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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도를 흔들어라? 대선 앞두고 ‘영남포위론’ 효력 사라져… 개혁적 대선주자들 ‘이념구도’ 모색
며칠 뒤 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과 같은 지역구도, 영남 대 호남+충청의 구도, 이른바 ‘영남포위론’과 같은 구도로 대선을 치른다는 전략은 더이상 먹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대선구도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대선은 해보나마나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대선구도 새판짜기 없으면 ‘필패’ 공감
왜 민주당 관계자들 사이에 새삼스럽게 대선구도가 논란이 되는 걸까. 무엇보다 10·25 재·보선이 DJP 공조 붕괴 이후 처음 치러지는 선거라는 점 때문인 것 같다. DJP 공조 이후 충청표의 향배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재·보선 결과 충청표가 거의 민주당쪽으로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호남+충청의 지역연합 구도에 문제제기가 일어난 것이다. “심각한 것은 또 있다. 충청권 출신인 이인제 최고위원의 경우 서울 동대문을과 구로을에서 정말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충청표에 대한 흡인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인제 최고위원의 충청권 득표력에 의구심이 생긴다면 호남+충청의 지역구도는 어려운 것 아니냐.” 그동안 민주당의 대체적 분위기는 대선을 지역연합 구도에서 치를 수밖에 없다는 쪽이었다. 이런 방향에서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처조카 이영작 박사. 이 박사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지역연합론을 주장해왔다. 이 박사는 “영남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내년 지방선거 전에 호남·충청·강원지역이 각각 3분의 1의 지분을 갖는 합종연횡식 지역연합이 이뤄져야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밝혀왔다. 사실상 영남포위론인 셈이다. 여권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역대 대선국면은 양자구도가 아닌 삼자구도로 전개돼왔다. 내년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제3의 인물은 영남권에서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기대섞인 전망을 해왔다. ‘비영남권의 연대와 영남권의 분열=대선 승리’라는 구도, 지역구도를 전제로 한 대선구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충청권 출신의 이인제 최고위원이 민주당 내에서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혀온 것도 이런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지역구도의 역사적 뿌리는 깊다. 무엇보다 그동안 87년 이후 3차례 대선이 모두 지역구도로 치러졌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경우 민정당 이후 영남을 기반으로 집권했고, 여권도 정권교체 이전부터 사자필승론, 지역등권론 등을 주장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역구도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정권교체의 일등공신으로 현 정권을 있게 한 DJP 공조도 지역연합의 결과였다.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에 맞서 소외된 지역인 호남과 충청이 연대해야 한다는 황태연 교수의 논리가 바탕이 된 것이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진보세력을 연대의 한축으로 상정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0·26 재·보선 참패는 이런 구도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더이상 현재와 같은 지역구도로는 정권재창출이 어려운 것 아니냐는 지적인 것이다. 실제 한나라당은 현재와 같은 지역구도를 필승의 구도로 보고 있다. 이회창 총재의 한 측근은 “지금 구도는 결국 DJ 대 반DJ의 구도 아니냐. 지금 구도는 더할 나위 없다. 우려되는 것은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다. 예컨대 85년 민정당 시절 총선에서 신생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기존 구도를 깨고 나와 제1야당이 된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판이 급변하게 되면 갑갑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3김연대’에 미련… 정책적 결집 시도
이런 이유로 지역구도 자체를 완화시키는 새로운 대선구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연대론’이다. 민주개혁세력연대론의 핵심은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이 결집해 대선구도를 민주개혁세력 대 수구특권계층의 대결구도로 짜자는 것. 이를테면 지역구도에서 개혁 대 수구의 구도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노무현·김근태 최고위원이 그동안 꾸준히 제기해왔다. 김근태 최고위원은 “정치노선이나 정책노선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먼저 결집하고 그 깃발 아래 중산층과 서민의 이익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모든 세력과 손잡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패특권세력, 수구적이고 퇴영적인 지난 시기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역구도를 벗어나 이념적 정책적 차이에 따른 대결구도로 새로운 판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구도가 한국 정치발전을 위해서도 올바른 방향이라는 인식도 녹아 있다. 수도권의 한 재선의원은 “민주개혁연대는 민주당 내에서 진정한 지역연합과 함께할 요인도 갖추고 있다. ‘김근태=서울 경기’, ‘노무현=부산 경남’, ‘한화갑=호남’ 등의 지역대표성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연대가 수구특권세력을 대변하는 한나라당에 대항하는 구도로 짜여지면 승산이 있다”라고 말했다.
뿌리 깊은 지역구도에 균열 생기려나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한국사회에서 지역구도의 뿌리가 워낙 깊다는 것이다. 과연 지역구도가 주요 변수인 한국정치 상황에서 정책과 정치노선의 차별성으로 호소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먹힐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있다. 민주개혁파로 지칭되는 세력이 한국사회에서는 소수파라는 점, 여전히 단결된 힘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80년대 이후 한국정치사에서는 검증되지 못한 시도라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대중 대통령이 두 차례 낙선한 것은 김 대통령의 상대적 개혁성이 지역대결구도에 파묻혔던 게 주요 원인 아니냐. 민주개혁세력이라는 깃발이 우리나라 같은 정치 풍토에서 얼마나 통용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구도싸움이 마치 전초전처럼 민주당 내 대선주자들의 갈등구조와도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내부의 갈등이 전당대회 개최를 둘러싼 권력투쟁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한화갑·노무현·김근태·정동영 최고위원의 4자연대가 ‘민주개혁세력 연대’라는 깃발 아래 추진되고 있고, 이인제 최고위원이 이에 대립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그룹의 갈등이 격렬해질수록 대선구도를 둘러싼 논란도 점차 첨예화할 것으로 보인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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