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섹션 : 커버스토리 | 등록 2001.09.18(화) 제377호 |
|
[표지이야기] ‘적’들을 키운 ‘나 홀로 제국’ 증오의 화염이 미국에 치솟은 까닭은… 힘에 바탕한 독선적 외교로 반미 노골화
부시 정권이 출범 이후 고수하고 있는 초강경 외교노선 때문에 언제, 어느 지역이든 긴장과 충돌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반미감정이 감정에 머물지 않고 언젠가 행동으로 옮겨져 대규모 테러를 유발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이 미국에 대한 사상 유례없는 참담한 테러를 불러왔을까. 테러범들은 지난 9월11일 미국의 번영과 막강 군사력을 상징하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펜타곤(국방부)에 각각 초유의 테러를 감행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에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밝은 자유와 기회의 빛이기 때문에 공격의 목표가 됐다”고 말했다. 사실 이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맘껏 누려왔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국내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도 미 국민들은 넘치는 풍요와 자유를 그 어느 때보다 만끽했다. 막대한 재정흑자를 넘겨받은 부시 행정부는 감세정책 등을 통해 국민들의 소비를 더욱 부추키면서 선심쓰기에 바빴다.
부시의 자국 이기주의에 동맹국도 반발
막상 냉전은 막을 내렸지만 미국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더 국방력을 살찌울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경쟁국들이 멈칫하고 있을 때 아예 저 멀찌감치 앞서 달려가 세계패권을 영구화해보자는 속셈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의 이런 독주는 오만하게 비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도 취임 초기에는 주변국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듯 대내외정책 집행에서의 ‘겸손’과 ‘온정적 보수’를 눈에 띄게 강조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그의 이런 다짐이 실천으로 옮겨졌다고 믿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사일방어(MD) 추진 등 외교안보정책에서만 일방통행을 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밀어붙이기식의 자유무역 등을 핵심으로 한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세계화정책을 강행했다. 그래서 동맹국들조차 크게 반발했다. 이런 정책 모두가 미국과 미국 국민의 이익 보호와 확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의구심에서다. 반미감정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반MD와 반세계화 시위가 단순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도높은 폭력으로 비화될 정도로 반미감정은 갈수록 격화돼왔다. 반미테러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돼왔다는 의미다. 부시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실행에 옮긴 첫 중동정책은 전세계가 경악했던 ‘이라크 공습’이라는 군사행동으로 나타났다. 중동 나라들의 맘이 편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친이스라엘정책은 노골화되고, 이라크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도 지속되면서 이들 나라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미국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국무부, 미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 등에 소수정예요원으로 채워진 반테러전담반을 꾸려놓는 등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세워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 본토에 대한 대규모 테러공격 가능성을 점치면서도 이처럼 빠른 시기에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한 듯하다. 미 국방부의 요청으로 게리 하트 전 민주당 상원의원과 게리(워런??) 루드먼 공화당 의원이 중심이 돼 지난 2년간 미국의 국가안전장치에 대한 초당적 연구가 행해졌다. 그 결과로 지난 2월에 나온 것이 ‘국가안보를 위한 청사진: 변화를 위한 당위’라는 제목의 보고서이다. 국제 테러리즘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 보고서는 “미국 시민과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다음 4반세기(25년) 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미국의 변방도 아닌 심장부 워싱턴과 뉴욕이 처참하게 테러당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내로라 하는 정보기관에서도 테러범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클린턴과 달리 중동분쟁 ‘나 몰라라’
테러범들이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던지는 극단적인 테러를 감행한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번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미국 정부와 언론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과격 테러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을 유력한 혐의자로 꼽고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번 테러의 동기는 미국의 친이스라엘 중동정책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높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회교원리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그는 “미국 시민과 군인을 포함한 미국인들과 그들 동맹자를 죽이는 것이 회교도의 의무”라고까지 강조하면서 미국에 대한 공공연한 테러를 장담해왔다. 미국 워싱턴의 외교정책전문 싱크탱크인 IPS(Institute for Policy Studies)에서는 “미국의 친이스라엘정책은 테러리즘 인큐베이터나 다름없었다”고 규정했다. 사실 부시 행정부는 애초부터 중동정책에 거의 눈길을 두지 않았다. 클린턴 전 행정부와의 정책 차별성을 유난히 강조해온 부시 행정부는 대중동정책과 관련해 일찌감치 불개입정책을 천명했다. 리처드 바우처 미 백악관 대변인은 올 2월 초 “클린턴 대통령이 재직중 중동평화협상을 위해 내놓았던 중재안 등 협상기초들은 더이상 현 행정부의 제안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분쟁지역에의 무분별한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신고립주의’를 선언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에서 승리하고도 재선에서 실패한 아버지 부시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선택적 개입을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대신 그는 대기업이나 중산층, 백인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감세, 교육, 사회보장제도 분야 등에서의 재선 전략구상과 MD를 뼈대로 한 국방 예산확보에 힘을 쏟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유혈충돌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면서 마냥 지켜볼 수만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주변국들의 중재요청이 쇄도함에 따라 출범 4개월이 지난 5월21일쯤에서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중동개입을 공식 선언하게 된다. 그는 윌리엄 번스 요르단 대사를 중동특사로 임명하고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중동평화안 도출을 위해 만들어진 ‘미첼위원회’를 재가동시켰다. 하지만 중동 평화정착을 위해 조바심을 내고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중재에 나섰던 클린턴 행정부와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을 보였다. 여전히 해법이 안 보이는 중동사태에 무조건으로 몸을 던지지는 않겠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이런 어정쩡한 개입은 유혈충돌을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 특히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팔레스타인 과격인사만을 겨냥해 죽여버리는 이스라엘의 ‘표적암살’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으나 미국은 애써 입을 다물어왔다. 최근 들어서 이스라엘이 탱크를 앞세워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정착촌을 강제점거했을 때도 미국은 비난성명을 내기는 했으나 미온적이었다.
