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1년09월18일 제377호 

흙먼지 뚫고 성조기 앞으로!

애국열풍 몰아치는 대참사 이후의 뉴욕… 입대 희망자 늘고 ‘제2의 테러’ 경계

‘화요일의 대참사’를 겪고난 뉴욕의 거리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성조기를 길에서 파는 노점상들이 부쩍 늘어났고, 성조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도 전에 없던 현상이다. 이른바 미국적 애국주의의 바람이 새삼스레 불고 있다.


사진/ 뉴욕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들은 미국기 일색이다. 이번에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입주사의 하나인 나스닥 전광판도 미국기로 바뀌었다.


뉴욕은 거대도시다. 그러나 맨해튼을 빼고 뉴욕을 말할 수는 없다. 허드슨강을 끼고 고구마처럼 길게 뻗은 맨해튼은 뉴욕 중심부다. 그중 맨해튼 남부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주요한 뼈대를 이루는 곳이다. 우리에게 이름이 익숙한 월가(街)의 증권거래소를 비롯한 주요 금융기관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있는 세계무역센터가 테러공격으로 쑥밭이 됐다. 건물들이 무너지면서 흩날린 먼지가 하얗게 길을 덮었다. 먼지들은 7km쯤 떨어진 맨해튼 중부지역 필자의 집까지 날아와 코를 자극했다. 그래서 어떤 성급한 미국 칼럼니스트는 이번 테러공격을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뉴욕만큼은 전쟁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여겨온 뉴요커(New Yorker)들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참사가 일어나던 날, 집 근처 슈퍼마켓은 손님들로 북새통이었다. 휴지, 물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쓸 통조림 같은 것들을 저마다 수북이 수레에 싣고 있었다. 여기저기 선반이 텅 비었다. 한마디로 싹쓸이 쇼핑이었다. 맨해튼 안 한인타운에 자리한 한국식품가게의 쌀도 거의 동이 났다.

싹쓸이 쇼핑 행렬… 실종자 확인 북새통


사진/ 한 구조대원이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채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GAMMA)


이번 ‘화요일의 대참사’는 세계적인 거대도시 뉴욕에 길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맨해튼 시내 지하철 입구나 버스정류장 곳곳에는 실종자를 찾는 벽보들이 나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저 어림잡아 짐작할 뿐이다. 사건 이틀 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지금까지 실종된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4763명”이라고 밝혔다. 1만명가량 숨졌을 것이란 처음의 추정치에서 절반이 내려갔다. 이 숫자에는 무역센터에 충돌한 두대의 여객기에 탑승했던 221명과 순직한 경찰, 소방대원 350여명이 포함돼 있다. 여기에다 워싱턴 국방부 청사 희생자 190여명(여객기 탑승자 64명, 청사 근무자 130여명)을 합치면 5천여명이 이번 참사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무너진 두 빌딩의 잔해 속에는 수천명이 매몰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지금 뉴욕시는 병원마다 실종자 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느라 북새통이다. 사망자들의 주검이 안치됐거나 부상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맨해튼 세인트빈센트·뉴욕대학(NYU) 등 대형병원에는 실종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세인트빈센트병원의 의사 제임스 딜러드는 “지금껏 실종으로 신고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곳에서 생존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실종자가 곧 사망자로 밝혀질 것이다. 우리 한인들도 피해자다. 참사사건 직후 뉴욕 총영사관에 실종신고된 한인은 55명에 이르렀으나 13일 오후 12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영사관에 접수되지 않은 실종자들이 여럿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생존자 정보를 제공하는 한 웹사이트(wtc.ny.com)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름이 100명쯤 올라 있다.

뉴욕시청에서 마련한 실종자 신고센터에 가보니, 푸석한 얼굴들을 한 실종자 가족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신고센터에는 찾는 이의 인적사항을 적어내는 7쪽짜리 서류가 준비돼 있다. 여기에다 실종자의 사진을 붙이고 나이와 이름은 물론 피부색깔, 심지어 손톱에 어떤 색깔의 치장을 했는지, 틀니를 하고 있었는지 따위를 적어낸다. 많은 희생자들은 나중에 DNA 검사를 해야 할 상황이다. 폭발과 붕괴의 충격으로 주검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국에선 DNA 검사를 위해 실종자가 집에서 쓰던 칫솔을 들고 오도록 한다.

참사 이틀 뒤인 13일 밤부터 뉴욕에는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렸다. 그 비는 다음날 오전까지 이어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구조작업은 더 더뎌졌다. 그러나 매몰된 채 살아 있을 일부 생존자들에겐 생명의 단비일지도 모른다. 참사현장 처리는 천천히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크레인을 동원할 경우 깔린 채 구조되기만을 기다리는 생존자를 다치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발생 다음날 5명의 소방관을 매몰현장에서 구출해낸 뒤 지금껏 추가로 발견한 생존자는 없다.

