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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2.03.27(수) 제4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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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남이 꿈틀댄다 노무현 돌풍 속에서 흔들리는 부산과 대구의 민심 기행
<한겨레21>은 선거에 큰 변수로 떠오른 영남지역 민심을 살피기 위해 부산과 대구를 누볐다. 여론조사기관들은 '노무현 돌풍'의 진원으로 영남표의 이동을 지목하고 있다. 수도권 30대에서 발진한 바람이 광주의 선택 이후 영남 표심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돌풍으로 드세졌다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추세가 드러났다. 과연 그럴까? 여론조사가 숲이라면 민심기행은 나무 사이를 누비는 것이고, 여론조사가 망원경이라면, 민심기행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일 터. 민초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었고, 여른을 이끄는 지식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봤다.
기성 세대 미풍, 젊은 세대 바람 - 부산 변화된 상황 속 말 아끼는 부산 시민들…젊은 세대에게 광주 경선은 충격으로
황사는 예외가 없었다. 수도권 지역 초등학교 문을 닫아걸게 만든 모랫바람은 부산 지역의 하늘마저 누렇게 점령하였다. 한 택시기사는 물었다. “서울은 더하지예?” 물론 더했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의 같음과 다름은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 경계는 황사주의보 아래의 가시거리만큼 흐릿했다. 다르지만 식별하기 어려웠고, 식별해도 단정하기 어려웠다. 지난 3월22일 오전, 김해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노선버스를 탔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 운전기사와 맨 앞자리에 앉은 초로의 남자 승객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다. “요즘 여기 어떤교?”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듯한 승객은 거두절미해서 묻자 운전기사도 자르듯 대답했다. “노무혀∼니 바람 대단하다 아입니꺼.” 두 사람 사이의 이심전심 대화법에서 ‘노무현 돌풍’이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읽을 수 있었다.
‘과묵함’의 원인은?
노무현씨에게 숱한 정치적 좌절을 안겨줬다지만, 어찌 됐든 그는 ‘부산 갈매기’를 함께 부르는 고향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짐작이 섣부른 것이었다. “기사님은 노무현씨 친척인갑지예?”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여성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화를 가로챘다. “낸 관심도 없습니데이.”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무엇에 관심이 없다는 말일까. 노무현? 아니면 정치? 노무현의 호부호형(呼父呼兄)을 이제 허(許)할 것인가. 부산사람들은 그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을 읽는 건 쉽지 않았다. “운전대 잡아 입에 풀칠하고 사는 내가 무신 정치?” 서울의 황사를 묻던 택시기사는 정치 얘기를 꺼내자 턱 밑으로 내려놓았던 마스크를 끌어올렸다. 부동산중개업자 손아무개(50)씨는 “카드 돌려 카드빚 막고 사는 나보다는 골프장에 드나드는 사람들 찾아가보는 게 빠를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부산의 ‘과묵함’은 경제난에서 비롯한 것일까. 지표로 나타나는 부산의 경제사정이 전국평균보다는 낫다는 이 지역 상공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들의 개별적 생계고가 부산의 보편적 과묵함을 설명하기에는 벅차 보였다. 정용하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밝히기 싫은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동환 부산경실련 사무처장은 “변화한 상황을 내면적으로 새로 정리하는 시기여서 말을 삼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들이 말을 아껴도, 노무현 돌풍이 그의 정치적 고향에서 얼마나 돌발적인지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산사람들은 그를 명쾌하게 규정해왔다. 그를 지지한 사람이나 거부한 사람이나, 아무도 그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시장이든 국회의원이든. 그러나 그는 어느덧 부산 바깥에서부터 될 성 부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대통령 감으로. 