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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임을 너무 몰랐다” 낙태를 죄악시하면서도 낙태를 권하는 사회… 여성에게 자기 몸을 다스릴 권리를
‘낙태 불법’조항은 사실상 사문화
2년 전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낙태시술을 받았던 직장인 임아무개(30·대전시 유성구)씨의 경험담이다. 신혼 초였던 임씨 부부는 사정상 아이 낳기를 미루고 있었다. 피임에 실패했다는 예감이 들었으나 별다른 조처를 취할 수 없었다. 임신사실을 확인한 뒤 초기에는 흡입술로 간단하게 시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병원을 찾았을 뿐, 그 밖의 정보는 없었다. 수술 뒤 우연히 동료와 이야기하던 도중 대부분 국부마취 끝에 신체적 고통없이 수술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은 마취에 실패한 경우였던 것이다.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수술 전 “모든 책임을 환자가 진다”는 서약서까지 쓴 상태가 아닌가. 낙태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 외에도 임씨는 신체적 부작용을 크게 느낀다. 이유없이 살이 찌고, 몸이 잘 붓고, 체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임씨는 그뒤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이미 서구에서는 임신한 지 2∼3달 사이에는 먹는 낙태약으로 수술을 대신하는 게 보편화돼 있고, 응급피임약도 상용화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기 때문이다. 임씨는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생활도 열심히 했는데, 피임이나 수술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고, 나아가 안전하게 수술받을 기회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피임 실패부터 수술과정까지 내 몸에 대해 나는 철저히 무력했다. 배신감 끝에 모멸감까지 느낀다.” 낙태는 현실이다.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모자보건법과 형법의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돼 있다. 정확한 통계로 잡히지는 않으나 전문가들은 낙태가 한해 150만건 이상 된다고 본다. 그들 중 70%는 기혼자이고, 전체 낙태경험여성의 20%는 직간접적인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번 응급피임약 논란을 둘러싸고 상당수 낙태경험여성들은 “당연히 들어올 게 오는 건데 터무니없는 논쟁이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임씨는 “생명권이니, 성문란이니 하는 논쟁 자체가 대체 누굴 위한 논쟁인지 답답하고 화가 난다”고 말한다. 서구에서도 응급피임약, 나아가 먹는 낙태약이 보편화된 것은 불과 4∼5년 전부터다. 하지만 그 전부터 사회적 논란과 합의의 과정을 엎치락뒤치락 겪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창하는 이들이 종교계와 사회통념, 법을 상대로 꾸준히 목소리를 낸 덕분이다. 그런 가운데 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응급피임약을 두고 겪는 혼란과 불화는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대뜸 “시판이냐, 아니냐”의 결정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피임 논쟁이 없었던 이유
최근 출간된 <20세기 여성 사건사>(여성신문사 펴냄)에서 우리나라 가족계획 역사를 쓴 소현숙(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씨는 “근대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출산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피임을 둘러싼 논쟁이 없었던 것은 정작 논쟁이 시작됐어야 할 시기에 박정희 정권이 노동력 관리를 위해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국가시책으로 피임을 장려하며 여성의 출산권을 통제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한국여성연구소 배은정 연구원(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은 “50년대 잡지들을 보면 ‘남편 모르게 피임하는 법’ 등 각종 피임정보가 꽤 많이 등장한다”며 “가족계획 이전부터 여성의 피임에 대한 욕망은 무척 높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런 가운데 피임의 책임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짐지워져 있었다. 오랫동안 ‘아랫도리 영역’에서 은폐돼 있던 피임은 국가주도의 가족계획에 내몰려 웬만한 집에서 피임약이 굴러다니고 아이들이 콘돔으로 풍선을 불며 놀 정도로 갑자기 햇빛 아래 노출된다. 배 연구원은 “이런 아찔한 속도감에 급속한 의료기술 도입으로 꾸준히 논쟁이 이뤄졌어야 할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와 피임법의 안전성 여부, 임상실험 필요성 등이 파묻혀버렸다”고 말한다. 이번 응급피임약 논란도 사실 진작에 불꽃이 댕겨졌어야 한다. 1998년부터 2년간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대한가협)에서 전국의 12개 모자보건센터를 중심으로 응급피임약 시범사업을 시행하기도 했다. 사업결과가 보건복지부에 보고됐으나 보건복지부는 현재까지 뚜렷한 해명없이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상황이다. 