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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당한 밀실정치 예비선거와 코커스를 기반으로한 미국의 국민참여경선제, 그 탄생과 발전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크게 민주·공화당의 후보지명단계와 본선거로 나뉜다. 후보지명단계에서 실시되는 것이 예비선거와 코커스(Caucus). 민주·공화 양당은 4년마다 이 과정을 통해 자기당의 대통령후보를 선출한 뒤 11월 첫 월요일 다음날(화요일)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내보낸다. 형식적 절차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도 민주당과 한나라당 등 각 정당들이 후보선출단계를 거친 뒤 5년마다 12월 열리는 대통령선거에 후보를 내보낸다.
득표수에 따라 대의원 배정
그러나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정당들은 철저히 평당원이나 유권자들과 유리된 채 당내 행사로 후보를 결정해왔다. 정당 지도자들의 입김하에 있는 대의원들이 뽑기 때문에 사실상 정당 지도자들의 막후협상이나 총재 1인의 의사에 의해 후보가 결정돼왔다. 반면 미국은 각 정당의 후보선출과정부터 평당원들과 유권자들이 직접 참여해 투표권을 행사한다. 미국의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선거 해의 2∼6월 사이 주별로 예비선거나 코커스를 연다. 민주당 일부 주의 경우 전당대회에 파견할 대의원을 코커스에서 선출하면서도 대의원을 선출하지 않는 인기투표 형식의 예비선거를 실시하기도 한다. 예비선거는 대략 4분의 3 정도의 주에서 채택되고 있다. 일반시민들이 예비선거에서 대통령후보로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민주·공화당의 대선주자에게 직접 표를 던지면, 대선주자들은 그 득표수에 따라 형식적 선거절차인 전당대회(National Convention)에 참여할 대의원을 배정받게 되는 방식이다. 각 주의 대의원 수는 인구비례에 따라 할당돼 있다. 또 승자독식의 원칙을 채택하는 주도 있고, 비례대표의 원칙을 따르는 주도 있다. 승자독식의 원칙을 채택할 경우 승리한 대선주자에게 그 주에 할당된 모든 대의원을 몰아주며, 비례대표의 원칙은 대선주자가 예비선거에서 얻은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배분한다. 주에 따라 개방형 예비선거(Open Primary)를 치르는 곳도 있고, 폐쇄형 예비선거(Closed Primary)를 실시하는 곳도 있다. 개방형은 그 주의 유권자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제도이다. 반면 폐쇄형은 당원만 예비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선거에 참여해 투표를 하려면 사전에 유권자등록을 해야 하며, 통상 유권자등록 때 지지 정당을 밝히면 그 정당의 당원으로 인정받는다. 코커스는 예비선거보다 훨씬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주 하부단위의 지역회의를 통해 주당원회의에 나갈 대표자를 뽑은 뒤 이들이 전국 전당대회에 나갈 주대의원을 뽑는 식의 피라미드 구조로 돼 있다. 이렇게 예비선거와 코커스를 통해 뽑힌 각 당의 대의원들은 7∼8월 사이 열리는 전국 전당대회에 모여 대통령후보를 지명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전당대회는 이미 예비선거와 코커스에서 대의원을 과반수 획득한 주자를 대통령후보로 공식화하는 요식절차에 불과하다. 오히려 11월 대통령 본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 양당이 선거승리와 단합을 다짐하는 이벤트성 행사 성격이 짙다. 미국 정당들이 처음부터 대통령후보 결정과정에 평당원이나 유권자들의 참여를 보장한 것은 아니다. 예비선거가 일반화한 것은 오랜 정당개혁의 산물이다. 미국의 제1대와 제2대 대통령선거는 뚜렷한 후보지명과정이 없었다. 각 주의 정치 엘리트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은 아무 논쟁없이 만장일치로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17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방의회 내에서 정책적 지향에 따른 갈등으로 정당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대통령 선출과정은 점차 정당에 영향을 받게 된다.
