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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고 심심하다, 그러나… 출향을 꿈꾸다 낙향을 반복하는 지방 중소도시 20∼30대 젊은이들의 초상
밤 10시, 버스는 끊기고…
실제로 정읍에서 만난 청년들은 대다수가 “먹고살 게 없는 도시”라고 말한다. 이는 여느 지방 중소도시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래서인지 청년들이 떠난 지방 중소도시는 ‘젊음’을 찾아보기 힘들다. 시내에서 식당 일을 하는 50대 아주머니는 “젊은 애들이야 해먹을 것도 없고 취업할 데도 없지. 그러니까 부모가 남긴 돈을 물려받아 그걸로 또 식당내고 그래서 만날 느는 게 식당뿐”이라고 한숨지었다. 정읍에서 그나마 젊음이 느껴지는 건 밤이다. 시내 중앙로와 바로 옆 골목인 본정통(본래의 정읍거리라는 뜻)에 즐비한 술집, 옷가게, 화장품가게의 입간판에 불이 켜지면 거리는 한순간 활기를 띤다. 한 시민은 중앙로를 “서울의 명동 같은 데”라고 했지만 거리에 넘쳐날 정도로 청년들이 쏟아져나오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밤도 잠깐이다. 밤 9시 반이 넘으면 시내버스가 끊기고 얼마 안 되는 거리의 청년들도 하나둘씩 귀가하기 시작한다. 1월25일 밤 11시께 정읍시내 로마나이트클럽. 휘황한 사이키 불빛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가운데 20여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중년 남녀다. “여기요? 젊은 애들은 거의 없어요. 시내에 애들도 별로 없잖아요.” 20대 초반의 클럽 직원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밤거리에는 ‘빈차’를 단 택시들만 느릿느릿 다니고 있었다. 다음날 시내 거리에서 만난 10대와 20대들은 “여기는 너무 좁고 심심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풀이했다.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민경(20·고교 졸업반)양은 “즐길 만한 문화시설 같은 게 없고, 극장에 걸리는 영화도 서울에서 상영한 지 한달이 다 지나 내려온다”고 푸념처럼 말했다. 정읍은 걸어서 30분이면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다. “여기서 저기까지만 가면 시내가 끝”이라거나 “명색이 시이지만 서울의 웬만한 동보다 작은 곳”이라고 할 정도다.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꿈은 있다. 게임프로그래머가 꿈이라는 고교 졸업반 김만석(19)군은 “여기서 창업을 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겠느냐”며 “대학에 진학하든 않든 이곳을 떠날 것”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여기는 일자리도 없고 만날 먹고 마시는 가게뿐”이라는 장우석(27)씨도 희망을 찾아 대도시 탈출을 꿈꾸고 있다. 고향이라서 푸근한 곳이긴 하지만 당장 먹고살려면 떠날 수밖에 없다는 이도 있었다. 오원동(24)씨는 “여기는 마땅히 일할 데도 없기 때문에 일단 더 큰 도시로 나가 돈을 번 뒤에 돌아와 벤처를 창업할 생각”이라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김천 젊은이들의 타협, 구미행
지방 중소도시의 젊은이들이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는 한마디로 “먹고살 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인구 15만명인 정읍의 일자리는 얼마나 될까? 정읍에 있는 기업체는 292개로 여기에 고용된 노동자는 5158명이다. 음식점이나 구멍가게 등까지 합치면 8600여개 사업체에 3만여명이 종사하고 있다. 관공서 등을 뺀 일반 기업체 중 고용이 가장 많은 곳은 정읍산업단지지만 여기에 고용된 인원은 파츠닉(옛 대우전자부품)을 포함해 1750명에 불과하다. 관공서나 산업단지에서 일하지 않는 대다수 취업자는 식당이나 옷가게, 농협 하나로마트 등에서 일한다고 보면 된다. 일자리 부족뿐만 아니다. 취업이 된다 해도 대도시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 때문에 정읍에서 살기는 어렵다. 정읍시내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김아무개(23)씨는 “놀 만한 데는 여기도 있지만, 용접이나 자동차수리 일을 하는 친구를 보면 월급 50만∼60만원을 받고 있다”며 “그래가지고 어떻게 먹고살겠냐”고 고개를 내저었다. 20대 여성들은 어떨까? 1월26일 밤, 정읍시내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김미라(24)씨는 “결혼을 하더라도 여기서는 살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변변한 기업이 없다보니 젊은 여자가 일할 곳이 없다. 주부는 더 심하다. 기껏해야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등이 고작이다. “좁아터져가꼬. 졸업만 하면 뜬다칸께요.” 1월31일 새벽 1시. 경북 김천역 앞 당구장에서 만난 임정훈(17·고2)군과 조민철(18·고3)군은 “답답하고 심심하다”고 되뇌었다. 경북 김천 역시 10대, 20대가 지역을 탈출하고 싶어하는 건 정읍과 마찬가지였다. 물려받을 든든한 가업도, 대도시의 일류 대학에 진학할 희망도 없는 이들에게 소도시는 그저 뜨고 싶은 곳일 뿐이다. 이들은 “김천은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도 힘들다”면서 “일자리 많고, 놀 곳 많고, 어른들 간섭 없는 데로 가고 싶다”고 했다. 좀더 멀리, 좀더 큰 도시로 떠나고 싶어하지만, 막상 고향을 떠나기도 쉽지 않다. 졸업을 앞둔 조군은 “마음 같아서는 서울로 가고 싶지만 막상 떠나려니 두려운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뜨고 싶은 욕구와 두려운 현실 사이의 타협점은 보통 구미행이다. 김천시에서 30분 거리에 있고, 공단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대구는 놀러가는 데고, 구미는 취직하러 가는 데”라고 말한다. 임군이 한마디 보탰다. “떠서 얼마나 힘든지 고생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네.” 지방 중소도시를 탈출하려는 20대의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모든 얘기는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지방 중소도시 20대에게 유일한 꿈은 ‘대도시로의 탈출’이다. 실제로 정읍시의 20대 인구는 지난 94년 2만9천명에서 2000년 2만5천명으로 줄었다. 청년들이 떠난 정읍은 대학생들이 돌아오는 방학 때나 잠깐 활기를 띨 뿐이다.
