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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회사인간’ 주5일근무제 정착된 일본…노동자들이 주말 연휴를 스스로 디자인한다
지난 9월8일 토요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 있는 신바시(新橋) 전철역 주변은 그렇게 여유가 흐르는 한갓진 풍경 그것이었다. 도쿄 시내를 가로지르는 각종 전철이 이어지는 대표적인 환승역인 신바시는 사무실이 즐비한 지역으로 주변 거리는 늘 샐러리맨들로 흘러넘친다. 그러나 토요일이 되면 이처럼 사뭇 다른 한적한 거리로 뒤바뀌는 것이다.
토요일, 한산한 전철역 붐비는 휴양지
이곳 전철역에서 만난 미혼 직장인 와타베(37)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오늘은 쉬는 날이라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며 “일요일인 내일은 뮤직 라이브공연을 보러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반면 서비스업에 종사해서인지 가메이(30)는 출근길이었다. “대개 토요일에 쉬긴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고 불규칙해요. 쉬는 토요일에는 가끔 여행도 가고 집에서 집안일을 돕기도 하면서 보내죠.” 그는 일요일만 쉬는 것보다 토·일요일 이틀을 한꺼번에 쉬어야 자유롭게 여가도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덧붙였다. 전철역 입구에서 대형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던 미와자키(68)는 사진작가도 임금노동자도 아닌 자동차수리업을 하는 자영업자였다. “사진촬영이 취미인데 오늘 친구하고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 우리 가게는 종업원이 3명인데 격주로 토요일에 쉬게 하고 있습니다.” 신바시역에서 30분 남짓 전철을 타고 도쿄비치로 불리는 오다이바 해병공원으로 향했다. 지상 10여m 위에 설치된 모노레일인 유리카모메 전철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고층빌딩 사무실도 죄다 텅 비어 고즈넉하기조차 했다. 전철에서 내린 오다이바 공원은 오전 10시를 넘기면서 가족단위 나들이객으로 붐볐다. 신주쿠나 하라주쿠 거리가 소비와 패션의 거리라면 오다이바는 곁에 바다를 낀 한적한 휴양지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가 벤치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이 나란히 앉아 느긋한 휴일 한때를 보내고 있었고 산책나온 사람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공원 주변에는 아쿠아시티 등 대형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고 큰 길 하나 건너편에 있는 후지텔레비전방송사 입구는 공개방송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쇼핑몰 앞에서 만난 제조업노동자 스치아(37)는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사이타마현에서 왔다는 그는 “대개 휴일은 오늘처럼 가족과 함께 쇼핑을 하며 보낸다”며 “주말에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은 1년에 한두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가끔 상쾌한 바닷바람이 한줄기씩 스쳐갔다. 요코하마에서 차를 몰고 왔다는 정보기술(IT)분야 노동자 인도(45) 역시 “주말은 주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보낸다”고 했다. 오다이바 공원에서 만난 노동자들에게서 ‘일중독’으로 불렸던 일본 노동자들의 팍팍하고 고달픈 얼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꾸물꾸물한 게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한 날씨가 햇빛이 반짝, 나면서 어느새 갠 오다이바는 신바시 전철역에 이어 일본의 토요일은 ‘휴일’이란 사실을 산뜻한 인상으로 일깨워주었다.