정당조직의 부패 막기 위해 도입
초기 각 정당들의 대통령후보 선출은 소속 연방의회 의원들의 총회인 ‘킹 코커스’(King Caucus)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1820년대 들어서면서 각 주 정당의 조직과 대중으로부터 킹 코커스 거부운동이 거세지면서 킹 코커스는 더이상 대통령후보를 선출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각 정당들은 주 의회 의원총회에서 대통령후보를 선출하게 된다. 이런 방식도 곧 바뀌게 된다. 주 의원총회에서 대통령후보를 지명하는 방식이 전국적인 선거연합의 형성을 어렵게 만든다는 반성이 일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1830년대 들어서면서 각 전당들은 전국적 규모의 전당대회에서 후보를 지명하는 방식을 도입한다. 이후 논란은 전당대회에 참여하는 대의원의 선출방식에 관한 것으로 좁혀진다. 이런 변화는 재산이 없는 하층민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된 개혁조처와 이민자의 급격한 유입 등으로 유권자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824년 36만명에 그쳤던 총투표자 수는 1828년 100만명을, 1840년에는 200만명을 넘어서게 됐다. 따라서 정당들도 대중성을 강화해 득표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후보 선출 권한이 연방의회 의원들에서 각 주의회 의원들로, 또 주 정당이 선출한 대의원들의 전당대회로 넘어가게 되면서 정당조직도 변화를 겪는다. 주 정당의 권한이 커지면서 민주·공화 양당은 주 정당들의 연합체라는, 정당의 연방제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여기에 남북전쟁은 정당의 지역적 성격을 가중시켰다. 남부에서는 민주당이, 동북부에서는 공화당이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특정지역에서 특정 정당조직이 공직자 당선을 독점하자 이 정당의 보스들이 권력과 이권을 휘두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른바 막후 실력자로서 연방 상원의원이나 주지사보다 훨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된 것이다. 평당원과 일반 유권자가 후보를 직접 뽑는 예비선거가 도입된 것은 이런 정치현실에 대한 반발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정당보스들의 전횡과 부패를 혁신하기 위한 이른바 진보주의 개혁운동이 거세지게 된다. 그 결과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대부분의 주에서 정당에 대한 법적 규제가 강화된다. 정당 조직부터 후보선출 과정과 의사결정 방법 등의 요건을 법률화해 정당조직의 부패와 권력남용을 막으려는 시도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함께 일부 주에서는 예비선거가 도입된다. 예비선거는 1912년 14개주, 1916년 23개주에서 채택되는 등 급격히 확산됐다. 그러나 1920년을 고비로 예비선거 개혁은 제동이 걸린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진보주의 운동이 힘을 잃은 데다 정당보스들의 반발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또 예비선거가 일부 주에서만 시행됐기 때문에 예비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대선주자가 대통령후보에 지명될 수 있었던 것도 예비선거의 쇠퇴를 부채질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후보 결정은 여전히 정당보스들의 밀실협상에서 이뤄졌다. 다만 대선주자들은 예비선거에서 얻은 높은 대중지지도를 정당보스들에 대한 압력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68년 최악의 전당대회
당시 민주당에서는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의 기수로 대통령후보 지명에 도전했다. 이에 맞서 당내 유력인사들은 예비선거에 한번도 출마하지 않은 험프리 부통령을 대통령후보로 내정했다.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예상대로 험프리를 후보로 지명했지만, 진보파와 기존 당권파 사이의 내분과 혼란을 TV중계를 통해 전국에 알린 최악의 전당대회가 됐다. 대회장 밖에서는 민주당의 거물 데일리 시카고 시장이 동원한 경찰에 반전운동의 시위가 무자비하게 진압됐고 안에서는 데일리에 의한 일방적인 대회진행에 대한 항의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분과 혼란은 민주당에 위기의식을 가져다줬다. 게다가 11월 본선거에서 험프리가 패배하자 개혁의 필요성이 확산된다. 당개혁을 위한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됐으며, 이 위원회는 정당보스들의 타협에 의한 대통령후보 결정 방식을 폐기하고 대통령후보 선출 과정을 평당원에게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을 내놓게 된다. 이 지침 발표 이후 점차 예비선거가 일반화하기 시작한다. 공화당도 민주당의 개혁조처에 자극을 받아 예비선거의 도입을 확대하게 되면서, 민주·공화 양당에서 예비선거는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 선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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