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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대통령’ 하야하다 인터넷 텔레비전에 밀려 영향력 상실하는 조선·동아…언론을 보는 국민들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준절한’ 사설의 속내
“‘조선일보의 몫’은 한발 한발 개선과 향상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자임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어려운 낱말을 골라쓰는 것도 인지상정에 가깝다. “신문이, 조선일보가 앞장서 시작하지도 않은 쟁점임에도, 우리가 마치 그 사안의 원초적인 책임당사자인 양 낙인찍히고 사갈시된 일련의 사태에서 새삼 정도에 바탕한 ‘정치인의 몫’이 준절히 강조돼야 함을 절감한다.” 사전을 보면 ‘사갈시’는 ‘뱀이나 전갈을 보듯 아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나오고, ‘준절히’는 ‘매우 위엄 있고 정중하게’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설의 말투는 시종 단호했다. “(조선일보는) 특히 대선을 앞두고 ‘누구를 배척하는 신문’, ‘누구를 편드는 신문’이라는 비언론적 상황으로 일탈하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자생적 항체를 보유하고 있음을 정치 쪽에, 그리고 만천하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천명”하면서 “정치나 신문이나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가운데 피차 건강하고도 명예로운 긴장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소보다 긴 사설의 길이에 값할 만큼, 문체에는 비장한 기운마저 흘렀다. 그러나 사설을 읽고난 기분은 사뭇 야릇했다. 왜일까. 사설이 ‘준절히’ 강조한 내용을 ‘경박한’ 화투판의 언어로 바꿔보자. “우리가 ‘고’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한테 ‘독박’을 씌우려고 하느냐”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국유화와 폐간 발언을 한 건 노무현이고, 그걸 처음 까발린 건 이인제인데, 협박을 당한 조선일보를 벌레 보듯 하니 억울하다는 항변을 하고 싶었음직하다. 그리고 이런 태도에서 ‘낮의 대통령’조차 눈치를 보게 해온 ‘밤의 대통령’의 막강한 힘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조선일보에 견줘, 최근 동아일보의 보도 태도는 눈에 띄게 공격적이다. 4월 초순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 대구-인천-경북 ‘슈퍼 3연전’이 끝난 직후부터 동아일보는 노무현 후보에 대해 전보다 훨씬 강도높은 융단폭격을 쏟아부었다. 물량공세만이 아니었다. “노 후보의 발언은 언론의 존재 근거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는 이처럼 노 후보의 술자리 발언이라고 폭로한 이인제 후보 쪽의 주장을 아예 기정사실로 전제한 채 보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지면에서 노 후보는 심지어 ‘정신나간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성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지 않는가.”(이민웅 한양대 언론학과 교수 4월8일치 시론 ‘신문을 마음대로 없앤다고?) 그러나 ‘사실에 입각하라’는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가르치는 언론학자의 글 또한 그리 성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발언의 진위와 본질을 떠나 ‘폐간 대상’으로 지목된 동아일보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생존의 절박함이 여과 없이 묻어나는 이런 보도 태도를 마냥 나무랄 수만도 없는 노릇 아닐까.
언론학자 “영향력 떨어졌다”
<한겨레21>이 4월12일 한국언론학회 소속 언론학자들 가운데 무작위로 27명에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영향력 변화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 결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영향력이 떨어졌다는 의견이 절대다수를 이루었다. 응답자 가운데 5명이 “지난 1년새 조선·동아의 영향력이 아주 떨어졌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19명은 “조금 떨어졌다”고 답변했다. 이에 비해 “변화없다”(2명)와 “조금 높아졌다”(1명)는 의견은 극히 적었다. 조선·동아의 1년새 신뢰도 변화에 대해서는 “아주 떨어졌다” 4명, “조금 떨어졌다” 18명, “변화없다” 4명, “조금 높아졌다” 1명 등의 의견분포를 보였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4월 초순에 벌어진 ‘슈퍼 3연전’은 그전까지의 경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노풍이 더 세냐, 조·동이 더 세냐.’ 경선은 형식상 민주당 후보 세 사람 사이에서 치러졌지만, 내용으로 보면 노무현과 조·동연합군 사이의 힘의 우열을 가리는 ‘정·언 대회전’ 성격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흔치 않은 대결에서 조·동연합군이 승리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지금까지 조·동의 융단폭격을 받고 살아남은 정치인이 없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예측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노무현 후보는 ‘슈퍼 3연전’에서 내리 3연승했다. 노 후보가 이긴 건 당내 지역경선이었지만, 세상의 민심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이긴 것으로 해석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어떻게 벌어진 걸까. 노 후보는 조·동연합군과도 싸워서 가뿐히 이겨낼 만큼 그렇게 막강한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세번이나 미끄러진 노 후보가 어느 날 갑자기 3연승할만큼 쉽게 막강해질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만 노 후보에게는 언론과의 싸움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남다른 강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노무현 지지자들 가운데는 ‘지향적 투표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상황논리에 따라 그를 지지하기보다는 인물 자체가 좋아서 지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의 네거티브 공세가 잘 안 먹힐 수밖에 없다.” 한 언론학자는 “비록 노무현에 대한 지향적 투표성향이 강하더라도 이인제나 이회창도 지향적 투표성향을 가진 지지자를 많이 확보하고 있다면 노무현에 대한 조·동의 공세가 훨씬 잘 먹혀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달라진 건 독자
