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2년01월16일 제393호 

새 정치, 그 아슬아슬한 희망

정당민주화 물꼬 튼 국민경선제, 보스정치의 벽을 깨고 우뚝 설 수 있을까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만세.” 1월7일 오전 9시40분께 서울 여의도 민주당 중앙당사 4층 회의실에서는 만세삼창이 터져나왔다. ‘국민경선제 도입’과 ‘4월 통합 전대실시’ 등을 포함한 민주당 쇄신안이 이날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회의에 참석한 60여명이 환호를 터뜨린 것이다. 지난해 12월15일 당발전과쇄신특별대책위원회(특대위·위원장 조세형)가 개혁안을 제출한 이후 당무회의만 12차례. 그동안 치열했던 대선주자들과 당내 각 세력들간의 대립에 비춰보면 이날 타협의 극적 효과는 더욱 컸다.

정권재창출의 승부수 될까

참석자들 서로 악수를 나누며 자축했고, 한광옥 대표와 대선주자들은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했다. “당이 위대한 저력을 발휘했다. 국민여론에 부응해 국민정당이 탄생했다”(이인제 상임고문), “이제 우리당의 후보는 국민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노무현 상임고문), “우리는 제2창당을 해냈다”(한광옥 대표).

이들의 환호가 그동안 당내 세력간의 심각한 대립으로 당이 깨질 듯하던 위기를 넘어서 대타협을 이뤄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주당은 이날 당무회의에서 당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7만여명의 선거인단 가운데 50%인 3만5천여명을 일반국민의 몫으로 돌리는 등 공직후보자에 대한 상향식 공천제도를 합의했다. 또 당총재직을 없애고 대통령의 당직 취임을 원천봉쇄하는 등 당정분리 원칙도 세웠다. 이런 쇄신안을 마련했다는 데 대한 자부심도 있었던 것이다. “이번 당 쇄신안은 한국정치사의 일대혁명을 가져올 것이다”(조세형 특대위원장), “21세기 새로운 한국을 주도할 희망이 민주당에 있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심어줬다”(이인제 상임고문).

현대정치는 정당정치라고 한다. 정치적 이념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당을 만들고, 그 구성원들이 정당의 대표를 뽑아 국민의 동의 아래 집권하는 게 정상적인 정치절차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은 거꾸로 서 있다. 권력자가 위로부터 정당을 만들어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화당,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당 등 집권당은 모두 권력자의 필요에 의해 급조된 정당이다. 권력과 맞서온 야당도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시절부터 ‘정당 만드는 전문가’ 소리를 들었다.

이번 민주당의 쇄신안은 이런 점에서 새로운 정치발전의 모색으로 적극 평가할 만하다. 정당의 권력창출 과정에 일반국민이 참여하는 길을 텄다는 점에서 거꾸로 서 있는 우리 정당의 기반, 권력기반을 바로 세우는 정치개혁의 첫걸음이 될 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개혁안이 과연 민주당의 위기, 심각한 민심이반 현상을 되돌릴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국민경선제가 정권재창출의 승부수 노릇을 할 수 있을까. 민주당 관계자들은 국민경선제가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어떤 후보가 선출되더라도 후보의 대선경쟁력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의 특대위원이었던 김경재 의원은 “후보경선과정이 16개 권역에서 시차를 두고 이뤄지는 한달 반 동안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을 것이라는 점과 당내경선이 아닌 국민경선제를 통해 뽑힌 후보의 민주적 정당성이 홍보된다는 점에서 대선경쟁력의 제고를 기대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고문의 한 측근은 “단순화를 무릅쓰면 민주당은 동교동+비판적 지지자들로 이뤄졌다. 민주당의 위기는 비판적 지지자들의 이반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이번 개혁조처로 그동안 실정으로 떠나갔던 비판적 지지자들이 되돌아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관건은 국민 참여도


사진/ 회심의 승부수. 민주당 당무위원들이 당헌·당규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뒤 박수를 치고 있다.(한겨레 김경호 기자)


국민경선제가 당권파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조처임에도 큰 반발없이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당내 위기의식이 컸기 때문이다. 이번 개혁안을 마련한 특대위에서도 처음에는 국민경선제 도입에 대해 “부작용이 우려되고 지나치게 모험적이다”는 의견이 강했다. “애초 9천여명의 대의원을 2만5천명으로 늘리는 방안이 유력하게 제시됐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우리당에 등을 돌린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전 특대위 부위원장 유재건 의원) 민주당에서는 그만큼 국민경선제에 대한 기대도 큰 것이다.