정권교체를 가져다줄 대리만족 대상으로 이회창씨를 점찍은 부산사람들은 이제 노무현을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야 하는 혼란기를 겪고 있다. “관상봐라. 대통령 할 상이가.” 부곡동 골목길의 허름한 미장원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도무지 ‘깜’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변화라면 변화일까. 할머니한테서 “노무현이 김대중 앞잡이여서 안 된다”는 식의 오래된 방정식은 들을 수 없었다. 대신 할머니는 “잘해야 할 긴데, 요새 와그리 싸우는지 모르겠다”며 한나라당 걱정으로 돌아갔다. ‘솔직히’라는 말은 많은 부산사람들에게 입을 여는 전제조건처럼 보였다. “정치인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좋아한다”는 벤처사업가 손아무개(37)씨는 “부산은 ‘솔직히’ 노무현씨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지방선거에서 구의원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박아무개(38)씨는 “공부나 재력이나, 하다 못해 주먹까지도 우리가 호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민주당 광주경선을 보고 ‘솔직히’ 놀랍고 부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에게는 왜 ‘솔직히’라는 단서가 굳이 필요했을까. 이동환 부산경실련 사무처장은 “변화된 상황을 주체적으로 정리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런 단서조항을 달아야만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자신의 딜레마를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김아무개(23·부산대 4)씨는 “아버지는 심정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나라당을 찍겠다고 하신다”며 “그게 기성세대의 지배정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당 후보 노무현을 바라며
기성세대들에 비하면 20∼30대 젊은층들은 훨씬 간명하게 입장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광주시민의 선택은 꼼수를 따져야 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듯했다. 한 금융회사 세일스 매니저인 박아무개(34)씨는 “대학동기들 사이에는 민주당 광주경선을 본 뒤 입장을 명확히 했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며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내 처도 국민경선 참여신청 이메일이 오자 그 자리에서 바로 신청을 하더라”고 전했다. 기성세대의 희미한 미풍과 젊은 세대의 바람이 만난 부산의 선택은 어디를 향할까. “노무현 돌풍이 부산에서 민주당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지난달 5.7%에 머물던 당 지지도가 한달 만에 11%대로 뛰어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산시장 후보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는데 벌써 5명이 시장후보를 신청했다. 놀라운 변화다.” 민주당 부산시지부 윤원호 지부장은 “우리도 실감하기 어려운 바람이 불고 있다”면서도 “언제까지 순풍이 이어질지는 전망할 수 없다”고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부산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행복한 가상세계는 호남당 후보를 넘어서는 전국당 후보 노무현의 탄생이다.” 정용하 부산대 교수는 “부산사람들의 그런 모순된 욕구가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치판의 낡은 틀을 무너뜨리는 힘으로 작용할 것으로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라며 “부산의 민주당 국민경선은 그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부산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선택할까. 아직은 단정도, 식별도 어려워 보인다.
부산=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노풍’은 비껴갔으나 - 대구 무력한 한나라당에 대한 실망감 커지는 대구…부산과는 상당한 정서적 온도차
3월22일 오전 대구공항에 내렸을 때, 도시는 황사에 휩싸여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지난 3월16일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광주지역 경선 뒤 불기 시작한 이른바 ‘노무현 돌풍’도 대구 시내를 점령해버린 먼지더미를 걷어내지는 못하였다. 한나라당의 내분사태는 대구에도 파장을 전해오고 있었다. 문희갑 대구시장의 경선 불출마 선언이 비자금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대구 민심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구사람들은 흔들리는 민심을 다잡아줄 희망의 가능성을 쉽게 찾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대구는 혼란스워보였다.
