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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성공, 조연은 싫다 대안적 성공모델을 향한 당당한 출발… 성장세 뚜렷해도 안팎에 함정 수두룩
3시간 동안 진행된 강의의 주된 내용은 성공을 위한 자기관리와 오픈마인드였다.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는 유선아(22·ㄱ대 경영학 4년)씨는 “졸업하면 프리랜서로 업무를 아웃소싱받아 일하다가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아 1인창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주저없이 말한다. “성공해야지요.”
성공을 향한 구체적 고민과 준비
성공을 꿈꾸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취직, 이직, 승진, 창업은 성공을 위한 구체적인 과정이다. 젊은층으로 갈수록 부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열망을 밝히는 데 스스럼이 없다. 20대 여성들의 성공에 대한 관심은 사랑과 결혼이라는 화제를 따돌린 지 오래다. 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종합월간지 <코스모폴리탄>의 김현주 기자는 “매달 독자들을 상대로 성향파악을 위한 모니터를 하는데 ‘요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5명 중 4명은 ‘직업적·경제적 성공’을 꼽는다”고 말했다. 여성의 성공에 대한 열기는 서점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보문고를 비롯해 대형서점에서 여성 성공코너를 따로 마련할 정도로 많은 종류의 책들이 쏟아져나온다. 94년 폭발적으로 팔린 조안 리의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 이래 여성의 성공을 다루는 출판계의 트렌드는 급속한 변화를 거쳐왔다. 90년대 후반까지 방송인 등 유명인이나 ‘인간승리’를 한 여성들의 자전적 성공담이 인기를 끌었다면 지난해를 분기점으로 구체적인 성공가이드북쪽으로 방향 선회를 했다. 눈물샘과 부러움을 자극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올해 들어 판매뿐 아니라 출간도 정체됐다. 인터넷 책전문 쇼핑몰 yes24 마케팅팀의 최문희씨는 “출판시장의 주소비층인 20대 여성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걸 피부로 느낀다”며 “출판기획을 앞질러가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실사구시적 성공전략”이라고 말한다. 미모·돈·남자라는 ‘팔리는 3박자’를 모두 갖춘 린다 김씨의 자서전이 실패한 것도 놀랍지 않다. 올 초 여대생들이 닮고 싶은 인물 1순위로 꼽기도 했던 앵커 김은혜씨의 자전적 스토리 역시 판매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내게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출간돼 올해까지 yes24 베스트셀러 순위를 지키고 있는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는 ‘위임권이 없는 책임은 떠맡지 말라’, ‘큰 목소리로 말하라’, ‘회의실의 중앙에 앉아라’등 구체적인 지침을 설파한다. <CNN> 부사장인 지은이 게일 에반스의 구체적인 체험이 녹아 있는 이 책은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이제 여성들은 꿈의 실현이라는 ‘추상적 기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성공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7년째인 (주)태평양의 여대생 논문공모전 주제는 ‘여성의 성공’이다. 불과 5년 전인 96년의 주제는 자녀교육과 부부관계, 혼수, 효 등이 선택영역으로 제시됐던 ‘현대 가족 속에서의 여성의 역할’이었다. 그뒤로도 줄곧 생활문화와 가족·사회에서의 헌신성이 주제였던 것에 비춰보면 눈에 띄는 변화이다. 태평양장학문화재단 이철수 차장은 “빠르게 변하는 여성들의 관심사를 반영해 올해의 주제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최종심에 오른 24편의 논문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적 리더십 프로그램 개발’, ‘여성의 조직내 성공’, ‘성공요인으로서 라이프 스타일과 자원에 대한 연구’ 등 여성의 리더십에 대한 사례연구였다. 또한 ‘여성주의적 성공’, ‘여성 성공의 새로운 의미’, ‘여성이 만드는 대안적 미래’ 등에서는 남성사회로의 편입, 수직적 신분상승, 고액연봉 등으로 상징되는 성공에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 성공의 획일적 통념을 넘어서려는 고민들을 담고 있다.
