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1월30일 제395호 

대통령 연줄에 사슬 채우라!

친인척 내세운 범죄가 속출하는 까닭… 투명하지 않은 사회의 서글픈 현실


사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장면. 김 대통령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이 자리에서 친인척의 엄정한 관리를 다짐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수법만 놓고 보면 잡범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누구나 쉽게 거기에 걸려든다. 그런 사건들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장마 뒤에 잡초 자라듯이.”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 빙자 사기사건들을 수사해온 한 사정당국 관계자는 “어찌보면 참 한심한 노릇이지만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라며 “그게 우리 사회의 정확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것을 어쩌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사정당국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걸리는 대로 계속 수사하는 수밖에.”

얼마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김홍일 의원이 후원을 요청하는 것처럼 괴문서를 만들어 기업체에 보낸 혐의로 이아무개(51)씨를 구속했다. 이씨는 대구지역 중견기업인 ㅎ사 회장 비서실에 김 의원 후원회 명의로 “○○○ 회장님, ○○○ 사장님. 경비 후원 부탁합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은행 계좌번호 2개가 적힌 괴문서를 팩스로 보냈다가 ㅎ사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씨의 정체는 과거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등을 옮겨다니며 정당활동을 해온 ‘선거꾼’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잡범들


사진/ 지난 2000년 10월 해체된 사직동팀의 건물 전경.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는 하부조직이었다.(한겨레 이정우 기자)


경찰청 관계자는 “이 사건이 미수에 그친 건 그나마 우리 사회의 수준이 조금은 나아졌기 때문”이라며 “옛날 같았으면 기업체쪽에서 감히 사실관계를 알아볼 엄두도 못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 친인척 이름을 팔며 과천 경마장의 스낵코너에 입점하도록 해주겠다고 속여 2억5천만원을 받아 가로챈 사람이 붙잡히기도 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문제의 대통령 친인척과 잘 알고 지내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사건은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에 대한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관리대상은 사실상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우리가 첩보 내사단계를 거쳐 수사까지 하는 경우는 시중에 떠도는 전체 풍문의 2∼3%에 불과할 것”이라며 “수사에 들어간 풍문 가운데는 사건이 성립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

수사하지 못한 풍문은 계속 ‘성장’하고, 수사한 사건이라고 해서 바로 죽는 것도 아니다. 풍문이 사라질 수 없는 사정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나 대통령 친인척 빙자 사기를 벌이는 건 아니다. 사기극을 벌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와대와 가깝든 멀든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기 피해자들도 어리숙한 사람들은 아니다. 청와대와 관련성을 입증해줘야만 사기가 가능한 것이다. “피해자들도 나름대로 확인절차를 밟지만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사정당국 관계자의 설명이다.

넓게 보자면 피해자 가운데는 신광옥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롯한 검찰 관계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 최택곤 전 민주당 교육특위 비상임 부위원장(구속)은 이들에게 ‘국회의원 김홍일’이라고 찍힌 돈봉투를 만들어 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람들이 받은 건 뇌물이 아니라 하사금”이라는 볼멘소리가 검찰 안에서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 검찰 관계자는 “봉투를 받을 당시만 해도 안 받는 게 오히려 불경죄가 아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유감스럽지만 대통령 아들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도 봉건사회에 살고 있다는 얘기다.

대통령 친인척 빙자 사기꾼들이 기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책임의 상당부분은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에게 있다. 선거철이면 사람 안 가리고 기념사진을 함께 찍어주고 임명장을 남발하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기꾼들도 줄어들지 않을 거라는 게 사정당국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옛 사직동팀 출신 인사는 “최택곤씨가 대통령 아들 이름을 팔고 다니며 이권에 개입하려고 해 몇 차례 불러다 혼을 내줬지만 끝내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며 “그가 민주당 명함을 갖고 다닐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개탄했다.

봉건사회의 유물… 누구든 걸릴 수도


사진/ '대통령 아들의 이름으로' 진승현 게이트의 브로커 노릇을 한 최택곤 전 민주당 부위원장. 김홍일 의원의 이름을 달고 다녔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일부에서는 사직동팀 해체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사직동팀이 살아 있다고 해서 비슷한 사건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도 희망사항일 뿐이다. 지난 96년 10월 청와대 비서실이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김영삼 정부 출범 뒤 당시까지 대통령 친인척 등을 사칭해 벌인 56건의 사기사건 가운데 도중에 발각돼 미수에 그친 경우는 겨우 5건에 그쳤다. 다른 사정당국 관계자는 “결국 대통령 가족들이 스스로 문제의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엄히 다스렸어야 하는데 계속 어울리기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잡범’들이 일으키는 ‘사칭’ 또는 ‘빙자’범죄는 우리 사회 전체의 투명성과 관련한 문제이기에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만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형택씨 사건에서 보듯,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 자신이 비리 의혹의 주역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사회적 파장에서 볼 때 이들이 직접 관련된 비리는 잡범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런데도 그들은 ‘위험한 환경’에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오랜 세월 야당 총재 친인척으로 생활하다보니 챙겨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정권이 바뀐 뒤에도 시쳇말로 저녁식사값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 주변에 권력을 이용해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이 꼬여서 청탁도 하고 용돈도 주니 말려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대통령 친인척 가운데 뜬금없이 사무실을 여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중에 탈이 날 가능성이 높아 따끔하게 주의도 주고 주변사람들을 차단하곤 했다”며 “많은 친인척들이 ‘왜 뒷조사를 하느냐’며 항의하기 일쑤였다”고 털어놓았다.

대통령 친인척들은 권력을 누리기는커녕 일상생활에서도 제약을 받는다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실제로 김 대통령 차남 홍업씨는 지난 98년 정보기관으로부터 ‘뒷조사’를 받은 뒤 해당 기관에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업씨가 한 유명호텔 스위트룸을 수시로 이용한다는 첩보가 접수되자 정보기관 직원이 이 호텔을 찾아가 “투숙일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제보내용은 허위로 판명됐지만, 이 사실을 안 홍업씨가 “과거 정권에도 사찰대상이던 내가 현 정권에서도 사찰대상이냐”며 섭섭해했다는 후문이다.

권력 앞에 약한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춰보면 친인척 관리에 ‘과유불급’이란 없다는 게 사정기관 관계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그러나 이형택씨 사건에서도 나타났듯이, 친인척 비리를 감시하고 제어해야 할 청와대 비서실이 이를 묵인하거나 오히려 도와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씨 사건이 터지면서 언론에서는 대통령 친인척 관리를 담당하는 청와대 민원비서관실이 인력부족으로 친인척 비리를 사전에 파악하고 차단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국민이 친인척 감시에 나서야 한다

이에 대해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민원비서관실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김대중 정권의 청와대 비서실은 특정한 수석비서관 한두 사람이 실권을 쥐고 나머지 수석들은 약체로 채워져 역대 어느 정권보다 체질이 허약했다”며 “이 때문에 실세 수석들이 청와대를 떠나자 친인척 문제를 대통령에게 직보할 사람도 제대로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전체가 친인척 관리에 구조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는 얘기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친인척부당행위금지법 등 이른바 ‘3금법안’을 제정하겠다는 뜻을 대선공약과 ‘국민과의 대화’ 등에서 밝혔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들 문제로 임기말을 비참하게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친인척 관리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그가 자신의 임기말에 비슷한 상황에 몰리고 있는 사실을 역사의 아이러니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투명해지기 전까지는 대통령 친인척이 ‘국민감시대상 1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중한 현실이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