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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등록 2002.04.03(수) 제403호

[표지이야기] 군비통제기구 만들자

각종 전력증강 사업과 국방예산 전반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적 개입도 절실

“미 보잉사는 1997년 외환위기 뒤 여객기 판매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약 2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약 40억달러 규모인 이번 차기 전투기 사업이 F-15로 결정될 경우, 현 정부 들어서만 약 60억달러를 보잉사에 들이붓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1가구당 100만원에 달하는 액수를 미국의 한 회사에 몰아주는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전략증강계획, 입안단계부터 감시해야

5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할 ‘차기 전투기 사업’(F-X) 기종 선정을 둘러싼 논란과 의혹이 1차 평가결과 발표 뒤 급속하게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를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고 말한다. 지난 10여년간 국방부가 시행한 율곡사업·백두사업 등 각종 전력증강 사업 대부분이 비리의혹으로 얼룩져왔기 때문이다.

지난 1990년 국방부가 한국형 전투기사업(KFP) 기종으로 애초 1989년 12월 대통령 결재까지 난 F-18을 F-16으로 변경했을 때도 최근과 같은 논란이 벌어졌다. 국방부는 당시 “가격인상과 예산부족”을 기종 변경 이유로 내세웠지만, 로비와 외압에 대한 폭로와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같은해 이뤄진 해상초계기 도입 사업도 미국 록히드사의 오리온 대잠초계기(P3C)로 기종이 결정되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더니, 지난 1998년 도입단계에서 중계수수료를 과다계상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1996년 실시된 백두정찰기 도입 사업도 논란 속에 미 레이시온사의 ‘호커 800XP’를 최종 기종으로 선정했으나, 2000년 로비스트 린다 김(한국명 김귀옥)의 이른바 ‘몸 로비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다시한번 의혹에 휩싸였다. 또 1997년 도입이 결정된 인도네시아산 CN-235 수송기도 도입 결정 과정에서는 동티모르 민중을 무참히 탄압한 수하르토 정권과의 유착설이 제기됐으며, 1억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지불하고도 납기가 계속 늦춰져 말썽이 돼 오다 지난달에야 주문물량 8대 가운데 일부만이 납품됐다.

군사평론가 김종대씨는 “지난 10년간 국방부가 도입한 ‘날아다니는 물건’치고 제대로 된 결정이 전혀 없다”며 “이번 차기 전투기 사업 역시 익히 봐온 일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지난 3월29일 오후 서울 안국동 참여연대 2층 강당에서 ‘대형 무기도입 사업,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평화네트워크 주최)에서 참석자들이 입을 모아 “국방관련 법령을 대폭 손질해 예산편성 과정에서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는 현행 시스템을 전력증강 계획을 입안하는 단계에서부터 국회가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개편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동국대 이철기 교수(정치학)는 “대형 무기도입 사업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도 군사기밀을 이유로 정보에 대한 접근조차 가로막히면서, 그동안 이와 관련한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이뤄지지 못해왔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어 “비밀의 장막에 둘러싸인 채 불합리하고 몰상식하게 이뤄져온 무기도입 사업의 문제점이 이번 차기 전투기 사업을 통해 다시한번 극명히 드러난 것일 뿐”이라며 “이번 기회에 그동안 ‘성역’으로 군림하며 국방부가 주도해온 무기도입 과정 전반에 대한 제도적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부 무기도입 주도’ 문제있다

대형 무기도입 사업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에는 불평등한 한-미 관계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국방부 관계자 상당수가 ‘어차피 한-미 동맹관계 속에서 미국산 무기를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무기도입을 둘러싼 미국의 외교적 압력을 당연시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한-미 군사동맹의 불평등성에 대한 인식 없이 미국의 우월적 관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군 내부 기득권층의 태도가 무기도입 사업의 방향을 결정짓고 있다는 진단이다.