국민경선제는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초유의 일이다. 따라서 국민경선제가 대선에 끼칠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검증할 방도는 아직 없다. 그러나 유추해볼 사례는 있다. 2000년 5월 민주당의 서울 도봉을지구당(위원장 설훈 의원)은 서울시의원 재·보선 후보를 평당원이 직접 뽑는 상향식 공천을 처음으로 실시한 적이 있다. “후보 공천을 평당원의 투표로 결정한 것이 시의원선거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가 뽑은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당시에도 분위기가 민주당에 불리했다. 재·보선이 8곳에서 실시됐는데 민주당이 7곳에서 패했다. 우리 지구당 후보만 유일하게 당선됐다. 이번 국민경선제도 대선에서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설훈 의원) 상향식 공천이 선거승리에 역할을 했듯이 국민경선제도 대선승리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본 자민당의 사례도 국민경선제의 성공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본 자민당은 지난해 4월 모리 체제가 사퇴하기 전까지 잇따라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는 등 최악의 위기였다. 그러나 총재 예비선거를 도입해 ‘고이즈미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9월 참의원 선거에서 교체의석 121석의 과반수(61석 이상)인 64석을 휩쓰는 압승을 거뒀다.

‘DJ 대 반DJ’ 구도 위협

관건은 국민들의 참여도다. 성패는 일반국민들이 국민선거인단에 얼마나 응모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누구도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낙관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이 1월8일 전국 20살 이상 남녀 2352명을 대상으로 전화자동응답시스템(ARS) 방식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61.8%가 국민경선 선거인단에 참여하겠다고 답변했다. 지역별로는 부산·울산·경남 58.1%, 대구·경북 51.1%로 영남지역에서 평균선을 밑돌았으나 국민 절반 이상이 관심을 보였다. 민주당은 국민선거인단의 응모율을 높이기 위해 신문·방송 광고실시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전체 유권자가 3300만명 정도라고 할 때 10%인 300만명이 참여해 움직인다면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는 못한다. 특대위에서도 자칫 응모율이 저조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특대위원이었던 천정배 의원은 “국민선거인단을 추첨을 통해 뽑는 방식으로는 국민들의 참여를 보장하기 어렵다”며 참여를 희망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완전 국민경선제를 주장했다. “국민선거인단을 3만5천여명 뽑는데 35만명만 응모해도 10 대 1의 경쟁률이다. 이런 바늘구멍 같은 기회를 기대하고 국민들이 응모할지 확신이 안 선다. 더욱이 정당법상 이들은 당원이 돼야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하겠느냐. 국민 누구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 훨씬 높은 참여율을 보장할 수 있을 텐데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천정배 의원)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국민경선제가 대선구도에 변화를 줄 수 있느냐 여부. 통상 선거는 구도의 싸움이라고 한다. 어떤 구도로 짜여지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지역대결이냐, 정책대결이냐, 전선이 어떻게 세워지느냐에 따라 대선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선구도는 철저한 지역구도였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대세론도 상당부분 지역주의 정서에 기초한 ‘반DJ 대 DJ’ 구도의 반사이익에 의존하고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반DJ 대 DJ’의 대결구도를 깨뜨리지 않는 한 정권재창출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민주당은 국민경선제가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실 국민경선제에는 민주당 후보를 김대중 대통령과 호남지역으로부터 어느 정도 탈색시켜줄 가능성이 열려 있다. 후보선출과정에서 김 대통령의 입김이 배제됨으로써 후보지명 의혹을 털 수 있다. 또 인구비율에 따라 선거인단이 구성됨으로써 영남지역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호남당의 이미지를 벗어버리는 역할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주당의 전체 선거인단은 7만760여명. 이 가운데 영남은 2만여명, 28.3%로 호남의 8천여명(11.2%)보다 두배 이상 많아졌다. 이런 수치는 2000년 8월 전당대회 당시 대의원 구성과 비교하면 혁명적 변화라고 할 만하다. 당시 대의원은 9700여명. 이 가운데 절반 가까운 4천여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또 국민경선제라는 역동적 상황 자체가 전혀 새로운 대선구도를 몰고올 가능성도 열려 있다. 정동영 상임고문쪽 관계자는 “국민경선제를 통해 젊음과 개혁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현재의 지역구도, ‘DJ대 반DJ’라는 시대착오적인 구도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대선구도의 패러다임도 ‘낡은 가치’ 대 ‘새롭고 젊은 가치’, ‘구세대’ 대 ‘신세대’의 대결 등 개혁과 세대교체를 중심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으며, 이런 구도에서는 ‘3김’의 낡은 이미지가 덧칠된 이회창 총재보다 새로운 가치, 젊은 리더십을 표방하는 우리당 주자들이 유리하게 된다”고 전망했다. 민주당의 다른 관계자는 “76년 카터나 92년 클린턴의 경우 대선에 뛰어들기 전에는 무명이나 다름없었지만 젊음과 패기, 새로운 가치를 앞세워 오랜 공화당 지배체제에 도전한 끝에 승리했다. 우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내·외부세력 조직적 개입에 무방비


