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3월20일 제401호 

대의를 선택한 ‘클린 김근태’

정치권에 ‘옐로카드’ 던지고 후보 사퇴… 아름다웠던 꼴찌로 ‘희망의 근거’ 남겨


사진/ 김근태 의우너의 경선 후보 사퇴는 노무현 돌풍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지난 3월 12일 후보를 사퇴한 김 의원이 공항으로 가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저는 노무현을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상처받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마음 아프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당신이라도 저였다면 저와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는 것을. 당신은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김근태, 당신은 십자가입니다(88학번 어느 회사원, 아이디 ㅣyujh97).”

민주당 김근태 의원의 홈페이지(www.gtcamp.or.kr)에 오른 이 글에는 ‘노무현과 김근태’ 사이에서 선택을 주저하던 많은 이들의 번민이 절절이 묻어난다. 그가 대선후보를 사퇴한 지난 12일 이후 홈페이지에는 이런 종류의 글이 끝없이 올라오고 있다. 사흘 새에 2천건을 넘었다. 네티즌들이 그에게 보내는 격려와 안타까움의 글이다.

원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주자만이 받을 권리가 있다. 그는 경선 도중에, 그것도 16곳 가운데 불과 2곳만을 마치고 중도하차했다. 마라톤으로 따지자면 5㎞쯤 달리다 포기한 꼴이다. 박수가 나올 리 없다. 그런데도 그에겐 애정어린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언론에선 그의 사퇴를 ‘용기 있는 결단’으로 높이 평가했다.

민주당 경선 판도 변화의 촉매제 노릇

그의 사퇴 이후 노무현 후보는 광주에서 압도적인 1위를 했다. 정확히 계량화되진 않았지만 그의 사퇴가 경선판도에 끼친 심리적인 영향은 상당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노무현 돌풍’이 부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얘기다. 후보사퇴 기자회견 직후 광주로 내려간 그는 “쓸쓸하고 외로웠다. 다시 일어나서 광주시민과 더불어, 또 노무현 고문 등과 함께 미래의 희망을 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명시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노 고문 지지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가 사퇴하자 일부 지지자들도 노 고문 지지를 선언했고, 그와의 관계 때문에 주저하던 현역 의원들도 노 고문 진영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노무현 대안론’은 급속히 확산됐다. 노 고문은 광주경선 직후 “김근태 고문이 참모 등을 통해 지지를 표시해줬다. 김 고문 사퇴가 여러 의미가 있지만 나에겐 큰 도움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노 고문 진영의 이충렬(45) 한국정책포럼 소장은 “김 고문의 사퇴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당내 지지기반 확산에 엄청난 도움이 됐다.경선판도가 의미있게 짜여졌고,개혁지향 표들이 노 고문에게 쏠리면서 대세론을 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2월 국회 대표연설 이후 김 의원에 대한 지지율은 미세하나마 오르는 추세였다.그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을 가차없이 비판하자 ‘역시 김근태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이후 1∼2%대의 바닥을 기던 지지율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6∼7%로 상승했다.

그러나 지난 3일의 ‘정치자금 고해성사’는 그에게 엄청난 시련으로 돌아왔다. 거센 역풍이 휘몰아쳤다. 당내에서 그는 집단적인 따돌림 대상이 됐다. 참모들은 아직도 그때를 악몽으로 떠올린다.

경선이 시작되자 그는 “부패와 싸우다가 부상당한 김근태를 일으켜 세워달라”며 ‘정치자금 고해성사’의 진의를 설명하려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정치현실은 냉엄했다. 제주와 울산을 합쳐 26표(1.5%)의 초라한 성적이었다. 결국 그는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퇴했다.