“누가 우리한테 관심이나 있겠나”
“자포자기 상태죠.” 운수사업을 한다는 권아무개(41)씨는 ‘요즘 대구 사정이 어떠냐’는 물음에 주저없이 ‘절망’을 얘기했다. ‘외환위기 뒤 지난 몇년간 대구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하는가 했더니 딱히 그것만도 아니었다. “전망이 보이질 않아요. 몇년째 경기는 회복될 기미가 없는데도 정치권이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으니….” 시내 중앙로 부근에서 만난 조영래(47)씨는 정치 얘기를 꺼내자마자 열을 올렸다. “집안단속도 못하면서 뭐하겠다는 기고.” 안팎으로 몸살을 앓는 한나라당에 대한 ‘애정어린’ 질책이 계속됐다. 그런 그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자기들끼리 벌이는 집안잔치 아니냐”는 그의 퉁명스런 대꾸는 당연해 보였다. 광주 경선에서 영남 출신인 노무현 후보가 1위를 차지한 것을 두고도 조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광주사람들이 본선에 가면 노무현이가 잘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지역감정은 여전한 것 아니겠느냐”며 “다 재집권을 원하는 ‘김심’이 작용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구에서는 음모론이 여전히 먹히고 있었다. 대구의 남대문 시장으로 일컬어지는 서문시장에서 30여년째 과일장사를 한다는 이연자(61)씨도 정치권에 대한 불만부터 쏟아냈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초등학생보다 못하다”는 쓴소리가 쉽게 터져나왔다. “다 건져먹은 장독대 아이가. 누가 우리한테 관심이나 있겠나.” 그런 이씨에게 한나라당을 탈당해 신당을 추진하고 있는 박근혜 의원이 희망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이회창이 안 낫겄나. 경험도 없는 박근혜가 뭐 안다꼬….” 그러나 20년째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다는 박아무개(51)씨는 “표를 몰아준 한나라당이 우리한테 해준 게 없다. 박근혜가 아직까지야 아버지 덕을 보고 있지만, 앞으로 여론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느냐”며 박 의원에 대한 기대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고 당장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를 거둘 수 없는 미련이 대구·경북의 혼란스러운 민심을 더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말 걸기가 무섭게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던 한도순(78)씨는 “그래도 이회창 총재가 그중 가장 낫지 않느냐”고 결론을 내린다. 민주당 경선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는 한씨에게 노무현에 대해 물었다. 한참만에 입을 연 한씨는 “노무현씨가 요즘 한창 인기가 있는 모양이던데…. 청문회 한번 나왔다고 아무나 대통령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노무현 돌풍’도 대구에서는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했다. “박근혜 의원의 탈당과 노무현 고문의 돌풍으로 객관적인 정치환경이 바뀌고 있는데도 한나라당이 이에 대해 공세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다 보니 시민들이 느끼는 정서적 패배감이 큰 것 같다.” 대구 온조사연구소 위현복 소장은 “변화를 위한 노력도 위기감도 없는 한나라당과 이회창 총재에 대한 실망감은 크지만,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 요즘 대구·경북의 민심”이라고 진단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미세하나마 변화의 조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회사원 장선철(37)씨는 “이른바 ‘빌라게이트’와 ‘원정출산’ 논란을 두고 대구지역에선 세대 간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20∼30대는 ‘문제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50∼60대는 ‘그 정도 지위에 있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노무현 돌풍’에 대한 반응도 엇갈린다. 달성공원에서 만난 정봉덕(73)씨는 “노무현이 그 사람 전두환 대통령한테 명패 집어던진 사람 아이가”라고 되물으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경북대생 태한성(21·법학2)씨는 “요즘 텔레비전을 통해 노무현씨 얘기가 자주 나와 눈여겨보고 있다”며 관심을 표시했다.
변화의 조심, 보이지 않는 해답
경북대 노동일 교수(정치학)는 “대구에서도 지식인들 사이에선 노무현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급부상하면서 기존에 상식으로 여기던 대선구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변화의 조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중철 대구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변화를 말하기는 하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며 “가시적인 변화를 논하기는 아직 때가 이르다”고 진단했다. 노 후보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요동치는 부산·경남과 대구·경북 사이엔 상당한 정서적 온도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김 처장은 “민주당의 ‘바람’을 대구·경북에서 기대하는 것은 아직은 무리”라며 “설령 노 고문이 후보로 선출되더라도 지역정서에 깊숙이 배어 있는 민주당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을 쉽게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골수 깊이’ 자리잡은 반감과 30여년을 이어내려온 지역정서가 ‘바람’에 날려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아성’으로 불려온 대구·경북이 흔들리고 있는 것만은 또렷이 감지됐다. 그것이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인지, 켜켜이 쌓여온 정치권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요동치는 민심이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데도 키를 잡아야 할 사람은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구사람들은 키잡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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