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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빠진 DJ, 버려야 산다 껍데기뿐인 권위 극복할 정치적 결단 절실… 민주당 총재직 내놓고 초당적 국정수행해야
“이제 김 대통령이 욕심을 버려야 한다. 정국의 주도권을 쥐겠다, 또는 정치적으로 어떤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의도는 오히려 부메랑이 돼 김 대통령의 힘만 더욱 뺄 가능성이 높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그나마 정국을 원만하게 끌고가는 길이 아니겠느냐.”(민주당의 다른 의원)
당내 권력다툼 와중에 임기마저 불안
민주당 내분이 집권세력 내부의 권력다툼과 대선주자들 사이의 각축으로 확대되면서 김 대통령의 권위와 위상이 하루가 다르게 실추되고 있다. 사태를 수습할 지도력을 의심받게 된데다, 당내 갈등이 격화되면서 서서히 화살이 김 대통령쪽으로 향하는 사태가 온 것이다. 김 대통령의 권위가 침식돼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정운영은 내내 DJP 공조의 불협화음으로 삐걱거려왔다. 게다가 원내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집중 견제로 국정운영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정부 출범 이후 햇볕정책의 실무를 이끌어온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지난 9월 국회를 통과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 불안한 동거체제였던 DJP 공조가 공동정부 내부의 지분과 주도권 다툼으로 파탄나면서 그동안 한나라당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의지를 갖고 이끌어왔던 대북 포용정책이 타격을 입게 된 경우였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정부는 이미 임기말 레임덕 현상에 시달리고 있던 셈이다. 사실 지난 9월 임 전 장관의 해임건의안 통과를 전후해 여권 내부에서는 김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김 대통령의 민주당 장악력만큼은 확고했다. 김 대통령은 지난해 민주당 창당과 함께 영입해온 서영훈 대표체제 이후 청와대비서실장 출신인 김중권·한광옥 대표체제를 출범시키는 등 동교동계 직계를 전면에 배치해 당을 직접 통제해왔다. 소장파들의 당정쇄신 요구가 잇따랐으나 김 대통령은 이들을 힘으로 눌러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게 만들어왔다. 지난 9월 한광옥 대표 임명 당시만 해도 김근태 최고위원까지 소장파들의 당정쇄신 요구에 가세해 한광옥 대표체제 출범에 반대했으나, 김 대통령은 동교동계를 동원해 어렵지 않게 무력화했다. 차기 주자들의 경선가열 움직임에 대해서도 “지금은 성공적인 국정운영이 우선”이라는 논리로 경고메시지를 보내는 등 여권 내부의 도전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차단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 대통령의 당내 권위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됐다. 이런 사태는 김 대통령의 권력누수 현상을 가속화해 자칫 김 대통령이 정상적인 국정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민주당의 소장파 의원은 “걱정스러운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 말기와 같은 상황이다. 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온 것이 YS가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까지 갔던 때였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레임덕에 빠졌을 때 위기가 찾아오면 대책이 없다. 지금 심각한 경제난 등 국정이 어려운데 국정마비 사태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했다.
동교동계 구파 해법에 소장파들 반발
애초 10·25 재·보선 패배 직후 민주당 내 대체적인 분위기는 허탈감과 무력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뚫고 당내 논의를 주도한 것은 동교동계 구파쪽이었다. “민심수습을 위해서는 여권의 대선후보 조기선출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이훈평 의원) 동교동 구파쪽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에 당내 분위기는 순식간에 후보조기가시화쪽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여기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김근태·정동영 등 일부 최고위원과 소장파들이었다. 이들은 “후보조기가시화는 재·보선 패배 책임을 비켜가기 위한 호도책”이라며 재·보선 패배의 책임론과 당정쇄신론을 들고 나왔다. 급기야 초선의원 모임인 ‘새벽21’은 쇄신의 대상으로 권노갑 최고위원과 박지원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목하고 나섰다. 또 ‘열린정치포럼’, ‘바른정치모임’, ‘여의도 정담’, ’국민정치연구회’, ‘새벽21’ 등 당내 5개 개혁그룹이 11월1일 오전 개혁연대를 구성하고 당체제 개편과 인적쇄신 등을 촉구하는 5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하며 당지도부를 압박하자 당내 논의는 당정쇄신론으로 급속히 옮겨가는 듯했다. 그러나 인적쇄신의 화살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음을 느낀 동교동계 구파가 이번에는 ‘최고위원 책임론’을 들고 나오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된다. 동교동계 구파쪽이 11월1일 당무회의에서 “당이 이 지경이 되도록 최고위원들은 무엇을 했느냐. 반성해야 한다”며 화살을 최고위원쪽으로 돌리자 정동영 최고위원이 “민심이반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고 사퇴의사를 표명하면서, 논란의 물줄기는 다시 최고위원 사퇴쪽으로 돌려진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2일 열린 임시 최고위원회의. 