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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2.04.10(수) 제4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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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탈·북·딜·레·마 생·존·드·라·마! 한국행 이벤트 성공할 때마다 더욱 숨막히는 탈북자들의 실상, 조-중 국경 르포로 확인하다
살아서 구천을 떠도는 탈북자들의 실태를 생생히 르포하리라 마음먹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중국 공안에 걸리면 즉시 추방된다. 활동가들을 연결시켜줄 수 없다.” “우리 전도사들도 휴대폰을 바꿔가며 도망다니고 있다.”
꽃제비들의 변신
주중 스페인대사관을 통해 탈북자 25명이 한국에 입국한 직후 탈북자 지원사업을 벌여온 국내 시민·종교 단체들과 접촉했으나 이들은 잔뜩 몸을 사렸다. 현지 취재 협조요청에 고개부터 내저었다. “모든 게 도청되니 호텔에서도 필담을 하라”고 겁까지 줬다. 보수언론들은 북한 보안원 150명이 파견돼 중국 공안과 대대적으로 탈북자를 색출·압송한다고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제2, 제3의 스페인대사관행이 이어질 것인가?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지난 94년 탈북해 중국, 베트남, 몽골을 떠돌며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한국에 정착한 김형덕(30)씨. 그는 “시민·종교 단체의 한건주의와 조선족의 착취로 탈북자들의 삶이 멍들고 있다”며 위험스런 동행을 자청했다. “이런 때일수록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3월27일, 곡절 끝에 중국 랴오닝성 성도 선양에 첫발을 디뎠다. 선양은 신의주, 강계 등 북한 중서부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탈북자들의 주요 기착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조선족이 많고, 조선족과 한국인의 집단촌이 형성된 서탑거리는 훌륭한 은신처다. 서탑의 거리는 서울 뒷골목과 흡사했다. 마포갈비, 노래방, 단란주점, PC방이 즐비했다. 이정현의 <바꿔>나 설운도의 트로트 가요 같은 해묵은 노래가 울려퍼지고, 한글과 한자 간판이 뒤섞여 있다는 정도가 차이였다. 거리 곳곳을 탐문했다. 그러나 탈북자는 없었다. 조선족 강춘화(24)씨는 “얼마 전까지 밤이면 북조선 아이들이 서탑광장이나 정창호텔 앞에서 <휘파람>을 부르며 놀았습네다. 그런데 요즘은 통 안 보입네다”라고 말했다. 북한 여성들이 숨어든다는 노래방이나 단란주점도 마찬가지. 한 업소 사장은 “얼마 전 한 북한 여자가 이틀 머물다 떠났을 뿐 요즘은 술집에서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수만명에 이른다는 탈북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숨었을까. 선양 사람들은 “북쪽 헤이룽강성이나 한국인 보따리 장사꾼이 많은 톈진, 다롄 쪽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라 설명했다. 공안의 검속이 강화되면서 도심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그런데… 얼마쯤 지났을까. 누군가 옆구리를 잡아챘다. 10살 안팎쯤 돼보이는 소년 2명. “북조선서 왔슴메다. 밥 좀 사주시라요. 아무것도 못 먹었슴다.” 탈북자와의 첫 대면. 긴장했다. 그들은 상상보다 깔끔했다. 나는 ‘꽃제비’처럼 후줄근한 탈북자만 생각해왔다. 동행한 김형덕씨가 내 마음을 알아챈 듯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었다. “야 임마, 너네 조선족이지? 빌어먹는 놈들이 이렇게 깨끗해?” 그들은 떨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뒤 입을 열었다. “요즘 북조선 특무가 300명이나 중국에 왔답네다. 더럽게 입으면 당장 꼬장(신고) 들어가 북조선으로 잡혀갑네다.” 생존을 위한 변신이었다. 북조선 특무가 왜 왔는지, 스페인대사관 사건도 몰랐다. 그저 굶주림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김씨는 집요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탈북했는지는 기본. “김정일 그 새끼, 때려죽이러 같이 갈래?” 반응을 살폈다. “인민학교에서 처음 배운 영어가 뭐냐?” 성장과정도 검증했다. 그런 뒤에야 “형, 얘들 북조선 맞아” 하고 결론냈다.
