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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보수, 보수주의자는 없다 한국 지식인 사회의 지형도… 진보주의자는 많되 진보파는 아주 적은 현실
시대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부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은 그리 흔치 않은 존재들이다. 비판적이기 때문에 권력에 저항하는 지식인의 속성상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박해와 추방의 대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씨가 “보수파는 압도하고 있으되 보수주의자는 극히 드물었던 것이고 진보주의자는 많되 진보파는 아주 적다”고 했던 말은 한국 지식인 지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보수성향을 보이는 이는 많아도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없고, 진보주의자는 있어도 진보 성향을 보이는 일반 대중은 적은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80년대 지성계는 좌파의 시대
비록 숫자는 적어도 좌파 지식인들은 80년대 내내 행동력이나 사회비판능력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던 보수적 지식인들을 압도해왔다. 80년대 한국 지성계는 이른바 좌파의 시대였다. 김진균 서울대 교수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 좌파 지식인들은 주요 대학의 교수로서 학문적 영역에서 활발한 사유와 사회비판을 펼쳐왔다. 학생운동권 역시 그 어느 시기보다도 많은 좌파 지식인을 양산했다. 그러나 90년대 접어들면서 동구의 몰락,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군부독재의 퇴진과 부분적 민주화 등의 영향으로 좌파는 상당부분 줄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새롭게 포스트 모더니즘이 한때의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최근 3∼4년 사이 벌어졌다. 자유주의자들이 활발히 지식 논쟁의 전면에 등장했고, 동시에 보수와 진보에 대한 합리적인 논의도 시작됐다. 이는 불과 몇년 사이의 일이지만, 그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엄청난 변화로 지식인 사회를 흔들며 새로운 지형도를 만들고 있다. 6월항쟁을 겪은 87년 이후 좌파 또는 진보적 지식인의 분화와 분열은 대략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정치권, 즉 정부나 정당 같은 제도권으로 진입한 이들, 학술운동과 문화운동에 참여한 이들, 시민운동 등 사회운동에 참여한 그룹, 그리고 문화쪽 담론 소비 현장에 있는 이들, 여전히 좌파를 자임하는 이들과 함께 새로이 목소리를 얻어가고 있는 자유주의적 지식인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고 있는 그룹은 강준만 전북대 교수로 대표되는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는 자유주의자들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학술적인 영역이 아닌 생활과 문화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전형적 학술지의 지면이 아니라 신문과 잡지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는 점이다. 홍세화(칼럼니스트), 고종석(한국일보 편집위원), 유시민(문화방송 시사토론 진행자), 김정란(상지대 교수), 진중권(문화평론가), 김규항(<아웃사이더> 발행인)씨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좌파가 다루던 혁명담론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대성과 관련된 주제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좌파적 지식인들도 여기에 연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안티조선’ 같은 문제에서는 이들이 함께 전선을 이루고 있다.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칭하지는 않지만 역시 비판적이란 점에서 이들과 궤를 같이하는 김상봉, 홍윤기 교수 등도 이들과 비슷한 활동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등장은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냈다. 비판적 자유주의자들의 정반대에 존재하는 비판의 대상인 수구·극우세력들이 이들과의 논쟁을 통해 그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들 극우와 수구 지식인들은 비판적,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사상검증식 공격을 펼치며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지만 비논리적이고 근거가 없는 억지 주장으로 오히려 진보 지식인들의 입지와 선명성을 굳혀주는 계기를 제공해왔다. 특히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 논란은 극우세력의 비판적 지식인 억압이 더이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변화의 순간이었다.
수구 지식계의 세가지 분류
이들 수구 지식계는 일반적으로 세 부류로 분류된다. 첫번째가 국가를 최우선 가치로 부르짖는 국가주의 계열로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나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두번째는 자유지상주의 계열. 소설가 복거일씨와 공병호(전 자유기업원 원장)씨가 대표적인 인물들로 경제와 결부된 문제에서 특히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번째는 전통을 잇고자 하는 보수주의자들로 좌파쪽에서는 진정한 보수가 아니라 수구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이들이다. 소설가 이문열씨와 이인화(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씨, 그리고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 교수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함재봉 교수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극우, 수구쪽 인사들은 대부분 이 세 가지 분류에 모두 해당될 정도로 중첩되는 점이 특징이며 보수주의적 성향이 기본으로 바탕에 깔려있다. 특히 이 세 번째 그룹은 90년대 이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97년 창간한 잡지 <전통과 현대> 동인 그룹인 김병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석근 고려대 인문학부 교수 등이 주요 멤버들인데,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자세로만 일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좌파쪽에서는 이들 극우·수구세력에 대해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이들에게 ‘지식인’이란 호칭과 ‘보수주의자’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고 있다. 이들의 행태와 사고방식이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중권씨는 그 이유에 대해 “보수는 없고 수구 반동적인 인물들이 보수를 가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진정한 보수는 애국적이고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며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극우들은 전혀 보수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없다. 자식들을 군대 보내지 않고 외국으로 보내는 이들이 어찌 애국심이 있으며, 사회복지를 향상시키는 계획이 나오면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공동체정신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저 반동적으로 자기 이익 지키기에만 급급할 뿐이다. 그래서 수구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 지식인 사회의 지형도는 숫자로는 다수이지만 대표하는 지식인은 거의 없는 극우·수구세력이, 숫자는 적어도 다양하게 분화돼 사회비판기능을 수행하는 진보·좌파 지식인들과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 지형을 구분해보면 어떤 지형도가 그려질까. 워낙 빠르게 지식인 지형이 변하고, 또한 한국적 풍토에서 자기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거나 자기의 성향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 지식인 사회의 지형도를 그려보기는 쉽지 않고 그동안 이런 시도도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재일동포 연구자인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가 저서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에서 처음으로 우리 사회 주요지식인 지도(그림 참조)를 발표한 바 있다. 윤 교수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고, 주로 좌파, 또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실제 지식인의 숫자에서는 우파, 보수 지식인들이 훨씬 많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아야 하지만 90년대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의 사상 흐름과 지향점, 그리고 대표적 지식인의 성향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물론 윤 교수의 분류가 자기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당사자들의 이견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세부항목에서의 차이보다는 전반적인 큰 그림에서는 비교적 정확하다는 학계의 평을 받았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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