보건복지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 사업을 시작할 때도 생명경시 풍조라고 한참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데다 프로젝트가 실제 성폭행피해자나 전염병감염자 등 위기상황에 놓인 여성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에게도 이뤄졌기 때문에 공개를 꺼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성교육·성상담단체의 현장활동가들은 응급피임약 도입에 대해 ‘접근권’과 ‘선택권’을 강조하는 쪽이다.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 상담소 권수현 부장은 “일단 내부 의견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라 개인적인 견해만을 밝히면, 응급피임약 역시 다양한 피임가능성의 하나로 열어두고 오남용에 따른 부작용 등 정확한 정보를 공개한 뒤 여성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낙태의 원인이 대부분 피임실패이므로 낙태보다 훨씬 여성의 몸에 끼치는 위험이 덜한 응급피임약을 택하는 것이 여성의 건강권을 지키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생명경시냐 여아경시냐
많은 이들에게 결혼은 이제 필수가 아니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서른살 여성의 미혼율은 1975년 4.2%에서 1995년 9.7%로 높아졌고, 서른다섯살 여성의 미혼율은 20년 사이에 1.0%에서 3.9%로 네배나 증가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혼여성 가운데 반드시 자녀를 가져야 한다고 대답한 이들은 1991년에 90.3%이었으나 1997년은 73.7%로 떨어졌고, 2000년에는 58.1%로 급격히 낮아졌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또 연령이 젊을수록 이런 경향이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전 인구의 성생활과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피임에 대한 사회적 의제 설정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이다. 청소년문제에 온갖 관심과 호들갑이 쏠리면서 정작 사회문화적 맥락의 성교육, 피임교육이 절실한 성인들은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그 단적인 결과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성비불균형과 여아낙태율이다. 1998년을 기준으로 여아 100명당 남아 수는 110.2이다. 1995년의 113.2에 비하면 낮아졌으나 아직도 심각한 수준이다. 첫째 자녀는 106.0, 둘째는 108.1, 셋째는 무려 146.0에 달하고, 넷째 이상은 155.2에 이른다. 그 비율의 차이만큼 반복적으로 수많은 여아들이 낙태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낙태반대론자들이 말하는 생명경시풍조는 여아경시풍조라고 정정되는 게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피임을 했으나 실패한 많은 원인에는 남성들의 무책임한 피임행태도 크게 자리잡고 있다. 피임에 대한 무지함도 여기에 한몫한다. 결혼한 지 8년째 접어든 박아무개(38·경기도 용인시)씨는 신혼 첫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낯이 뜨겁다. 그는 그때까지 콘돔사용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내와는 결혼 뒤 1년간은 애를 갖지 말자고 약속한 상황이었다. 누구에게 묻기도 창피해 혼자 사놓고 연습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결국 첫날 관계는 실패로 끝났고, 둘쨋날, 세쨋날에는 부담감 탓에 더 잘 안 되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몇주간 박씨는 계속 아내의 눈치를 보며 몸과 마음이 위축됐다. 박씨는 “나는 비록 제대로 피임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아들에게는 콘돔뿐만 아니라 다양한 피임방법을 일찍부터 가르치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체계적인 성교육의 계기가 돼야
박씨의 경우는 무지함이 무책임함으로 바뀌지 않고 긍정적으로 극복된 케이스이다. 박씨와는 달리 상당수의 남성들은 무지함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무책임함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불완전한 질외사정을 피임방법으로 이해하거나 콘돔을 성관계 시작부터 사용하지 않고 사정 직전에 사용하는 경우들이다. 사정 전 흥분상태에서도 수백만 마리의 정자가 나오기 때문에 콘돔을 성관계 도중 사용할 경우 실패확률이 높다. 특히 이런 경향은 성행동에 비해 성지식과 성의식이 낮은 청소년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해 9월 서울 YMCA 청소년성교육상담실에서 서울시내 남자고등학생 916명을 심층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7.9%가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들 중 피임을 하는 경우는 27.9%에 그쳤고, 사용한 피임방법도 질외사정이 58.1%로 가장 높았다. 응급피임약은 사후피임약이다. 가장 이상적인 피임은 성관계 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커플의 사정에 잘 맞는 사전피임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알약 하나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이 추상적인 찬반논쟁이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성교육의 계기가 돼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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