불안과 공포, 의심의 눈동자…
공안과 특무를 피해 숨죽였을 아이들에게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탈북자 행세로 어리숙한 한국 관광객 주머니를 노리는 조선족들이 널려 있고, 탈북자들 가운데는 입맛에 맛는 답변으로 동정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근처 식당에 데려갔다. 전명남(가명·19). 함경북도 무산 출생, 99년 탈북, 지난해 10월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된 뒤 평북 집결소에서 10일 동안 구류를 살고 올 2월 다시 탈북. 김윤호(가명·18). 함북 해산 출신, 98년 7월 부모를 잃고 탈북, 2000년 10월 중국 톈진에서 한국 관광객을 앞질러가 구걸하려 온천 담장을 넘다 공안에 붙잡혀 북송, 다시 탈북. 이들은 형제처럼 묶여 좀더 안전한 곳을 찾아 옌지, 다롄을 거쳐 선양까지 들어왔다. 선양의 현실 앞에 나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여기 오면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네다. 단속이 이렇게 심할 줄 몰랐습네다.” “나이 먹지 뼈 크지…. 돈 벌어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인민폐 20위안(우리돈 3400원)을 쥐어준 뒤 매몰차게 돌아섰다. 이들도 얼굴색이 변했다. 큰 도움을 기대한 눈치였다. 그러나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 독하게 마음먹었다. ‘값싼 동정은 도움이 안 된다. 흔들리지 말자.’ 탐문을 계속하던 나는 밤늦게 거리 한 귀퉁이서 이들과 다시 마주쳤다. 낮보다 더 불안해 보였다. “수령님 생일(4월15일)을 앞두고 공안 단속이 강화된답네다. 방값도 없고, 어데로 갈지도 막막합네다.” “한국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답변은 뜻밖이었다. “남조선이 잘산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러다 잡히면 죽습네다. 빨리 돈 벌어 조선으로 가겠숨네다.” 밀린 방값을 내주는 조건으로 이들의 은신처로 향했다. 선양시 한구석. 곧 무너져내릴 듯한 허름한 아파트 5층. 고린내가 진동하는 7평 남짓한 방에는 12명의 남녀가 우글거렸다. 탈북자와 부랑자에게 하룻밤에 5위안씩 받고 잠자리를 제공해온 50대 초반의 조선족 김영화(가명)씨는 낯선 얼굴에 당황했다. 사람들도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의 눈에는 불안과 공포, 의심이 서려 있었다. “지난 설 때 근처 아파트를 뒤져 북조선 사람을 3차나 실어갔슴네다. 우리 집서도 두명이 끌려가 한 사람에 2천원씩 벌금을 냈슴네다.” 김씨는 북조선 사람 25명이 한국에 간 뒤에는 공안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치기도 한다며 아이를 쫓아낼 수도 없고, 더 데리고 있을 수도 없다며 도와주라고 애원했다.
몸을 숨기는 세 가지 길
아이들도 매달리기 시작했다. “톈진으로만 보내주시라요.” 따뜻하고 한국사람들이 많아 훨씬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더 모른 체할 용기가 없었다. 탈북자의 고통을 직접 경험한 김형덕씨도 “형, 우리 얘를 좀 살려줍시다” 하며 압박했다. 한밤중 아이들을 선양역에 데려갔다. 그리고 99위안짜리 톈진행 차표 한장씩을 쥐어줬다. 삶은 계란과 함께. 괭한 두 눈을 부비며 “고맙습네다”, “이 은혜는 꼽 갚겠습네다”라고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탈북 소년들과의 첫 대면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김형덕씨는 “우리도 맘만 먹으면 얘들 정도는 얼마든 한국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탈북자를 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생각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만난 많은 탈북자들은 함께 가자고만 하면 언제든 따라나설 기세였다. 그러나 ‘내가 폴로첸이나 시민단체처럼 탈북자 몇 사람을 한국에 데려간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탈북자들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나는 되뇌었다. 아이들은 그나마 도심을 떠돌며 이런 식으로 버텨낼 수 있다. 그러나 탈북자들 말마따나 “뼈가 크면” 더 이상 구걸은 힘들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때문에 성인들은 어딘가에 몸을 숨겨야 한다. 3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여자는 농촌 총각에게 시집가거나 술집과 노래방에서 몸을 판다. 부부는 조선족으로 위장해 변두리 식당 종업원 등으로 연명한다. 성인 남자들이 제일 곤궁하다. 몸둘 곳이 마땅찮다. 때문에 헤이룽장성 등 북한과 멀리 떨어진 지역의 조선족 농가에 머슴으로 밥술이나 얻어먹든지, 도심의 조직폭력배 앞잡이나 범죄자로 전락한다. 