내부 지향적 여가 경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동자처럼 피로에 몸과 마음이 지쳐 일요일을 대부분 ‘잠으로 때우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주말 이틀 휴일을 나름대로 계획하고 자신에게 맞는 다양한 여가활동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여가개발센터는 이를 “노동자들이 자유시간을 스스로 디자인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요약했다. 이런 경향은 여가시간을 학습, 건강 등 자신을 갈고 닦는 데 쓰는 것 외에 이른바 ‘사회성 여가’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사회성 여가는 지역사회활동이나 장애인 보조, 자원재활용운동 참여 등으로 나타난다. 여가시간 확대가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높이고 있는 셈이다. 이날 오후, 도쿄 시내 시부야의 센다가야 전철역에서 내린 뒤 한참을 걸어 찾아간 ‘키즈’(KIDS)의 조그마한 사무실은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키즈는 정신지체아나 고아 등을 보살펴주는 직장인 자원봉사단체로 3천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키즈의 야마모토(41) 부대표는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토·일요일 휴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도쿄 디즈니랜드나 캠프를 간다”며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직장인 봉사단체”라고 말했다. 오늘 같은 휴일을 가족과 보내지 않고 왜 자원봉사활동을 하느냐고 묻자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가족 모두 전혀 불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불우한 아이들을 데리고 도쿄 디즈니랜드에 구경갈 때는 우리 아이들도 함께 데리고 갑니다.” 물론 일본 노동자들의 이런 활동은 주5일근무에 따라 여가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에 가능하다. 노동에 찌든 삶이라면 이렇듯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야마모토 부대표는 “직접 사무실에 나오지 않더라도 집에서 키즈 회계장부를 작성하거나 연락문을 만들어 띄우는 회원이 있는 등 누구든지 자유롭게 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기업들도 노동자들의 여가시간 확대 요구를 점차 수용하고 있는 추세다. 대표적인 게 최근 늘고 있는 ‘재충전 휴가’와 ‘자원봉사활동 휴가’라는 새로운 휴가시스템이다. 일종의 안식년 휴가인 재충전 휴가는 각종 휴가제도를 도입한 기업 가운데 67%가, 자원봉사활동 휴가(사회복지활동이나 NGO활동 참가 등)는 28.2%가 실시하고 있다. 자원봉사활동 휴가는 최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이슈로 부각되면서 늘어나고 있고 자녀양육 휴가나 노동자 개개인에게 주는 특별 기념·축하휴가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을 위한 여가라고 여기든 ‘여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든 문제는 여가시간을 그저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누릴 수 있느냐는 여부다. 물론 적극적인 활동형 여가만을 바람직한 여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본에서 90년대에 침체된 자동차 수요를 부양시킨 건 레저용차량이었다. 이는 여가시간이 늘면서 오토캠프시장이 확대된 결과다.
자원봉사활동 크게 늘어
오토캠프를 비롯해 일본 노동자들의 여가문화에서 급속히 늘고 있는 게 여행, 스포츠 등 이른바 ‘체험형 여가’다. 일본의 거대 광고회사인 덴츠에는 ‘샐러리맨전복대’라는 동호인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은 토·일요일에 강을 탐험하면서 래프팅을 즐기는 모임으로, 대장인 덴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혼다(48) 부장을 비롯해 이 회사의 직원 20여명으로 꾸려졌다. 흥미로운 건 “우리는 일본에서 가장 과격하고 제일 실력없는 카누팀”이라는 전복대 선언이다. 선언은 “전복대는 모두 강이나 하천, 카누를 사랑하는 샐러리맨으로서 급류를 가진 거친 하천을 좋아하는 독특한 사람들이며 모닥불과 맥주를 좋아한다”는 말로 이어진다. 도쿄 시내 쓰키지라는 지역에 서너개의 대형 사옥이 ‘덴츠콤플렉스’를 구성하고 있는 덴츠에는 이 모임말고도 주5일근무제 실시 이후 숱한 동호인 모임이 구성되었다. 덴츠의 홍보실 직원 이시하라는 “회사 안에 1천여개가 넘는 동호인 모임이 결성돼 있어서 누가 샐러리맨전복대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데만도 하루 이틀이 걸린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주5일근무제는 특히 일과 자녀양육을 함께해야 하는 일본 여성노동자들이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신바시 전철역에서 만난 사무직노동자 아베(35)는 “이번 토요일에는 맞벌이하는 아내가 친구와 놀러가기 때문에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 30대 직장여성도 “남편이 쉬는 이틀간 가정일을 많이 도와준다”며 “나는 이번주 토요일에 회사가 바빠서 일을 나가야 하지만 남편은 쉬기 때문에 아이를 보는 부담이 덜한 편”이라며 웃어보였다. 물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주5일근무제 도입 이후 작업장의 노동강도가 높아졌다고 느끼고 있다. 사용자쪽도 이를 인정한다. 일본경영자단체연맹의 마쓰이 차장은 “노동시간단축 이후 기업마다 업적주의를 도입해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고 제품을 만드는 데 걸리는 표준시간도 단축했다”며 “1인당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으면 노동시간단축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노동강도 강화의 문제도
그러나 이런 노동강도 강화에도 불구하고 여가시간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일본 여가개발센터가 최근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과 여가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은 결과 여가중시파가 34.5%, 일중시파가 33.4%였다. 특히 여가중시파는 지난 90년(31.9%)이래 해마다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 ‘회사인간’, ‘경제동물’로 불렸던 일본 노동자들도 일에 찌들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더 많은 여가시간’을 원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마스모토 부소장은 “쉰다는 것을 죄악시하던 일본 노동자들의 의식이 노동시간단축 이후 크게 바뀌었다”며 “이제 일본 노동자들도 인생의 풍요를 일보다는 여유있는 삶에서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
도쿄=글·사진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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