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2월20일 제397호 

일상의 게임, 게임의 일상

미리 보는 2010년의 게임과 게이머, 유아용 머신에서 연애 시뮬레이션까지

“당신은 사랑을 믿나요?”

물론 믿지 않는다.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어내지만 이미 입이 짜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고글을 벗을 수가 없다. 게임이 끝났는데도 비키지 않자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작게 기침을 한다. 휴일이라 사람이 많다. 새로 나온 머신은 물론이고 나온 지 벌써 두달이나 지나서 다른 것으로 교체될 날이 멀지 않은 머신 앞도 줄이 길다. 어설프게 얼굴을 가리고 화장실로 뛰어들었지만 차가운 물로 씻어도 부은 눈두덩과 붉어진 눈시울은 가라앉지 않는다.

고글을 끼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하나의 사랑을 잊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또다른 사랑이다. 사려깊게 챙겨온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다시 줄 꽁무니에 선다. 이 머신이 처음 나왔을 때 누군가 ‘버림받은 과거의 무덤’이란 애칭을 붙였다. 꼭 실연당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진 않지만 절대다수가 혼자 온 사람들이다. 다른 머신 앞에서는 둘이나, 다섯, 아니면 일곱명이 몰려서 왁자지껄하지만 여기는 조용하다. 딸기무늬 손수건을 꼭 쥔 어린 소녀의 뽀로통한 입술은 슬슬 기다리는 데 진력난 기색이 역력하다. 골프셔츠에 양복바지를 입고 신사화를 꺾어 신은 50대 아저씨는 누굴 찾는지 아니면 숨는 건지 쉴새없이 주위를 살피고 있다. 단정한 금테 안경을 쓰고 배낭을 멘 스무살을 간신히 넘어보이는 청년은 주위의 소음에 신경쓰지 않고 만화책을 보고 있다. 마스카라 한 가닥도 뭉치지 않은 완벽한 화장의 아가씨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여유있게 기다리고 있다. 신기하게도 립스틱 칠한 게 전혀 망가지지 않는다.

왼쪽에서 떠나갈 듯 환성이 인다. 가장 소란스러운 것은 역시 다섯살에서 열살까지의 아이들이 몰려 있는 머신이다. 천장까지 쌓여 있는 멀티비전 앞에서 야구 모자를 거꾸로 눌러쓴 아이가 어설프게 발을 차올린다. 화면 속 근육질 남자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상대의 턱에 발차기를 날린다. 상대도 지지 않고 엉거주춤 자세를 낮춘다. 닌자 의상을 입은 깜찍한 소녀가 화면 속에서 날렵하게 몸을 숙여 한손으로 땅을 짚고 탄력을 이용해 역시 발차기로 반격을 한다. 아이들의 환호가 다시 한번 터진다.

바로 앞에 선 아주머니가 줄이 앞으로 갔는데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선을 따라가보니 유아 전용 머신에 도착한다. 요람 속에 누운 아이가 주먹을 쥐자 거기서 무지개가 생긴다. 키득거리며 즐거워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닿는 곳에 폭죽이 터지고 꽃잎이 날린다. 아이는 신이 나 다리를 흔들고 그때마다 날아오르는 나비를 잡아보려고 애쓴다.

세일하는 두루마리 화장지 팩을 세통이나 사들고 서 있는 그녀의 외투 소맷부리는 닳아서 반들거리고 있다. 그녀는 무엇을 꿈꾸며 여기 서 있을까? 왜 완벽한 안전조치 속에 있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까? 하지만 자기 차례가 되자 망설임 없이 곧장 고글을 쓴다. 그녀가 엄마로서의 기쁨과 어려움, 자부심과 우울증을 완벽하게 벗어버릴 수 있는 건 여기뿐일지도 모른다.

현실세계의 유일한 탈출구로 정착

서둘러 아이에게 뛰어가는 그녀에게 한번 시선을 던지고 다시 고글을 쓴다. 사이버 세계에서 나는 허리둘레가 10cm 줄었고, 키는 역시 10cm 늘었다. 연애 시뮬레이션-20대-중세 프랑스-유니콘-마상시합-성역할 역전-해피엔딩. 가상세계의 점원은 진짜보다 훨씬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내 요구조건에 꼭 맞는 소프트웨어를 건넨다. 어느새 옷이 달라졌다. 반짝거리는 갑옷에는 긁힌 자국 하나 없고, 칼 손잡이에는 드래곤이 새겨져 있다.

“당신은 사랑을 믿나요?”

물론 믿는다.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어내지만 이미 입이 달다. 고글을 벗으니 다음 사람이 서둘러 들어온다. 거울을 보자 눈물 때문에 흰자위는 맑게 빛나고 뺨은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행복하다. 내 인생에는 맑은 날만 있을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