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등록 2001.12.26(수) 제390호

[표지이야기] “여성은 대안정치세력이다!”

여야 올 지방선거에 대규모 후보출마… 여성할당제는 ‘정당공천’이 벽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는 이현주(42)씨는 2001년 8월, 18년간 근무했던 직장(매일경제 교열부)을 그만뒀다. 몇달간 진로를 고민한 뒤 그는 새로운 직업을 갖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새 직업은 정치이다. 다가올 지방선거에 구의원 후보로 출사표를 던질 각오를 했다.

중앙선관위 정치교육과의 뜨거운 열기

“여성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는 오래 전부터 가져왔지만, 막상 저 자신의 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안 될 건 또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서 뜻을 함께하겠다고 나선 분들도 든든하고, 여자라서 안 된다는 정서도 크지 않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이씨는 11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 정치교육과에서 진행한 여성입후보예정자 연수에도 참가했다. 각지에서 올라온 여성들과 2박3일간 밤샘토의를 거듭한 끝에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한다.

여성은 2002년 정치의 계절에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그룹이다. 대선의 전초전격인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각각 1천명 이상의 여성후보를 내보내겠다고 공언하고 있고, 양당이 정치아카데미를 통해 길러낸 여성들도 수백명씩 된다. 11월 한달간 30명씩 모두 4차례에 걸쳐 진행한 중앙선관위 연수의 경우 250여명이 신청을 해와 중앙선관위쪽에서 출마 의지가 확실한 순서에 따라 120명을 골라야 했다. 선거연수원 정치교육과는 “2박3일이 아니라 무박3일이라 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전한다. 참가자들의 평균연령은 47살이었지만 26살부터 64살까지 연령대가 넓었고 직업분포 역시 현직 구의원을 비롯해 사업가, 학원강사, 시민단체 활동가, 정당 활동가, 주부 등 다양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성 후보자들이 숫자로도 약진할 터이지만, 눈에 띄는 모습은 ‘특정 기초의회의 절반을 장악한다’는 목표가 선명해졌다는 점이다. 과거 후보별 선별지지를 했던 여성단체에서는 자체 후보들을 발굴해나가고 있다. 시의회 개원 이래 여성의원이 한명도 없었던 진주지역에서는 활동력이 두드러진 여성들을 상대로 여성단체들이 지방선거 출마의사를 적극 타진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윤정숙 사무처장은 “이미 의회에 진출한 여성의원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지면서 깨끗하고 공정하다는 신뢰감을 심어줬고, 지역 여성단체들이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 결과”라고 이를 분석한다.

사실 우리나라 정치에 여성진출은 늦어도 한참 늦은 꼴이다. 국회·광역의회 여성의원 비율은 5.9%, 기초의회 여성의원 비율은 1.6%이다. 세계 평균 13.8%, 아시아 평균 15.1%에도 절대적으로 못 미치는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또한 제주, 경남, 충남, 강원, 전남 등 5개 광역권에 속한 기초의회에는 여성의원이 단 한명도 없다.

기초단체장, 여성후보 20여명 나선다

여성정치인을 키울 제도를 만들자는 것은 정치권 안팎에서 오랫동안 한목소리로 요구해온 것이다. 국회 여성특위는 12월6일 여성할당제 의견서를 여야가 참여하고 있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 제출했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 한나라당 김정숙 의원, 여성특위 위원장 이연숙 의원(한나라당) 등이 공통으로 마련한 이 의견서는 국회의원과 광역의원 비례대표 50%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하고 후보자 명단 2명 중 1명꼴로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비율과 순위를 지키지 않을 경우 중앙선관위가 후보자 명단 접수를 거부하는 방안,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한 여성당선자가 30%에 못 미칠 경우 국고보조금을 삭감하는 방안 등을 넣어 구체적인 효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17일에는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모임인 미래연대의 주도로 김근태, 신계륜 등 민주당 남성의원들까지 가세해 여성할당을 포함한 정당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이 법안이 가져올 효과는 크지 않다. 현재 광역의회 비례대표 74명 중 27명이 이미 여성의원이므로 의석 수가 10석 더 늘어난다는 차이밖에는 없다. 특히 기초의원의 경우에도 각 정당의 내천(사실상의 공천)에 당락이 좌우되기 때문에 돈과 조직을 갖지 못한 여성은 공천과정에서 심사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발목을 잡는 또 하나의 덫은 자신감의 결여이다. 정치인으로 훈련하고 경험을 쌓을 기회가 전무하다보니 자질있는 여성들마저도 선거 문턱에 이르러서는 망설이게 된다.