‘화요일의 대참사’를 겪고난 뉴욕의 거리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성조기를 길에서 파는 노점상들이 부쩍 늘어났고, 성조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도 전에 없던 현상이다. 이른바 미국적 애국주의의 바람이 새삼스레 불고 있다. 대형 종합소매점 가운데 하나인 월마트의 한 지배인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성조기를 찾는 바람에 추가주문을 해놓은 상태”라고 귀띔한다. 참사현장에서 4km쯤 떨어진 타임스 스퀘어 광장 한쪽 벽면을 비롯, 맨해튼 시내 곳곳에 대형 성조기가 내걸려 있다. 평소 흥겨운 라틴음악을 즐겨 틀던 전파상들도 이즈음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미국가를 되풀이해서 튼다.

이같은 ‘애국열풍’을 <CNN>이나 <ABC> 같은 미국 언론매체들이 부추기는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타블로이드판 신문인 <뉴욕 포스트>는 14일치 표지에 소방관들이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에서 찾아낸 먼지투성이의 성조기를 매다는 장면을 겉표지로 내보냈다. 뉴욕시립대학원의 하워드 렌트너 교수(정치학)는 “외부의 공격으로 미국민이 많이 다치면 늘 이런 애국열풍이 자연스레 불었다”면서 언론이 부추기는 측면을 부인했다. 걸프전 때도 이런 성조기 바람이 불었다.

입대 희망자들도 급속히 늘어난다는 소식이다. 베트남전 당시 논란을 빚었던 병역의무를 요즘 미국 젊은이들은 지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군은 늘 부족한 지원자들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군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일정기간 복무하면 대학 교육기회도 준다. 맨해튼 중심가인 타임스 스퀘어역에 나가보면, 입대를 권하는 군 요원들이 지나는 젊은이들을 불러세워 군 입대를 권하는 게 흔히 눈에 띄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전역에 걸쳐 군 모병소에 입대 희망자들의 문의전화나 직접 방문이 크게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뉴욕주 미 육군 모병소는 테러 발생 당일인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입대 상담이 보통 때보다 서너배나 늘어났다고 밝혔다.

테러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뉴욕은 테러 신드롬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이다. 테러사건 뒤 뉴욕 곳곳에서 폭발물 장치를 비롯한 제2의 테러위협이 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그러나 모두가 공포심에서 생긴 과잉반응이었다. 뉴욕 맨해튼 중앙역에서 13일 폭발물 소동이 벌어져 열차를 이용하던 시민 수천명이 역 밖으로 대피했던 것도 그 한 보기다. 12일 밤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도 폭발물이 장치됐다는 제보에 경찰이 입주자들을 긴급 대피시키기도 했다. “이 빌딩이 제2의 목표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빌딩 관리직원의 말은 뉴욕 시민들이 지닌 심리적 불안을 보여준다.

존 에프 케네디, 라구아디아, 뉴아크 등 뉴욕의 3개 공항들은 테러사건 뒤 이틀 만인 13일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랍계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이 제2의 테러를 꾀할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에 케네디, 라구아디아 두 공항에서 모두 10명의 엉뚱한 용의자를 붙잡고 공항을 다시 폐쇄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아랍계 얼굴을 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대형참사가 일어난 까닭에 일부 아랍계 미국인들은 몸조심을 해야 하는 처지다. 일부 회교사원 근처에서 아랍계 미국인들이 학대당했다는 보도가 들려온다. 아랍계나 회교도들에게 적개심을 보이지 말자고 부시 대통령조차 한마디했을 정도니,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게 사실이다. 현재 미국에는 아랍계가 300만명에 이른다. 미국 내 유대인(600만명)의 절반 규모다. 뉴욕의 아랍계 미국인들은 상당수가 하층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회교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하루하루 생존이 급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엉뚱한 적개심 표출… 그래도 새날은 온다


사진/ 폭발과 붕괴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며…. 뉴욕 거리의 가로등 아래 추모 촛불이 놓여 있다.


팔레스타인지역에서 테러참사 직후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비쳐진 게 탈이라면 탈이다. 그런 모습이 미국인들의 불편한 정서에 불을 질렀을 법하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미국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한 것이 뉴욕 시민들에게 감동을 준 것 같지는 않다. 필자의 한 유대인 친구는 ‘속임수’라고 몰아붙인다. 뉴욕의 회교지도자들은 텔레비전에 출연하거나, 신문 칼럼을 통해 “비무장 시민을 죽이는 것은 회교율법에 없다”며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래도 신문판매대에서 일하는 한 아랍인이 일단의 젊은이들에게 봉변을 당했다거나, 한 아랍인 주방장이 협박전화를 받았다는 토막소식들이 들려온다. 한 유대인은 “‘복수’(revenge)보다 순한 뜻을 지닌 ‘보복’(retaliation)을 적지 않은 이들이 원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뉴욕 경찰은 극우파 테러분자들의 보복공격을 막기 위해 아랍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상가 주변에서 비상근무를 하고 있다.

세계무역센터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임시수용소 또는 호텔방 신세를 지고 있다. 건물이 추가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시다발테러가 던져준 초기의 충격은 많이 가라앉은 듯하다. 가장 번화가인 타임스 스퀘어의 밤거리는 다시 많은 인파와 화려함으로 채워지고 있다.

뉴욕=글·사진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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