사진/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이제 국민의 뜻을 물어야 한다. 당무회의에 참석한 대선주자들.(이용호 기자)


그렇지만 국민경선제가 현실정치 무대에서 대선경쟁의 승부수로 통하게 될지 확신하기 어렵다. 오히려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우선 국민경선제가 외부세력의 조직적 개입에 무방비상태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한나라당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후보가 선출되도록 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국민선거인단에 응모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특대위에서도 이런 우려가 논의됐지만 모험을 감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미국 예비선거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곤 했다. 2000년 공화당의 미시간 예비선거에서 매케인은 부시를 눌렀다. 공화당원들의 표는 부시가 많았지만 민주당원들과 무소속 투표자들이 매케인에게 표를 몰아줘 승부가 뒤집혔다. 소속당원들의 뜻이 왜곡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또 민주당 대선주자들이 사조직을 동원해 대거 선거인단에 응모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개입할 경우 자칫 불공정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국민경선제가 의도와 달리 지역주의를 더 강화시킬 여지도 있다. 16개 시·도를 돌며 순차적으로 경선을 실시하는 방식이 특정지역의 몰표현상을 확인시킴으로써 지역감정 문제를 더욱 첨예화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고문이 영남지역에서 몰표를 받으면 그뒤 충청지역에서는 이인제 고문에게 표가 몰릴 가능성이 있고, 이렇게 되면 다시 영남정서를 자극해 몰표현상이 나타나는 등 지역감정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대위에서도 이런 문제를 우려해 한때 개표는 경선 마지막날 한꺼번에 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그러나 지역감정 자극의 우려도 있지만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개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순회경선의 역동성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전 특대위원 김경재 의원)

경선과정에서 대선주자간 경쟁이 과열돼 돈선거, 조직선거 등 혼탁선거가 일어날 경우도 국민경선제의 의미를 퇴색시킬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의 한 중진의원은 “걱정이다. 국민경선제 도입이 결정되고 지구당에 가서 당간부들에게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동안 공천권이 총재에게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에게 있다’고 했더니, 다들 ‘예, 우리에게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라. ‘시대가 바뀌었으니 대선주자들에게 돈을 받는다든가 하는 것은 기대도 하지마라.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더니 몇몇은 입맛만 다시고 앉아 있고,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몇십년 동안 당생활하면서 돈선거, 조직선거에 길들여진 지구당 간부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혼탁선거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것이다.

지자체 선거 결과도 변수


사진/ 국민참여경선제는 거꾸로 서 있는 우리 정당의 기반을 뒤집는 계기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주최 '유권자 행동의 날'에 참가한 시민들.(이정용 기자)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번 경선이 돈선거로 얼룩질지 여부에 대해 전망이 엇갈린다. 어떤 대선주자 진영의 관계자는 “국민선거인단의 경우 투표일 5∼7일 전에 확정되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돈을 뿌리기는커녕 악수 한번 제대로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을 것이다. 과거와 같이 밥 사고 봉투 돌릴 시간이 없다. 돈선거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오히려 TV토론이 이전보다 훨씬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경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다른 대선주자쪽 관계자는 “선거인단이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었기 때문에 돈도 그만큼 많이 든다고 봐야 한다. 국민선거인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20%인 당대의원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이 치열할 것이다”고 말했다.

4월20일 경선이 끝나더라도 12월 대선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점도 국민경선제의 대선 영향력을 반감시킬 것으로 예상됐다. 더욱이 6월 지방자치단체 선거 결과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만들 수도 있다. 자칫 민주당이 참패할 경우 후보책임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고, 이 경우 국민경선제의 긍정적 효과는 국민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또 각종 게이트 등 정권말기 권력형 비리의혹이 장기화할 경우도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국민경선제 도입이 끝간 데 없는 하향곡선을 긋던 민주당 지지도가 반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줄 것이며, 이른바 이회창 대세론에 대한 제동장치 노릇을 할 것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별 이의가 없다. 그렇지만 이런 반전가능성이 곧바로 대선승리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데도 이견이 없다. 이런 점에서 12월 대선의 향방은 국민경선제라는 승부수를 들고 나온 민주당이 앞으로 그 취지를 어떻게 살려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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