김 대통령 주재 최고위원 간담회에 앞서 최고위원들의 의견을 조율한다는 명목으로 소집된 회의에서 정동영·한화갑 최고위원 등이 ‘최고위원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회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최고위원 일괄사퇴쪽으로 흘러갔다. 이 과정에서 김 대통령의 권위실추는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조순형 의원 등 몇몇은 대놓고 “대통령 스타일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어떤 소장파 의원은 “과거 소장파들이 당정쇄신을 요구할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만약 김 대통령이 당정쇄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제는 그 책임의 화살이 김 대통령쪽으로 직접 날아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당총재로서의 책임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최고위원 일괄사태에 ‘음모’ 있는가
더욱이 사태는 꼬여만 가고 있다. 최고위원 일괄사퇴는 본격적인 당내 권력투쟁의 뇌관이다. ‘최고위원 사퇴=당지도부 공백’은 곧바로 ‘지도부 재구성=전당대회 개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당대회 개최의 시기와 방법의 문제는 내년 대선후보 선출과 연결돼 있어 대선주자들 사이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맞서는 사안이다. 실제 이인제 최고위원쪽은 여권 핵심부가 당헌 당규에 규정된 1월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 선출 등 지도부 재구성만 하고 7∼8월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이른바 ‘2단계 전대론’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음모론’을 주장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 최고위원쪽은 대선후보와 당지도부를 함께 뽑는 조기 전당대회(3∼4월)를 선호해왔다. ‘2단계 전대론’이 한화갑 대표 체제를 구축한 뒤 대선후보에서 자신을 배제시키려는 여권 핵심부의 음모이며, 김 대통령도 이런 사태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화갑·노무현 최고위원 등이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음모”라고 맞받아치는 등 사태는 대선주자들 사이의 권력투쟁 구도로 급진전하고 있다. 문제는 김 대통령이 이런 사태진전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처지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인제 최고위원이 음모론을 제기하며 애초 11월3일 예정됐던 김 대통령 주재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반발하자, 회의를 7일로 연기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정말 막막하다. 한쪽에서는 인적쇄신을 둘러싸고 갈등하고, 다른 쪽에서는 대선주자들이 당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겨루기만 하고 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해법이 있겠느냐.”(청와대 관계자)
“당에 대폭적인 자율성 줘야 한다”
이런 점에서 김 대통령이 이제는 당 운영에서 손을 뗄 때가 됐다는 게 당 주변의 일반적 시각이다. 당이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자율성과 책임성을 갖도록 해야 하고, 대신 김 대통령은 초당적 위치에서 국정을 운영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수도권의 한 의원은 “당에 대해 대폭적인 자율성을 줘야 한다. 최고위원회를 명실상부한 의결기구로 만들고 또 당 대표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게 아니라 당내에서 뽑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초당적 위치에서 국정에만 전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김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에 연연하는 것이 오히려 원활한 국정운영에 도움이 안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조적으로 김 대통령이 여당의 책임자로 자리매김돼 있는 한 여야 정쟁의 한복판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야당인 한나라당이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 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소수정당의 총재라는 자리가 임기말 국정수행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불투명하다. 오히려 여야를 끌어안는 큰 틀의 정치를 통해 레임덕 관리를 하는 것이 좀더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다. 정치학자, 정치평론가, 당 관계자 누구도 뾰족수를 내놓지 못하지만 대체로 공약수로 모아지는 해법은 두가지다. “먼저 정권재창출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을 버려야 무리하지 않고 야당과 국민을 끌어안을 수 있다. 또 당적까지 버릴 필요는 없지만 총재직만큼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총재로 있다보면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또 그런 상황에서는 국정실패의 책임이 모두 청와대로 온다. 대통령으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미련 못 버리면 정권재창출 난망
임기가 끝날 때까지 레임덕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모든 대통령의 심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 세상이치다. 국정을 어떻게 무리없이 마무리할지 전념해야 할 때가 됐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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