그 결과 지방행정의 의사결정권을 갖는 단체장의 경우 출마율이 턱없이 낮다. 현재 광역과 기초를 통틀어 단체장은 울산 동구청의 이영순(39) 구청장이 유일하다. 그러나 올해 기초단체장으로 출마하는 여성들의 숫자는 최대 20여명선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영순 구청장은 “한 분야에서 지역운동을 꾸준히 했다면 승산이 있으니 망설이지 말라”고 권한다.

전주시장 출마의사를 굳힌 오정례(35) 전 전주시의원은 “단체장 도전은 지방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 앞장서 싸울 만한 기회”라고 말한다. 시의회 재선의원으로서 “젊은 여자라서 그런지 똑부러지게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오씨는 지난 16대 총선 때 민주당 정동영 후보와 맞붙었다. 기초의회 선거 때 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그가 “기껏 키워줬더니 감히 배신을 했다”는 험한 소리를 들으며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을 한 배경에는 구체적이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기초의회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을 보면 놀랄 정도로 활동량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양당이 지역을 분할점령하고 지구당 위원장의 입김이 절대적인 가부장적 구도 아래에서는 소신있는 지역정치를 할 수 없어요. 87년 이래 15년간 한 지역에서 한 당이 계속 압승을 거둔 결과 부정부패가 판치고 지역주의가 공고화된 게 아닙니까.”

여성계, 대선후보의 여성관을 검증한다

의회에서 상식적으로 합의된 내용이 서울에서의 입김에 따라 엎어지는 걸 수도 없이 목격했다는 그는, 지금과 같이 호남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의 그늘에 있는 한 지방자치의 발전은 요원하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민주당이 아닌 야당후보로 전주시장에 출마하기로 맘을 굳혔다. 그는 “지역감정이 모든 정치의 근원이 되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의원이든 단체장이든 어느 쪽 하나는 당분간 정당공천을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방선거에서 부는 여성 바람이 대선까지 흐름을 탈 수 있을까. 정치권에서는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핵심적인 후보군에 속한 박근혜씨는 여성계의 지지를 전혀 못 받고 있고, 대권 경쟁력이 있는 여성후보가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조현옥 대표(배재대 정외과 교수)는 “각 기초의회의 여성의원 경우에는 남성정치의 한계를 극복한 성과를 낸 이들이 많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며 “올해 지방선거 등을 거치며 여성의 정계입문이 꾸준히 늘어나면 여성의 정치와 여성다운 정치에 대한 변별력이 생기고 그에 따른 논쟁도 서서히 불붙을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대선을 앞두고 여성계는 연금권, 모성비용의 사회화, 호주제 문제 등 여성의 권익과 지위를 위한 이슈들로 후보들의 ‘여성관’을 검증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인순 사무처장은 “막연한 이미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여성정책과 이슈를 통해 여성계가 함께 후보간 선명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후보와 유권자에게 ‘대안정치세력으로서의 여성’을 경험하고 훈련할 기회의 장이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02년에 부는 여성 바람은 비록 거대한 태풍은 아닐지라도 공고한 남성정치의 언 땅을 녹이는 따뜻한 훈풍이 될 것 같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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