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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2.03.20(수) 제4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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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유있는 고집, 이유없는 수난 원칙을 존중한 노무현 후보의 인생역정… 공사판 막노동자에서 대통령을 꿈꾸기까지
노무현 후보의 오늘은 81년 ‘부림사건’ 변론에서 비롯됐다. 당시 그는 상고 출신 늦깎이 변호사였다. 자신의 인생을 말할 때면 항상 이 대목을 떠올린다. “멀쩡한 학생들을 고문해 공포에 질린 눈빛, 섬뜩하게 느껴져 마주 쳐다보기가 싫은 눈빛을 만들었다. 그들을 보면서 잘 나가던 내 변호사 시절은 끝났다.” 이후 시국·노동 사건 무료변론을 도맡으며 인권변호사로 변신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상임집행위원장으로 거리를 누볐고, 그해 9월 대우조선 시위로 구속됐고 변호사 업무도 정지당했다. 구속은 정치입문 계기가 됐다. 88년 13대 총선을 앞둔 통일민주당 총재 YS는 5공실세인 허삼수 의원의 저격수를 찾았다. YS는 노 후보를 발탁했고, 판단은 적중했다. 국회의원 노무현은 5공 청문회를 통해 스타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정치인과 연예인의 인기는 한때다. 먼 앞날을 보장받기 쉽지 않다. 그는 고지식한 원칙주의와 무모해보이는 도전으로 인기를 확대했다. 90년 1월 3당합당은 정치적 대세였다. YS도 그에게 동참을 요구했다. 그러나 “역사적 반역”이라며 의원직을 사퇴,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DJ가 이끌던 신민당과 야권통합을 추진, 92년 14대 총선 때 부산에서 DJ깃발을 들어올렸다. 결과는 낙선.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는 돈많은 귀족 변호사로 몰아 상처를 입혔다. 그는 <조선일보>와 소송을 벌여 승소했다. 이 정면승부는 그에게 더 큰 명성을 안겼다. 도전적인 정치행보는 계속된다. 95년 지역감정을 깨겠다며 부산시장에 출마, 낙선. 96년 총선 때 다시 부산, 또 낙선. 98년 정치 1번지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잠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2000년 총선 때 종로를 버리고 고집스레 부산을 향했다. 이번에 밀어주면 “대선에 출마하겠다”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또 꺾였다. 잇따른 도전과 패배는 역설적으로 그를 대권주자 반열에 올렸다. 패배를 안타까워한 네트즌들은 팬클럽 노사모를 결성, 이들을 중심으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가 시작됐다. 청·장년 시절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46년 경남 진영 봉화산 자락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거쳐 66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전액장학 제도가 있고 은행에 취직할 계획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가방끈이 짧은 그에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삼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 취직해 받은 첫 월급 2700원은 한달 숙박비도 안 됐다. 그는 울산 등에서 공사판 막노동자로 일하며 책값을 벌어 사법고시에 도전했다. 지난 3월10일 울산경선 후보연설에서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병원신세를 졌는데, 산재인지도 모르고 병원비만 걱정했다”라고 당시 경험을 떠올렸다. 결국 군에 입대해 34개월 18일을 근무했지만, 병장이 아닌 상병 제대다. “월남전에 간 사람들이 모두 병장을 달고 와 부대 안에 병장 티오가 없다”는 이유였다. 사법고시 합격까지는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비타협적 성격에 대해 “지주와 소작인의 토지분쟁에서 지주 아들한테 몰매맞아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소작인 편을 들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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