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hani.co.kr/h21 |
|
| 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2.03.27(수) 제402호 |
|
[표지이야기] 영남 중진에 기댈 수밖에… ‘노풍’에 고심하는 이회창 총재의 선택… 비주류의 당 개혁안 보다는 보수층의 지지 확보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주변 인사들은 요즘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 어수선한 당 내분사태와 심상찮은 영남 민심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려는 것이다. 몇몇 측근 참모와 사무처 실무 당직자들은 “몇주도 아니고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민심이 뒤바뀔 수 있는 거냐”며 “맏서방이 나오자 데릴사위는 완전히 뒷전”이라고 푸념한다.
“영남 보수층에 혼돈 일으킬라”
영남마저 이 총재를 버리는 것일까? DJ정권에 대한 영남의 분노는 그동안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을 통해 표출됐다. 2000년 4·13 총선 때 김윤환·이기택·신상우 등 영남 출신 거물들이 민국당 간판을 내걸었지만 틈새를 허용하지 않았다. “야당분열론”을 외친 한나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다. 이 총재가 ‘세풍’ ‘총풍’으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도 영남은 든든한 바람막이였다. 이회창 죽이기 음모라는 한나라당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는 심상찮다. 박근혜 의원 탈당과 ‘노무현 돌풍’ 앞에 그토록 강고하던 영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부산·경남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이 총재를 앞질렀다. 대구·경북에서도 두 사람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침통하다. 주류를 자처해온 영남 민정계 의원들은 박근혜 의원 탈당 때까지도 자신만만했다. “나가봐야 별볼일 없다. 영남 민심은 박 의원에게 야당분열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영남은 올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결국 이 총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신화는 깨지고 있다. 부산 출신 한 의원은 “고향 부산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노무현을 찍겠다고 날마다 전화한다. 너는 한나라당서 뭐하는 거냐고 난리다”며 “영남 몰표라는 대전제는 이미 무너졌다”고 말했다. 영남의 동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민심을 어떻게 다잡을 것인가? 이 문제는 한나라당 안 각 세력의 앞날이 걸린 주요 화두다. 진단과 해법에 따라 대선전략은 물론 핵심 당직과 6월 지방선거 공천 판도가 뒤바뀔 수도 있다. 영남 민정계는 민심동요를 일시적 현상으로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박종근 의원(대구·달서갑)은 “노풍은 검증되지 않은 일시적 현상으로 이 총재의 기존 지지층을 흡수하는 수준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주영 의원(경남·창원을)도 “지역 사람들은 노씨를 민주당 사람으로 보지 PK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며 “대선전에 다 사그라질 것이다”고 전망했다. 영남 중진들은 민심동요 원인도 한나라당의 정체성 혼란 탓으로 돌린다. 김용갑 의원(경남 밀양·창영)은 “민주당원보다 더 혁신적 사고가 있는 몇몇 의원들이 당 안에서 계속 잡음을 내면서 핵심 지지층인 영남 보수 쪽에서 혼돈을 일으킨다. 영남은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보수와 혁신을 끌어안는 이 총재의 ‘양날개 전술’이 비주류와 몇몇 소장파 의원의 목소리를 너무 키웠고, 결국 영남 보수성향 유권자까지 등돌리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보수세력 중심의 집권전략을 전면에 내세울 때라고 입을 모은다. 김 의원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보수층은 더욱 결집한다”며 “상대가 누구든 우리가 보수의 대변자라는 것을 좀더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 후보가 약진할수록 영남 보수층의 불안심리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대선구도를 보혁 대결로 이끌면 유리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들은 노 후보 출신 지역인 PK 일부가 이탈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PK집권에 반감을 갖는 TK가 더욱 결속하고 이 총재의 연고지인 충청을 독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순봉 의원(경남 진주)이 당 개혁을 요구해온 비주류와 소장파를 ‘쥐새끼’로 묘사한 것도 영남 민정계의 이런 정서가 작용했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쥐새끼 발언은 영남 중진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돌던 얘기였다”며 “이들은 당을 망치는 비주류를 신속히 정리하는 게 정권 재탈환의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민심동요의 1차 책임은 총재”
반면 이 총재 주변 소장 참모들과 비주류 의원, 사무처 실무당직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이들은 영남 중진들의 이런 주관적 상황판단과 대세론에 안주한 채 변화를 회피해온 이 총재에게 영남 민심동요의 1차적 책임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부영 의원은 “주류라는 분들은 노무현 돌풍을 일시적 거품으로 보고 싶겠지만, 그 속에는 변화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국민적 경고가 담겨 있다. 보수층이 두터운 영남마저 변화를 바란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고 진단했다. YS나 DJ와 다를 것이라 기대해온 이 총재가 기성정치권의 행태를 계속 답습하자 영남마저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한 측근 참모는 “영남 결속을 통한 집권전략은 이미 97년 대선 때 한계를 드러냈다. 변화 요구에 발맞춰 감동정치를 통한 외연확대가 올바른 방향이다. 하지만 영남 중진들은 번번히 이 총재의 변신을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주인을 자처해온 영남 중진들의 오만과 독선이 이 총재와 영남 민심을 갈라놓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구체적 오판사례까지 나열한다. 먼저 박근혜 의원이 완전국민경선과 대선 전 당권대권 분리를 요구할 때 참모진 일각에서 전격수용을 진언했다. 탈당명분을 막으면서 국민에게 이 총재의 포용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영남 민정계는 “탈당명분을 쌓으려는 박 의원의 술책에 말려서는 안 된다”며 버텼다. 노무현 돌풍과 비주류 반발로 영남 민심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한 지난 3월18일 밤. 한나라당 안팎에는 이 총재가 총재직 불출마와 집단지도제체 조기도입을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측근 참모들도 “이번에는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지난 3월19일 발표된 수습안은 기대 이하였다. 여기에도 영남 의원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몇몇 의원들은 발표 당일 새벽에 이 총재의 가회동 자택을 찾아가 “비주류 손을 들어주면 차라리 우리가 당을 뜨겠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무당직자들 사이에는 “영남 보수파 의원들은 정권 재탈환보다 영남에 뚜렷한 연고가 없는 이 총재의 불안심리를 자극해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영남 의원 다수가 당 내분 수습과 집권전략 수립보다 부총재 경선, 단체장 경선에 뛰어들어 각개약진하고 있다. 몇몇은 ‘창심’을 들먹이며 내분을 촉발시켰다.