이즈음에서 한번 냉정하게 따져보자. 그는 왜 ‘민주화운동의 적자’라는 좋은 상표를 달고도 현실정치의 벽 앞에서 좌절해야 했을까? 학생운동을 경험한 30대와 개혁세력 등 그의 지지층 상당부분이 노무현 지지층과 겹쳤다.이들 대부분은 노 고문 지지로 기울었다. 사실상 지지층에선 노 고문 쪽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 때문에 경선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그는 ‘개혁후보 단일화’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천정배·신기남·임종석 의원 등의 단일화 움직임도 사실상 그에 대한 사퇴압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야시절부터 가까운 이들의 은근한 압력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국민 지지율은 오르지 않았고 결국 그는 대안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대중정치인의 한계 노출… 재기는 시작됐다


사진/ 대선 경선에 도전했으나 현실정치의 벽 앞에서 좌절한 김근태 의원. 김 의원이 경선을 앞두고 선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용호 기자)


그의 지지율은 왜 오르지 않은 것일까? 첫째로 대중정치인으로서 한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미디어정치, 이미지정치 시대에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개발하는 데 실패했다. 대중들의 눈길을 붙들지 못한 것이다. 그의 결단은 언제나 대중들의 요구보다 한 박자씩 늦었고, 결국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예컨대 권노갑 전 고문에 대한 공격은 정동영 고문에게 선수를 빼앗겼고, ‘동교동계 해체’ 주장도 한 박자가 늦어 쇄신파 의원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둘째로 정책노선에서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신민주연대론’의 기치 아래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과 회동했지만 이는 개혁세력의 대표주자라는 자신의 이미지만 훼손했을 뿐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 무렵 ‘산토끼를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놓친다’는 비판이 나왔다. 국회 내 각종 개혁입법 추진과정에서도 그는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자신만의 분명한 정책적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한 셈이다. 이해찬 의원은 “개혁적 노선에서는 노무현에 미치지 못했고, 새 정치에 대한 기대충족에서는 정동영에게 밀렸으며, 조직에서는 이인제나 한화갑을 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지역적 기반이 없는 점도 그의 정치적 비상을 가로막은 중요한 요인이다. 김중권·노무현·이인제·한화갑 고문이 모두 각별한 지역연고가 있지만 경기도 부천 출신인 그에겐 이것이 없었다. 아직도 지역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현실정치판에서 이는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현실 정치인으로서 큰 상처를 입은 그는 재기할 수 있을까? 그는 후보사퇴와 함께 상임고문직도 내놨다. 한 명의 평의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 참모는 “디제이가 92년 대선에서 지고 쓸쓸히 정계를 은퇴하던 때가 떠오른다”며 “김 의원은 기필코 현실정치에서 다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선사퇴로 대의에 복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일정한 명분을 획득했다. 노무현을 지지한 이들은 그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됐다. “87년 ‘양김분열’ 상황을 염려하는 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근태는 한알의 밀알이 됨으로써 자신의 책 제목처럼 ‘희망의 근거’를 남겼다.” 그를 열렬히 지지하던 민주당 실무 당직자의 말이다.

노무현 고문과 명시적 결합 가능성

정치권 일부에선 이미 ‘김근태 부활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개혁파 모임인 ‘바른정치모임’은 지난 13일 “김근태 전 고문의 정치개혁과 정권 재창출을 위한 충정과 헌신의 길에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 의원은 당분간은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수도권 경선 등 막바지에는 명시적으로 노 고문과 결합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고문이 부산에서 낙선한 이후 그를 사랑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노사모’를 만들었듯이, 이제 네티즌들 사이에서 ‘태사랑(김근태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결성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어느 고교의 교사라고 밝힌 이는 김 의원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노무현이 부산에서 낙선했을 때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을 보고 목이 메었고, 다시 이곳에서 목이 멘다”며 “이제 ‘태사랑’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24일 국회 의원동산에서는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모인다. 그들은 모두 노란 리본과, 노란 풍선, 노란 손수건, 노란 모자 따위를 들고 오기로 했다. 노란 리본달기는 제주와 울산 경선을 지켜본 팬클럽 ‘GT클럽 희망’의 한 회원이 제안한 것이다. 변함 없는 사랑을 뜻하는 노란색을 통해 그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옐로 카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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