한국행을 제외하면 그나마 농촌 정착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공안의 손길이 뻗치지 않고, 결혼상대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촌의 보호막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농촌도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인 지린성 옌지시 외각 한 농촌마을. 오랜 수소문 끝에 만난 박분녀(가명·25살)씨. 임신 7개월인 그는 탈북 8년째인 요즘이 훨씬 불안하다. 날 밝으면 이웃집을 전전하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공안을 피하려는 것이다. 15평 남짓한 허름한 농가에서 만난 박씨는 “지난달에도 집을 비웠을 때 공안이 들이닥쳐 북조선에 안 끌려갔습네다”라며 “큰 욕심도 없고 남편과 살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조선족 남편 리재수씨도 “애 밴 여자가 불을 죽인 뒤에나 집에 들어올 수 있다”고 애달파했다. 그나마 박씨는 마을 전체가 든든한 보호막이 돼준 덕에 버틴다. 남편이 사준 휴대폰이 목숨줄이다. 마을 입구에 공안 차량이나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주민들은 앞다퉈 휴대폰을 치고, 즉시 옌지나 선양 등 큰 도시로 숨어들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조·중 합동수색·검거는 없었다
%990005%% 농민들도 왜 공안의 단속이 심해졌는지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장길수 가족의 한국 입국 직후인 지난해 말부터 강화되기 시작했고, 스페인대사관 사건 이후 그 정도가 훨씬 세졌다고 전할 뿐이다. 최근 탈북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중국인 일가족 3명을 살해하고 달아난 뒤 길거리에 검문소까지 설치됐다. 마을 어른인 김경철(가명)씨는 “우리야 북조선 사람들을 데려다 쓰고 싶지만 하룻밤만 재워줘도 벌금 5천원”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며칠 전에도 40대의 북조선 남자가 밥만 먹여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왔지만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농촌 공동체의 보호막이 마냥 안전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옌지 인근 다른 농촌마을에 살고 있는 김명화(가명·31)씨는 기자를 보자 “내 이리 앉아서는 말을 다 못하겠습네다”라며 왈칵 눈물을 쏟았다. 98년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앞길이 막히자 무작정 황해남도 개천 땅을 떴다.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 딸까지 낳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런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99년 11월16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도둑질하다 공안에 잡혀간 마을 주민이 그의 존재를 알려주고 풀려났다. 그는 북송됐다. 탈북행렬 초반이라 북한에서 극심한 고초를 당했다. 그리고 2000년 3월24일 재탈북에 성공했다. “내래 이렇게 사는니 죽고 싶습네다. 너무 불안해 하루에 열번씩 한국에 가겠다는 생각이 듭네다.” 울먹이는 그는 어떻게든 한국에 가겠다며 주소와 연락처를 물었다. 언젠가 그가 한국땅에 발을 디딜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상황이 험악해도, 국내 보수언론에서 보도하듯 북한 보안원과 중국 공안이 함께 탈북자를 수색하거나 검거하는 일은 없었다. 또 신고자에게 1천위안씩 보상금을 주지도 않는다. 주민들은 북한 특무인 조교들이 탈북자 존재를 확인한 뒤 공안에 신고하는 게 가장 보편적이라고 말했다. 중국 공안도 신고가 접수되면 검거해 북송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악용한다는 것이다. 3월29일과 30일. 국내 언론이 탈북자들을 트럭에 실어 마구 북송하는 곳이라 보도한 카이산툰, 쿠먼, 숭선 등 국경마을을 집중적으로 뒤졌다. 두만강 북동쪽 물줄기를 따라 중국과 북한이 국경을 맞댄 카이산툰에서 투먼에 이르는 30여km 구간은 삼엄했다. 곳곳에 중국 군인들이 임시검문소를 설치한 채 차량과 행인을 검문했다. 자동차 좌석 밑에 카메라를 숨긴 채 나는 마음을 졸였다. 군인들은 “일이 났다”며 한국 여권을 제시하는 이방인이 못내 미심쩍다는 듯 아래위로 훑어내렸다. 이때마다 동행한 조선족들이 ‘친척’이라고 보증을 섰다. 카이산툰 인근마을. 20m쯤 돼보이는 강 너머에는 들불을 놓는 북한 농부들이 보였다. 달래를 캐는 50대 촌로들에게 다가갔다. 한달 전만 해도 이틀에 한번씩 북조선 사람들이 넘어왔는데 중국군 경비가 삼엄해진 뒤 싹 줄었다고들 했다. 이들은 “배고프다고 넘어올 때마다 밥을 줬는데 요즘에는 콩자루, 쌀자루까지 집어간다”며 “인심이 예전만 못하다”고 말했다. 조·중 국경마을의 조선족과 한족은 탈북자들에게 가장 온정적이었다. 그러나 탈북자들이 치안불안 요인이 되자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나마 백두산 관광객들의 통행로인 투먼지역은 아직 연민이 남아 있었다.