군사평론가 김종대씨도 “국방부가 국방관리운영의 준거틀로 삼고 있는 핵심정보에 대한 대미 의존도가 높다 보니, 이를 바탕으로 마련되는 전력증강 사업에 미국 쪽 입장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대북 정보에 대한 미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하는 ‘한반도정보판단보고서’는 한-미연합사가 내놓은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겉표지만 바꾸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비상시를 대비해 작성하는 ‘작전계획 027’도 한미연합사의 ‘작전계획 5027’의 하위문서로 분류돼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 김씨의 지적이다. 결국 굴절된 한-미군사동맹체제의 한계가 고스란히 대형 전력증강사업에 투영되는 상황에서 무기도입의 대미 편향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정상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부가 수요군의 선택권을 박탈한 채 무기도입 사업을 주도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각 군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다, 불평등한 한-미군사동맹 관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국방부가 무기도입을 주도할 경우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이미 군 안팎에서는 “오는 2040년까지 사용할 차기 전투기 기종 선정도 이를 사용하게 될 공군이 직접 결정하도록 했다면, 단종을 앞두고 부속품 조달조차 우려되는 보잉사의 F-15로 기종을 선택하겠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형 무기도입 사업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군비통제기구가 나와야 한다는 지적도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군비증강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국방부가 군비통제 분야까지 책임진 현실에서 국방부가 ‘제 살 깎기’에 나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김숙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공동대표는 “독일의 경우 의회 차원에서 국방감독기관을 마련해 군비증강 계획 등의 입안단계에서부터 감시활동을 벌이는 한편 국방부 업무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성역화하지 않도록 일상적인 감시·조사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현재 국방부와 외교통상부 군축과 등으로 나뉘어 있는 군비통제 또는 감축 업무를 담당할 기구가 마련돼 대형 군비증강 사업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장치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기 교수도 “국방부는 지난 90년대 중·후반부터 한반도 주변 500km를 이른바 ‘절대방위권’으로 설정하고, 유례없는 대규모 예산을 쏟아부으며 초현대식 무기체계 도입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한반도 주변국까지 포괄하는 쪽으로 국방·안보 개념을 바꾼 것에 대해 정부는 단 한차례도 국민적 동의를 구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1998년 국방개혁추진위에서 내놓은 국방기본정책서에서 제시한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들겠다는 원칙 가운데 ‘작은 군대’는 어느틈엔가 사라지고 ‘강한 군대’ 정책만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천문학적인 국민혈세를 쏟아부으며 진행하는 전력증강 사업은 계획입안 단계에서부터 국민의 감시와 견제를 받도록 제도적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F-15K 선정 철회 노력할 것”

국방예산 전반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적 개입’이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태식 ‘안보를 생각하는 사람들’ 대표는 “국방부가 지난 1999년 발표한 국방중기계획(2000년∼2004년)의 예산규모는 약 28조원에 머물렀으나, 지난 2월 발표한 국방중기계획(2003년∼2007년)에서는 약 98조원으로 비약적으로 예산규모가 늘어나고 있다”며 “차기 전투기 사업의 경우처럼 사업 막바지에 기종 선정문제를 두고 ‘F-15냐, 라팔이냐’고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전력증강 사업 등 국방정책의 전반적인 흐름이 남북 긴장완화 등 변화된 안보환경에 걸맞게 추진되고 있느냐를 계획 입안단계에서부터 시민사회가 감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난해 시민사회가 광범위한 반대운동을 벌여온 차세대 공격용 헬기(AH-X) 도입 사업이 사실상 중단된데다, 차기 전투기 사업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폭발하면서 이 같은 논의는 더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태호 실장은 “차기 전투기 사업이 사실상 F-15로 결정됐다지만, 최종 결정이 나기 전까지 이를 철회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기종 선정 과정에 대한 의혹을 해소시키기 위한 정보공개 청구운동과 1조6천억원에 달하는 추가예산 승인 반대운동 등을 벌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지난 2월 발효된 부패방지법에 따라 차기 전투기 사업 전반에 대한 국민감사 청구를 요구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부패방지법은 국민 300명 이상이 서명하고, 감사를 해야 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임의감사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중적인 반미의식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차기 전투기 사업을 둘러싼 의혹과 논란이 국방예산 감시운동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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