이스라엘 챙기려고 ‘외교적 무례’도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여전히 확고하다. 미국 내 약 600만명의 유대인이 정·관·재계뿐 아니라 언론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부시 행정부 고위관리의 9%가 유대인이며,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가장 공신력 있는 신문으로 인정받는 <뉴욕타임스>의 사주와 상당수 기자들도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고 있을 정도다.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이 비유대계의 적지 않은 반발을 감수하면서 유대계인 요셉 리버만 상원의원을 부통령에 지명한 것도 유대계의 영향력과 표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미국과 이스라엘간의 ‘특별한 관계’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동의 석유자원을 보호하고 미국이 직접 나설 수 없는 ‘더러운 일’을 도맡아 수행해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두 나라간 군사협력은 그 어느 나라들보다 돈독하다. 이 협력은 두 갈래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경제지원기금(ESF)과 외국군사원조기금(FMF)을 지원하고 있다. 이중 FMF는 미국의 군사장비 구입과 서비스, 훈련제공을 받는 데 필요한 기금으로 올 한해에만 10억9천만달러가 이스라엘에 제공된다. 이 기금은 해마다 6천만달러씩 추가로 늘어나 2008년까지 이스라엘에 건네진다. 시카고대학에서 중동학을 전공한 요셉 야클리는 외교안보정책 전문기관지인
미국의 친이스라엘정책이 최근 노골적이면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때는 지난 8월3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였다. 각종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18년 만에 열린 이 회의에서 참가국들이 이스라엘을 인종차별국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채택하려는 것에 항의, 미국은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세계각국은 미국의 이런 태도가 또다른 ‘외교적 무례’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중동쪽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은 물론이다. 이번 동시다발 테러는 그 치밀성이나 담대함으로 봐서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라는 게 미 정보기관의 평가다. 전문가들은 테러집단들이 거사 시기를 9월11일로 정해 하필이면 부시 행정부에 타격을 주려 한 것은 미국의 이런 일련의 중동정책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세계지배 영구화에 맞선 도처의 충돌 가능성
미국과 관련된 긴장과 갈등의 불씨는 중동지역에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외교정책전문 싱크탱크인 랜돌프보른연구소의 저스틴 레이먼드 연구원은 “모든 정책집행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라면서 “미국이 국제적인 골목대장처럼 계속해서 처신하는 한 더 많은 테러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미군은 전세계 141개국에 25만명이 파견돼 있다”면서 “그들은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기보다는 우리가 뉴욕과 워싱턴에서 본 것과 같은 테러를 유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사실 부시 대통령의 저돌성과 부시 정권의 ‘힘을 바탕으로 한 평화유지’세계전략을 뜯어보면 누구를 위한 평화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 적지 않다. 부시 정권이 출범 이후 고수하고 있는 초강경 외교노선 때문에 언제, 어느 지역이든 긴장과 충돌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부시 정부의 세계전략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클린턴 때보다 더 강화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세계지배를 영구화하겠다는 것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운 것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MD 구축이다. 부시 대통령이 철저한 냉전의 전사이면서 아버지 부시의 정치적 경쟁자이기도 했던 노장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굳이 중용한 것도 그가 가진 MD 구축에 대한 철인 같은 신념과 노하우를 높게 샀기 때문이다. 우주에 미사일탐지위성을 띄워 적의 미사일을 탐지한 뒤 이를 지상과 해상, 우주에서 발사되는 요격미사일로 맞춰 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공중에서 폭발시킨다는 것이 MD의 골자다.
이 계획은 부시 행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미군의 첨단화·현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미군을 소수 정예화해 정보전 및 우주전에 대비하고, 이란·이라크·북한 등 이른바 ‘불량국가’의 도전과 확산을 억제하며, 중국의 도전 등에 대한 충분한 방위력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물론 부시 행정부의 이런 계획이 순조롭게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찬성하고 있는 나라들을 손꼽을 정도다. 내부의 반발도 거세다. 민주당 소속의 조셉 바이든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위원장은 틈만 나면 MD체제는 지난 40년간의 군비축소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으며, 동맹국과의 관계를 해치는 것은 물론 이론적인 확신만으로 천문학적 비용을 써가면서 MD에 국가안보를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겸손함 실천해야 재앙의 불씨 사라져
지금도 부시 정권에 종종 외교안보분야 조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브레진스키가 얼마 전 펴낸 책 <거대한 체스판>부제: 21세기 세계전략과 유라시아)에서는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유럽의 정치적 통합이 반미적 성격으로 바뀌고,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슬람 진영이 연대해 미국을 견제하며, 중국과 일본이 반미적 아시아주의에 기울 가능성.” 반미감정은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언젠가는 행동으로 옮겨져 대규모 테러로 변질돼왔다는 점에서 미국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부시 정부가 이번 테러사건과 같은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애초 강조한 ‘겸손한’ 대외정책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