숨죽이다 주말이면 교회로
옌지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떨어진 화룡시.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조선사람 쓰면 벌금뭅네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화룡에서 다시 비포장도로를 타고 3시간 달려 도달한 숭선. 분위기는 너무 차가웠다. 인가도 거의 없었다. 15m 정도 강을 사이에 두고 가끔 북한군 막사와 땅 속에 숨겨진 경비초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군 검문소에서는 차량 뒤트렁크까지도 샅샅이 뒤졌다. “왜 그러냐”고 묻자 “비밀”이라며 입을 닫았다. 안내자들은 북한을 통한 밀수범과 탈북자를 잡으려는 것이라 설명했다. 검문소를 통과해 도달한 고성리 국경교. 20m 길이의 다리 하나를 사이로 인공기와 오성기가 나부꼈다. 중국군 경비대는 기념촬영조차 금하며 우리를 마구 내몰았다. 안내자들도 사색이 됐다. 미국 국적을 가진 관광객도 카메라를 빼앗겼다며 흉측한 봉변을 당하기 전에 빨리 떠나자고 보챘다.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국경교 앞 식당과 상점을 드나들며 “북조선 사람들이 이리로 돌아갑니까”라고 물었다. 한족이나 조선족 모두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 조선족 식당 여주인만이 “가끔 트럭에 싣고 와 한줄로 묶어 넘겨줍네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곧 “지난해에 많았습네다”라고 덧붙였다. 두만강 인접 조·중 국경은 이렇듯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그 삼엄함 속에서도 탈북자들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투먼 성루다리 광장. 뒷골목으로 들어서자 한 아이가 다가왔다. “배가 고픕네다. 돈 좀 주시라요.” 함경북도 샛별군에서 넘어온 16살 소년. 30m 강건너에는 북한군이 도열해 있고, 중국군의 색출작업도 하루종일 계속됐지만 그는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접근했다. “중국 안쪽으로 가고 싶지만 경비가 바빠 어쩔 수 없습네다.” 옌지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하자 검문소에서 붙잡혀 북조선에 돌려보내질 것이라며 사색이 됐다. 곳곳에 뿌리내린 교회 주변에도 탈북자들이 서성였다. 숨죽이다 주말이면 교회로 몰려든다. 한달에 20위안 정도 생활비가 제공되고, 운좋으면 자신을 한국으로 데려다줄 비용을 댈 귀한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적극적으로 한국행 모색해보지만…
모두가 요행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험악해지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한국행을 모색하는 탈북자도 있다. 옌지시 외곽, 석탄재가 나부끼는 허름한 아파트에는 4명의 탈북자가 모여들었다. 40대 여자 둘, 20대 남자 둘. 이들의 목표는 오직 한국이었다. “지난해 딸이 한국에 도착해 대전에 살고 있다”는 리현성(가명)씨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이들의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돈도 없고 신분증도 없이 몽골이나 베이징의 외국 대사관까지 가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늘밤에라도 조선족 남자만 구하면 부부와 자식으로 속이고 몽골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불안감 때문일까. 그들은 계속 “다른 길이 없겠냐”고 되물었다. 안타깝고 숨이 막혀왔다. 시민·종교 단체는 이런 절박함을 보다못해 탈북자들의 한국행 이벤트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국민적 관심과 국가의 정책 전환을 강제하려는 몸부림인 셈이다. 그러나 이때마다 중국 공안의 단속은 강화되고, 수만명의 탈북자들이 숨쉴 공간은 더욱 좁아진다. 너무 부조리해 보이지만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들이 매일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그 현실에 나는 영영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선양·옌지·장춘·화룡·도문·숭선= 글·사진 신승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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