례 얘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도 지난해 말 아들들을 직접 불러 추궁하고 여러 차례 경고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 확실한 조처는 내려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책임은 결국 김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부모 속에는 부처가 들어 있고, 자식 속에는 앙칼이 들어 있다’는 옛 속담이 있다. 부모는 자식을 무한히 사랑하나 자식은 불효자일 뿐이라는 뜻이다. ‘부모 이기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속담도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청와대의 친인척 관리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권 출범 이후 최근까지 청와대 친인척 담당 비서관을 맡은 이재림씨는 김홍일 의원의 절친한 중학교 친구다. 이씨와 함께 일했던 김길성 행정관도 연청 사무총장 출신으로 역시 김 의원과 가까운 사이다. 애초부터 경고시스템이 작동하기 어려운 인적 구성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2000년 10월 대통령 친인척 관련 사건의 조사를 맡은 경찰청 사직동팀도 해체돼 친인척 관련 문제는 사각지대에 놓였다. 김성호 의원이 김현철씨 관련 취재내용을 책으로 펴낸 <역적파일>의 후기는 시사적이다. “DJ의 경우도 다를 바가 없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는 경우 YS정권보다 더한 불행에 직면하지 말라는 법이 보장이 없다. 권력은 90%의 보편성과 단지 10%의 특수성의 성격을 갖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권력의 남용을 막는 것은 쉽지 않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할 말 잃어


사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홍일·홍업·홍걸(왼쪽부터) 3형제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청와대와 정보기관 상층부가 특정지역 인맥으로 이너서클화하면서 온정주의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결국 호남인맥 이너서클의 폐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국정원 등 정보기관에서도 나름대로 아들 관련 정보를 올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 선에선가 차단됐다. 정보기관의 속성상 상부에서 싫어하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올리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 비서실장 등 대통령 참모진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의 뼈아픈 지적이다.”

동교동계 의원들은 법에 따른 처리를 강조하면서도 “역대 정권의 친인척 비리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항변한다. “전두환, 노태우 시절엔 대통령이 직접 수천억대의 통치자금을 거뒀으므로 자식들이 비리를 주도할 이유가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엔 차남 현철씨가 국정에 직접 개입해 농단했고 한보사건 같은 엄청난 사건에 관여했다. 수천억원대의 부정부패사건이 속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오는 돈이 수억원대에 불과하다. 그것도 사기꾼들의 호가호위에 당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에게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일했던 상도동계의 한 인사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김현철씨도 기소된 내용은 조세포탈죄밖에 없다. 액수로만 따질 일이 아니다. 현철씨는 그래도 자기 딴에는 아버지를 좀 돕겠다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홍걸씨의 경우를 봐라. 완전히 개인비리다. 국민은 현철씨 사건이나 홍업·홍걸씨 의혹을 조금도 다르게 보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김대중 대통령을 감싸고 돌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들도 이제 할말을 잊었다. 하나같이 심한 자괴감을 나타냈다. “김 대통령을 지지해온 사람들의 자긍심이 무너지고 있다. 남북화해정책 등 대통령이 잘한 일이라도 역사에 남기려면 자식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아들들의 허물을 사과하고 법대로 사법처리를 해야 한다.” 전남 목포 출신으로, 서울지역 한 지구당의 고문을 맡고 있다는 정아무개(65·서울)씨는 “김 대통령을 40년 가까이 지지해왔는데, 지금처럼 국민의 시선이 따가운 적은 없었다. 더 바랄 것 없이 그저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됐으면 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늙은 대의원의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패었다. 충남에서 올라온 연청 회원인 서아무개(39)씨는 “자제분들이 대통령 모르게 실수를 한 것 같다”며 처음엔 말을 아꼈다. 그러나 좀더 솔직한 심경을 듣고 싶다는 말에 “누구를 원망할 수가 없게 됐다. 이제 아들들이 직접 나서서 수사에 적극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잘못이 있으면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민주당 대의원 강아무개(63)씨는 “대통령 아들들이 밉다”고 말했다.

“2명정도 사법처리 불가피"

지금 대통령에게 아들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대통령에게 아들문제는 가장 아픈 곳이다. 조금만 어긋나도 엄청난 오해를 사게 된다. 누가 나설 수 있겠나.” 집권과정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한 민주당의 한 의원은 “지금은 대통령에 대한 직언이 불가능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모든 판단을 오로지 김대중 대통령 본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곧 결단을 내릴 것이다. 비할 바 없이 참담한 심경이겠지만 일단 방침이 서면 무서우리만치 냉철한 면도 있는 분이다. 검찰수사 결과를 봐야겠지만 아들 2명 정도는 사법처리가 불가피할 것이다. 당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게 대통령의 치적이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민주당도 탈당할 것이다. 아마 지금쯤 적절한 시점을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은 모든 게 김 대통령의 업보라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화해진전과 환란극복, 개혁 쪽으로 물꼬를 튼 정책 등은 김 대통의 치적이다. 이런 것들은 노무현 돌풍을 통해 계승될 계기가 마련됐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가신정치 등 구시대적 정치유산을 탈피하지 못했다. 이런 점은 김 대통령의 과오다. 결국 공은 정치적으로 계승될 여지가 생겼지만 과는 자식들의 구속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이 또한 섭리가 아닌가.”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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