5공화국 때 터진 보도지침 사건과 노 후보의 술자리 발언은 단순비교가 불가능한 사안이다. 하지만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터져나온 보도지침 사건이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에 견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대단히 중시되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노 후보의 술자리 발언이 해프닝으로 끝나가고 있는 것은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앞서의 언론학자는 “이 사건이 5공 때 터졌으면 오히려 훨씬 큰 문제가 됐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국민들은 언론자유에 대해 5공 때보다 낮은 의식수준을 갖고 있다는 뜻일까. “언론자유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인식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지금은 정치권력이 언론에 강제적 제약을 가할 가능성을 대단히 낮게 보는 대신, 언론자유를 왜곡·편파보도의 자유와 분리해서 보는 것 같다.” 김동민 한일장신대 교수는 “그동안 시민사회가 벌여온 언론감시활동과, 특히 지난해 언론개혁운동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영향력 저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달라진 건 다름 아닌 독자다. 독자들의 변화는 한국사회의 매체환경, 나아가 정보유통 패러다임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변화의 선두에는 단연 인터넷이 있다. 조·동연합군에게 인터넷은 가장 위협적인 신병기다. 김능구 이윈컴 대표이사는 “이제 젊은층은 신문보다 먼저 인터넷 매체를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며 “그들에게 메이저 언론의 여론몰이는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전 국민의 63%에 이르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신문 열독률은 67.4%다. 신문 독자 가운데 상당수가 인터넷을 통해 신문을 검증하고 있는 셈이다. 언론학자들의 의견도 인터넷 매체의 약진에 높은 점수를 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27명 가운데 12명이 “1년새 인터넷 매체의 영향력이 아주 높아졌다”는 의견을 냈으며, 11명은 “조금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변화가 없다”는 의견은 3명, “조금 낮아졌다”는 의견은 1명이었다. 특히 조선·동아의 영향력 약화 이유 가운데 ‘인터넷 매체의 영향’을 1순위로 꼽은 경우(5명)가 ‘신뢰도 저하’(10명)를 1순위로 꼽은 다음으로 높았다.
신흥 독립언론도 자리 구축
방송과 조선·동아를 제외한 다른 신문들의 의제와 논조 차별화도 매체환경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문화일보가 민주당 광주경선 전에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과거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에는 여론조사가 대부분 각 당의 역학관계에 따라 시기를 조절하거나 보도 자체를 하지 않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김능구 이윈컴 대표이사는 “이른바 경향·문화 등 신흥 독립언론들이 자기 자리를 구축해 나가면서 과거의 행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모습”이라고 풀이했다. 방송 또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조를 무조건반사처럼 따라하던 행태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 조선·동아의 영향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조선·동아를 구독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과, 조선·동아가 다룸으로써 다른 매체나 다른 매체의 독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다. 예전에는 자신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다른 신문들과 방송에 의해 조선·동아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두 신문의 영향력은 자신들의 독자, 특히 정치적 관점과 이해를 공유하는 일부 독자들에게 국한되어가고 있다. 그 정도 영향력만으로는 더 이상 ‘밤의 대통령’ 자리를 유지할 수 없고, ‘낮의 대통령’을 ‘임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정작 당사자들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우리 회사도 지금 국면이 우리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끝까지 가면 이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이야 노무현 돌풍이 불어 조·동의 공세가 안 먹히지만 상승세가 한풀 꺾이는 순간 제대로 하나 걸면 넘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9년차 동아일보 기자는 “사주와 일부 사주 친위대원들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브레이크도 없이 치달리고 있다”며 “이 회사에 더 남아 있어야 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4월10일치 사설 ‘정치인의 몫, 신문의 몫’은 “심판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조선일보’에는 이 사설에 대해 400건 가까운 독자의견이 붙어 있다. 바로 조선일보가 처해 있는 새로운 매체환경이다. “심판은 국민의 몫이다? 그럼 그 심판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독자의견의 판세는 확연히 기울어 있다. 달리 국민의 심판이 더 필요할까.
안영춘 기자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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