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3월27일 제402호 

이인제의 '초강수' 나올 것인가

강원경선 승리로 노무현 입지 강화…돌풍이 경남 찍고 전북 돌면 이인제는?


사진/ 강원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후보. 돌풍은 경남과 전북으로 이어질 것인가. (이용호 기자)


광주에서 기세를 올린 ‘노무현 돌풍’이 태백산맥을 훌쩍 뛰어넘어 강원도에까지 불어닥쳤다. 대전과 충남에서 잠시 주춤하던 돌풍은 강원도를 지나면서 힘을 충전했다. 돌풍의 실체를 입증하며 거품논란도 불식시켰다. 이인제 고문은 음모론과 색깔론으로 마파람을 일으키며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노무현 돌풍은 경남(30일)과 전북(31일)을 지나면서 과연 태풍으로 변할 것인가?

노 고문의 여건은 더욱 좋아졌다. 김중권 후보가 사퇴(25일)함에 따라 영남지역 득표율을 높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간 김중권 후보와 공유해온 ‘영남후보론’은 이제 노 고문의 독차지가 됐다. 이에 비례해 이인제 고문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김중권 후보의 선전을 통한 영남표의 분산을 기대했으나 이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김 후보의 사퇴직후 이 고문 진영에서 ‘경선포기설’이 나돌았다. 이 고문은 예정된 경남방문 일정을 취소한 채 숙고에 들어갔다. 참모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이미 승패가 가름났으니 포기하는 게 낫다는 강경파와 아직은 모르니 끝까지 가자는 온건론이 맞섰다. 경선판을 깨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해온 이 고문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의미심장한 강원도 1위

강원경선을 마친 초반(누계 12.4% 진행) 성적은 이인제 고문이 1위다. 득표율도 과반이다. 그런데도 심리적으론 마치 2위인 노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고, 그 뒤를 1위인 이 고문이 추격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래서인지 1위가 2위를 향해 음모론을 제기하는 기이한 양상도 벌어졌다. 성적표의 내용을 뜯어보면 이유가 드러난다. 경선을 치른 6곳 가운데 이 고문은 지역연고가 강한 대전과 충남에서만 1위를 했다. 종합성적 1위도 두 지역의 몰표에 힘입은 결과다. 반면 노 고문은 울산과 광주, 강원 등 세 곳에서 1위를 차지했다. 노 고문과 연고가 있는 울산은 그렇다치고, 광주도 재집권을 바라는 광주시민들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접어둘 수 있다. 하지만 노 고문이 강원도에서 1위를 한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강원도는 지역색이 엷다. 또 돌풍이 일기 전까지는 이 고문 지지세가 압도적이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이 후보는 강원에서 35%의 높은 지지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이런 강원도에서 노 고문이 1위를 차지한 것은 돌풍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다른 지역표심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고문 쪽 해석은 다르다. 이 고문의 대변인 전용학 의원은 “강원도는 무승부”라고 강조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표차가 적은 점에 의미를 두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노무현 돌풍이 뚜렷한 추세임을 확인해준다. 지난 13일 SBS-TN소프레스 여론조사 이후 실시된 5개 언론사(한국방송, 문화방송,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여론조사에서 노 고문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연속적으로 제쳤다. 이 고문은 이회창 총재와의 격차를 좁히기는 했지만 모두 지는 것으로 나왔다.

돌풍의 위력에 다급해진 것일까. 이인제 고문은 충남경선에서 섬뜩한 어휘를 동원해 색깔론 공세를 폈다. 측근들은 여차하면 판을 깰 수도 있다는 식의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극단적인 운동권이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경선판을 휘젓고 있다’ ‘분노에 불을 지르는 광기에 올라타면 안 된다’ ‘광기로 지도자를 뽑은 히틀러의 나치정권과 아르헨티나의 페론정권이 어떻게 됐느냐’. 지난 3월23일 이 고문이 충남지역 경선장(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노 고문을 지목해 쏟아낸 말들이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민심의 흐름을 광기로 폄하한 것이다. 그는 운동권을 비판하면서도 “나는 유신시절 반독재민주화 학생운동에 몰두했다”고 말하는 자기 모순을 드러냈다. 이 고문은 또 춘천 한국방송 토론회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언론을 주적으로 규정한 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무엇이 다르냐”고 노 고문의 언론관을 겨냥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 때 그가 후보로 나선 국민신당의 일부 당원들은 보도가 편파적임을 항의하며 조선일보사에 몰려가 신문을 불태운 바 있다.

