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1.10.10(수) 제379호 |
[표지이야기] 26일간의 치밀한 준비 ‘즉각 보복’선포에서 미사일 공격 단추를 누르기까지
미국의 군사적 공격은 26일 만에야 이뤄졌다. 지난 9월11일 테러 발생 직후 밝혔던 ‘즉각적인 보복’ 다짐에 비춰보면 때늦은 감마저 없지 않다. 부시 대통령은 9월12일 테러공격을 “전쟁행위”로 규정했고, “21세기 첫 전쟁”을 선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사천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누구와 싸울 것인가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중’에 구체적인 전쟁대상을 찾아야 하는 매우 난처한 논리적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26일이라는 시간은 군사공격을 위한 준비보다는 바로 공격대상 찾기와 공격명분 쌓기에 매달린 시간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시 대통령은 9월15일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 배후인물로 공식 지목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내 사흘 안에 그를 인도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빈 라덴은 16일 즉각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고, 탈레반 정권도 거세게 반발했다. 18일 탈레반 최고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는 미국과의 성전을 선언했다. 미국의 공격목표는 탈레반 정권으로 구체화됐다. 그 사이 국제사회에는 미국에 비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빈 라덴이 테러 배후인물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탈레반 정권이 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한 국가를 공격하려는 미국의 태도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미국 내에서도 신중론이 고개를 들었다. 미국은 이런 국제여론에도 19일 자국 내 전투기와 전폭기 100여대를 걸프지역 기지로 이동시키고 21일 항공모함 키티호크를 일본 요코스카항에서 출항시키는 등 구체적인 군사적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22일에는 공수여단 등 특수군 선발대를 파키스탄에 들여보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초기의 성급함에서 벗어나 충분히 ‘신중하게’ 접근해갔다. 경제제재를 전격 철회하는 방법으로 탈레반 정권과 가까운 파키스탄을 끌어들였으며, 22일과 25일엔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아프가니스탄과 단교하도록 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0월 들어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돌며 “모든 국가들은 선택해야 하며, 이 전쟁에서 중립은 없다”는 미국의 논리를 전파했다. 6일 우즈베키스탄에 미군 제10산악사단 병력 1천여명을 아프간 국경에 배치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영구적 자유’ 작전이 실행에 들어갔다. 럼스펠드 장관은 8일 새벽 4시(한국시각) “우리는 탈레반 정권에 억압받는 아프간 주민들 편”이라고 강조했고, 인도적 구호물자를 아프간에 공중투하됐다. 그런데도 수많은 아프간 주민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피난길에 올랐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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