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의 재정자립도는 17.2%, 김천시는 26.8%이다. 재정자립도는 시의 전체 예산 가운데 자체 조달할 수 있는 세수의 비율이다. 전국 248개 시·군·구의 평균(57.6%)에 비하면 꽤 낮은 수준이다. 두곳만 그런 건 아니다. 수도권을 제외한 대다수(195개 시·군·구) 중소도시의 재정자립도는 50% 미만이다. “지금은 지방화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지표만 보더라도 지방 중소도시는 지속적인 정체 속에 인구마저 대도시로 자꾸 빠져나가는 악순환 고리에 빠져 있다.

장소마케팅, 과연 성공전략인가

사진/ 현재 지방 중소도시들이 지향하는 전략은 도시를 팔아먹는 '장소마케팅'이다. 고속전철이 관통하는 김천시내 풍경.

전문가들은 인구가 30만명은 돼야 도시가 자족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인구 10만∼20만명의 지방 중소도시는 가능성과 도전에 함께 직면하는 ‘위험한 규모’다. 대도시 인근에 위치한 중소도시는 대도시 노령인구가 은퇴 뒤에 사는 리조트 지역으로 성장할 수 있지만 웬만한 중소도시는 농업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정체와 쇠락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농촌을 끼고 있어 전통과 근대가 혼재된 도·농통합 중소도시는 더욱 그렇다. 농촌 쇠퇴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어 있는 어정쩡한 중간지대에서 ‘문제상황’에 처해 있는 셈이다.

이는 중소도시가 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일까? 우리나라에서 농촌을 끼고 있는 중소도시를 육성하려는 정책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영·호남 같은 광역단위의 경제력 격차는 지역불균형의 이슈로 여러 차례 다뤄졌지만 광역 시·도 안의 중소도시는 푸대접도 아닌 무대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90년대 들어 대도시 중심의 ‘광역성장거점전략’이라는 8대 광역권 개발이 추진되면서 지방 중소도시에 대한 투자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권오혁 연구원은 “중앙정부가 지방 대도시를 중심으로 큰돈을 쏟아부어 지하철을 뚫거나 수출을 이유로 공업도시들을 지원했지만 중소도시들은 외면해왔다”며 “사각지대에 소외된 곳이 중소도시”라고 말했다.

수도권과 광역도시 중심의 수직 피라미드형 구조는 이른바 ‘구심적 일극집중’을 낳았다. 기업으로 치면 서울에 본사가 있고 대구, 전주 등 대도시는 지점경제, 그리고 김천, 정읍 등 중소도시는 대리점 경제가 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지방 중소도시는 당연히 자족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목원대 박경 교수(경제학)는 “정부가 수도권 집중을 억제한다고 했지만 기껏해야 지방에 농공단지 수준의 하부기반시설을 갖추는 데 머물렀을 뿐 적극적으로 지역산업을 육성하지 못했다”며 “그래서 중소도시마다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형편에서 지방 중소도시들이 지향하는 전략은 이른바 ‘장소마케팅’이다. 중소도시가 자기 도시를 적극적으로 외부에 알려 기업과 관광객을 유치하는 방식(마케팅)으로 도시 전체를 팔아먹는 것이다. 장소마케팅은 80년대 영국의 지역정책이 대표적인데, 지방 분권화를 내걸면서 중앙정부의 지원을 끊는 등 중소도시의 미래를 시장원리에 맡긴 신자유주의적 지역정책이다. 재정도 턱없이 부족한데다 무관심 속에 방치돼온 우리나라 중소도시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는 기업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과열경쟁을 빚었고 이에 따라 무리한 혜택과 지원이 남발되기 일쑤였다. 전문가들은 “영국의 경우 장소마케팅으로 몇몇 중소도시는 성공했지만 중소도시간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 일회성 이벤트 위주의 사업에서 탈피해야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할 수 있다. 정읍시내의 고용안정센터.