이 고문은 음모론 공격도 퍼부었다. ‘대통령을 빙자한 어떤 사람이 경선에 관여한다면 진상을 조사해서 축출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경선을 컨트롤한다면 중대한 문제다’ 한국방송 토론회에선 박지원 정책특보의 실명을 거론했다. 이 고문은 “국민감정을 격발시켜 그 분노의 불꽃 위에 어느 후보를 태우고 있다”며 언론기관까지 싸잡아 음모론의 공범으로 몰았다. “끊임없이 같은 보도가 나온다. 돌풍이 꺼지지 않도록 여러 매체들이 기름을 붓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 텔레비전 토론에서 김중권 후보가 “여론조사는 믿을 수 없다. 대세론은 허구다”라고 주장하자 “왜 못 믿느냐. 여론조사는 과학이다”라고 반박한 바 있다.

충남경선 직후 열린 이 고문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이 후보가 현재 2위 후보를 두배 차로 따돌리며 1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도 대통령 측근들이 컨트롤한 것인가?”라는 기자의 이 질문이 곤혹스러웠던지 이 고문은 5초 이상을 침묵했다. 이어진 대답은 간단했다. “일련의 상황이 유종근 지사의 얘기처럼 진행되고 있다.” 다른 기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당시 유 지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이 후보를 밀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나? 언론에선 그렇게 보도했다.” 한참을 뜸들인 이 고문은 이번에도 짧게 대꾸했다. “그런 보도를 본 적이 없다.” 중앙일간지의 한 기자는 “당시 대부분의 신문이 그런 식으로 보도했는데 도무지 무슨 억지인지 모르겠다”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또 이어진 기자의 질문. “한화갑 고문의 사퇴도 대통령 측근의 압력 때문이라고 보나?” 이 고문의 답변. “유종근 지사의 말대로 됐다.”

음모론의 칼은 일단 접었지만…


사진/ 충남지역은 이인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강원도에선 음모론을 꺼내지 않았지만 상황에 따라 경선 포기 등 초강수를 둘 가능성도 있다. (이용호 기자)


이 고문은 음모론과 색깔론으로 강원도에선 일정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1위를 내줬지만 불과 7표차여서 무승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잃은 것도 많았다. 당장 캠프 내부에서 균열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 후보의 조직을 책임진 동교동계의 조재환 의원은 “청와대 개입 가능성은 없다”며 음모론에 고개를 저었다. 권노갑 전 고문의 측근인 이훈평 의원과 이 고문 진영의 기획을 책임진 장성원 의원도 음모론에 곤혹스러움을 나타냈다. 비서실장을 맡았던 김명섭 의원은 사퇴의사를 밝혔다. 민주당의 실무 당직자는 “당료들은 이 고문이 사실상 협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반격도 만만치 않다. 노 고문은 강원유세에서 “무슨 딴 생각이 있느냐. 왜 자살골을 넣으려 하느냐. 국민은 한번은 용서해도 두번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맞받아쳤다. 이 때문인지 이 고문은 강원도에선 색깔론이나 음모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 고문은 “내가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주도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일단 집어넣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다시 꺼낼 수 있음을 예고한 것으로도 읽힌다.

다음 경선지인 경남과 전북의 선택은 여러 모로 주목된다. 광주의 선택에 경남이 화답하고 전북에서 이를 뒷받침한다면 전남과 부산, 수도권 경선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 경우 돌풍은 더욱 드세진다. 경남은 노 고문의 연고지이고, 전북은 광주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지역이어서 일단 노 고문의 강세가 예상된다. 이 때문에 이 고문 쪽은 ‘중대결심설’을 흘리며 압박하거나 아예 경선을 포기하는 초강수를 둘 가능성도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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