‘반짝장사’에 익숙해진 자영업자들
시내에서 안경점을 운영하는 박아무개(36)씨도 20대에 정읍을 떠났다가 돌아온 귀향자다. 그는 “대도시에서 살다 힘들어지면 서른이 넘어 이곳으로 돌아온 친구가 여럿”이라며 “한 동네로 이러저리 얽힌 주변사람들을 등에 업고 여기서 터를 잡은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30대의 귀향은 뚜렷하게 수치로 확인된다. 정읍의 30대는 20대와 대조적으로 상승곡선을 긋고 있는데 94년 1만9천명에서 2000년 2만1천명으로 늘었다. “아고… 지겨버라. 여기서 니 또 본다칸께요.” 1월28일 오후 4시, 김천대학교 도서관 앞. 고교 동창인 김아무개(30)씨와 정아무개씨가 서로를 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대도시 중소기업에 취직했던 사람들이다. 김씨는 “하루 12시간씩 부려먹으면서 월급은 채 100만원도 안 줬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정씨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2000년 말에, 정씨는 올해 초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김천으로 돌아왔다.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한 3년 있어 보니까 주기가 있다 칸께요. 해마다 겨울이면 악덕기업에 치여서 돌아왔다가, 공무원 시험이 끝나는 4월쯤이면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거라요.” 도시의 쓴맛을 봤지만 정씨는 “허리가 휘게 공부시킨 부모님 보기가 정말 민망하다”면서 “이번 시험 떨어지면 또 떠야지요”라고 쓸쓸하게 말한다. 물론 고향에 돌아왔다고 안착이 쉬운 건 아니다. 정읍의 자영업자 중 벌어서 저축하는 사람은 20%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진다. 절반은 현상유지, 나머지는 망하는 걸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당구장 3년, 노래방 3년, PC방 2년. 김천시의 김영철(42)씨가 거쳐온 장사 이력이다. 소도시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업종을 바꿔가며 ‘반짝장사’를 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김씨는 “바닥이 좁아 소도시는 장사가 유행을 잘 탄다”고 말한다. 한 업종이 잘된다 싶으면 우후죽순처럼 번지기 십상이다. 99년 초 처음 들어선 PC방이 어느새 70개를 훌쩍 넘겼다. 김씨는 “이 장사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면서 “임자 있으만 처분할라고 벌써 내놨다”고 말한다.
40대엔 자녀 교육문제로 떠나고…
물론 욕심부리지 않고 중소도시에서 고만고만하게 살 수 있지만 큰 돈을 만지기는 어렵다. 오히려 정읍산업단지의 (주)서전에서 일하는 김강대(35)씨의 말처럼 “여기 오래 살다보니 임금도 서울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동료보다 적고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기 일쑤다. 이런 현실은 중소도시의 40대를 더욱 아이들 교육에 매달리게 만들고 있다. 손재득(41·시청 공무원)씨는 “큰 돈을 벌어서 타지로 나간 친구는 거의 없고 다들 애들 교육문제로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집값이 대도시에 비해 싸더라도 아이들 교육에 맞닥뜨리면 전주로 보내 하숙시키느니 차라리 전주에 집을 얻어 자신이 정읍으로 출퇴근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시내에 학원이 여러 개 생기면 뭐해, 수준이 너무 낮은데…”라는 불만도 뒤따른다. 정읍에서는 그룹을 지어 전주로 아이들을 데려가 과외지도를 시키거나 대학생이 주말에 정읍에 내려와 과외지도를 하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렇듯 지방도시의 젊은이들은 20대와 30대, 40대를 거치면서 중소도시와 대도시를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돈다.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면서 중소도시와 대도시를 왔다갔다 하다가 젊은 시절을 다 보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도시에 정착해 ‘탈출’에 성공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다.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 지방도시 주민들은 이러한 삶의 행태를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취업과 교육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을 찾지 못하고 중소도시와 대도시를 떠도는 20∼40대의 모습은 지방도시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글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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