‘체감지수’ 높지만 불이익 구조 여전
성공의 첫걸음은 자기 일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체감지수’에 비해 현실의 ‘유리천장’(승진 등에 불이익는 겪는 보이지 않는 남녀차별구조)은 여전히 공고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세계적으로 여성의 연령별 취업형태가 종형(30대가 가장 높고 20∼49살까지 큰 변동이 없는 것)으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20대 후반∼30대 중반 사이 취업률이 뚝 떨어지는 엠(M)자 곡선을 여전히 그린다. 고학력 여성의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하다. 대졸 이상 여성의 연령별 취업률 분포는 재취업을 영구히 포기하는 모양새인 ㄴ자 형태를 보인다. 올해 대학 졸업자 중 여성 비율은 46.9%. 광범위한 여성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지만 대기업의 여성인력 활용은 터무니없이 낮다. 여성노동자는 네명 중 한명꼴(25.4%)이고 대졸여성의 경우 여섯명 중 한명꼴(14.9%)로 뚝 떨어진다. 부서별로는 비서직(60.5%)과 판매, 홍보부서 등에 집중돼 있다. 또한 동일직종 동일노동의 경우 남녀 임금격차는 남자를 100으로 보았을 때 62.5 정도에 머문다(2001 한국여성개발원, 김태홍). 노동시장에서의 낮은 지위는 남녀평등과 남녀권한에서 극단적인 차이를 낳는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는 남녀평등지수에서는 146개국 중 29위로 상위에 속했으나 남녀권한척도는 64개국 중 61위로 꼴찌그룹을 기록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여성이 관리기능과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은 탓이다. <한겨레21>이 SK그룹 계열사 3곳과 LG그룹 계열사 3곳을 조사한 결과, 과장급 이상 여성관리직 비율은 심한 불균형 상태이다. 국내기업 평균수준으로 꼽히는 SK의 경우 12월 현재 여성관리직 비율이 3%가 채 안 되고 다른 기업에 비해 여성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LG의 경우에도 10%를 밑돌았다(표 참조).
그러나 조직 안에서 여성들의 위치를 축소시키는 배경에는 남성 위주의 관행과 의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12월11일 열린 ‘여성인력 활용 선진화 방안’ 세미나에서 삼성경제연구소 류한호 박사는 숫자·권한·기회의 연관성을 통해 기존 여성인력의 소수파 위치를 분석했다. 수적 열세가 조직 안에서 여성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그것이 또 성취에 대한 여성 스스로의 관심을 낮추어 계속 마이너리티로 머물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각종 성공가이드북이 말하는 ‘여성 자신의 함정’과 맥이 닿아 있다. 성공전략서들은 여성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임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한다(그래서 싸우지 않는다). △당당히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남이 알아주기만 기다린다(그러다 계속 대접을 못 받는다). △힘들 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는다(혼자 끙끙대다 관리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찍힌다).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않고 무작정 헌신한다(결국 직업적 비전을 잃어버린다). △성공은 모두의 덕, 실패는 내 탓이라 여긴다(성공은 남이 가져가고 실패에 대한 책임만 남는다). 월간 <프리미어> 최보은 편집장은 “많은 여성들이 남성보다 헌신적으로 일하지만 커튼 뒤의 역할에 머문다”며 “양보의 미덕을 여성성의 절대적인 특징으로 오해하는 게 여성 스스로가 가진 마지막 함정이다”라고 지적했다.
양보는 더이상 여성의 미덕이 아니다
올 봄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로스쿨(법과대학원) 여학생 입학률이 2001년을 분기점으로 과반수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또 로스쿨 입학생에 여성들이 대거 포함되는 것은 의대 등 다른 전문분야의 여성 증가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구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로스쿨 졸업자는 정계와 재계, 관계 등에 활발하게 진출해 정책 결정과 집행에 직접적인 파워를 발휘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사법고시 합격자 비율은 10년간 꾸준히 상승선을 그려왔다. 2002년 입소를 앞두고 있는 올해 사법고시 합격자 중 여성비율은 17.5%로 93년에 비해 세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실제 여성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다가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하나의 지표다.(표 참조)
“남자는 성공을 통해 배우지만 여자는 좌절을 통해 배운다.” 세계 12개국 여성들이 읽고 있는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의 지은이 우테 에하르트의 말이다. 여성이 지닌 안팎의 한계는 앞으로도 상당부분 성공을 꿈꾸는 여성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여성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올해 부쩍 늘어난 여성 창업세미나와 성공전략 강연회, 그리고 여성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는 축적된 좌절을 탄탄한 돌다리로 바꾸는 현장이다. 작게는 ‘조직 안에서 자신을 알리는 법’에서 크게는 ‘커리어 맵을 짜는 준비과정’까지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한 선배들의 크고 작은 노하우들이 출발점에 선 젊은 여성들에게 매뉴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으로 네트워크를…
‘좌절과 실패’를 공유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여자의 성공을 개개인의 흩어진 열망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바로 여성 자신의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 자신감은 수직적 위계와 배타적 이익을 토대로 하는 남자들의 성공과 사뭇 다른 밑그림을 그린다. “여성 네트워크 안에서 한 여성의 성공은 곧 전 여성의 성공이다. 이제는 ‘올드 보이 네트워크’에 작별을 고할 때가 됐다.” 여성벤처인 김희정(36·사비즈 대표)씨는 말한다.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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