YS·비주류 달래기에 나서
당내 각 세력들의 진단과 해법이 어떻든 최종 선택은 이 총재 몫이다. 이 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누가 뭐라든 이 총재가 변화를 거부하면 속수무책”이라며 “이 총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일단 동요하는 영남 민심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3월22일 부산을 찾은 이 총재는 고개를 숙였다. “자리만 허용된다면 부산 의원을 다 중용하고 싶다. 부산은 야도다. 숙원사업을 열심히 풀고 국회에서 모든 지원을 하겠다.” 23일 김혁규 지사의 출판기념회장에서는 “존경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내외분이 오신 자리에 함께 낄 수 있게 돼 영광”이라며 “지방자치제 실시는 김 전 대통령의 치적 중 하나다”고 극찬했다. 노무현 돌풍 앞에서 흔들리는 부산 민심을 잡기 위해 YS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이 총재는 한나라당 경남지사 후보 경선 신청을 전격 취소한 김혁규 지사를 합의추대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도 YS 집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용태씨를 밀자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비주류를 달래며 감동을 줄 수 있는 묘책도 구상하고 있다. ‘쥐새끼’발언 파문의 주역인 하순봉 의원을 부총재직에서 중도하차시키면서 부총재단 일괄사퇴서를 받아냈다. 영남 측근 배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 총재는 △주류와 비주류를 망라한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소장파 의원의 부총재직 출마로 당의 활성화 유도 △이 총재의 총재직 불출마 선언과 집단지도체제 조기 도입 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변신시도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미지수다. 소장 참모들과 미래연대 소속 의원들은 대대적인 인적 청산과 한나라당의 대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성헌 의원(서울 서대문갑)은 “당권 대권을 분리하고 이 총재는 대선후보로만 남아야 한다”며 “당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집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영남 중진들의 논리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남에 뚜렷한 기반이 없는 이 총재가 영남 중진들과 얼마나 거리를 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남 중진들도 거센 외풍 앞에 잠시 몸을 숙이고 있지만 계속 당할 까닭은 없다. 정창화 의원(경북 군위·의성) 등은 벌써 “지방선거가 코앞에 와 있는데, 언제까지 소모적인 내분만 계속할 것”이냐며 “소장파들의 집단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당헌·당규에 명시된 대로 대선 이후 집단지도체제를 실시하자며 이 총재의 총재경선 불출마에 반대한다.
비주류의 비관은 현실이 될까
당 안팎에는 이 총재가 지난 19일 수습안을 발표할 때 이미 영남 중진 중심의 집권전략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총재를 가까이에서 보좌해온 한 측근은 “이 총재가 가려는 정확한 길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충정을 믿어달라며 버티는 영남 중진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비주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당내 기반을 실질적으로 장악해온 영남중진의 손을 들어줬다는 것이다. 이 인사는 “당 안팎에서 왜 총재가 변하지 않느냐고 아우성이지만, 그것은 평론가들의 무책임한 주장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영남이 흔들릴수록 기반 없는 이 총재는 영남 중진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주류 쪽은 이런 노선이 지속되면 정권 재탈환은 어렵다고 비관한다. 한 소장 당직자는 “민정당으로 복귀해 정권을 잡겠다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YS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의원(부산·사하을)도 “영남에서 이 총재의 지지는 반DJ 반사이익에만 의존한 취약한 구조로, 쉽게 무너질 사상누각”이라며 “대안 없는 영남이 계속 밀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발상의 대전환 없이는 집권이 무망하다”고 주장했다. 흔들리는 영남 앞에서 이 총재는 ‘데릴사위’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