장소마케팅이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면 결국 길은 두 가지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대폭 늘어나거나 중소도시가 스스로 독자적인 성장엔진을 찾는 길이 그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됐고 단체장의 임기가 보장됐지만 지역경제를 일으키고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쓸 돈이 없다. 중앙에서 지원하는 지방교부세는 대부분 인건비로 충당되고 만다. 중소도시마다 사업을 벌일 여력이 없는 셈이다. 이런 처지에서, 중앙에서 특정 사업별로 대주는 돈을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따오다보니 사업이 중소도시의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권오혁 연구원은 “중소도시마다 산업단지니 무슨 센터니 하며 지역에 잘 맞지도 않는 사업까지 따오고 있다”며 “단체장이 올린 실적 한두건이 정말로 지역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부의 ‘개입’이 중소도시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돈에 목타는 중소도시에 중앙이 개입해 지원해주는 게 잘못된 것이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까지’ 개입하느냐다. 돈을 중소도시에 단순히 빌려주는 게 아니라 특정한 사업을 골라 지원하기 때문에 중소도시가 자체 발전기획안을 짜서 주도적으로 지역개발에 나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방행정연구원 권오혁 연구원은 “돈을 쥐고 중소도시의 산업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정부가 직접 사업을 만드는 데서 탈피해 중소도시 스스로 이끌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중앙의 보조금에 의탁하더라도 ‘절름발이 지방화’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전략에 따라 보조금을 활용하면 내생적인 지역개발을 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제3이탈리아 지역의 교훈

중소도시의 활로를 찾기 위한 자체 노력도 물론 뒤따라야 한다. 일회적이고 정치성을 띤 이벤트 위주의 사업에서 탈피해 다른 지역과의 차별화를 꾀하면서 자생적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역단위 기업이나 지역 시민기업을 통해 성장 메커니즘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단국대 조명래 교수는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옛 도시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중소도시는 그 원형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며 “국민소득 1만달러에 이르면 대도시 사람들이 향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중소도시가 각광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치단체, 지역상공인, 주민들이 연합해서 지역에 걸맞은 테마를 선정한 뒤 거기에 맞게 중소도시를 발전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웃 중소도시들이 함께 발전하는 ‘수평적 연대’도 중소도시 발전전략으로 꼽힌다. 대표적인 모델이 제3이탈리아(신산업지구로 불리는 이탈리아 동부지역의 볼로냐)다. 이탈리아의 중소도시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기보다 지역주민과 중소기업이 협력하는 모델인데 제3이탈리아 지역은 가구산업의 경우 어떤 지역은 나무를, 다른 지역은 목공기계를, 또다른 인근 지역은 가죽제품을 생산하는 데 주력한다. 이렇게 해서 볼로냐 지역은 섬유·가구·피혁산업을 발전시켜 틈새시장을 뚫는 데 성공했다. 지역간 협력 시스템으로 여러 중소도시가 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원주학, 제천학, 호남학… ‘차별화된 발전전략’을 내오기 위한 각 지역 대학교수들의 지역학 연구 지방 중소도시의 발전을 꾀하려면 지역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지역에 대한 각종 연구자료를 기초로 바람직한 발전모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학, 충북학, 강원학 등 광역단체가 주도하는 지역학 연구가 한편에 있지만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학은 각 지역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여기에는 중소도시마다 차별화된 전략을 세워야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연세대 원주캠퍼스 오영교 교수(사학과)는 지난 99년부터 대학 내 매지학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원주학 연구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벌써 <원주학연구 3집>까지 펴냈다. 그는 “이번호에는 지역의 이슈로서 옻나무를 원주의 특화된 공예상품으로 키우는 방안, 군사도시라는 특성 때문에 A도로, B도로 하는 식으로 멋대로 이름 붙여진 원주의 도로를 복원하는 작업 등이 실렸다”며 “인문과학에서 사회과학, 도시공학쪽으로 연구분야를 넓혀가고 있다”고 말했다. 충북 제천에서도 지역학 연구가 최근 본격 시작됐다. 세명대 이창식 교수(국문과) 등 10여명이 참여하는 지역문화연구소가 발족한 것이다. 이 교수는 “지역문화도 경제, 관광 등 산업과 연계해야 한다”며 “역사, 경제, 관광학 연구자들을 아우르며 지역연구 작업을 확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소는 우선, 제천에 질 높은 약초가 많은 만큼 한방을 이용한 실버타운 건설 방안을 연구하기로 했다. 단순히 지역의 문헌을 찾아내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향토산업’과 연계시키겠다는 것이다. 전남 목포에서는 지난해 10월 호남학연구소가 출범했다. 호남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목포대 김승현 교수(윤리교육과)는 “대도시에 대한 연구는 중앙의 논리가 중심에 자리잡고 대신 중소도시의 삶은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며 “지역의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학자로서 지역발전에 힘을 보태야할 책임을 느껴서”라고 말했다. 호남학연구소는 영암과 장성 등 중소도시의 사회·경제적 삶을 연구하고 있는데 건축분야 연구자를 포함시켜 도시계획까지 다룰 예정이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s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