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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당신은 누구인가! 지식사회의 위기와 지식인 사회의 응전… 밀실에서 나와 담론의 광장에서 토론하자
어떤 위기인가, 누구의 위기인가
지식인의 위기는 지난 90년대 이래 끊임없이가 거론돼온 단골 화두였지만, 최근 그것을 사회적 의제로 증폭시킨 건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7월2일 작가 이문열씨의 칼럼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를 필두로 한 일련의 지식인 기고에 대해 사회적 비난이 물결을 이루자, 지식인사회의 위기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17일부터는 5회에 걸친 ‘위기의 지식인사회’ 시리즈를 통해 지식인의 독립적 발언을 가로막는 ‘비지성적 풍토’를 꾸짖었다. 이진우(계명대), 조규익(숭실대), 정과리(연세대) 교수와 작가 복거일씨의 기고와 정명환 전 서울대 교수와 차인석(서울대)·차하순(서강대) 명예교수 등 학계 원로의 긴급좌담으로 편성된 이 시리즈는 오늘의 지식인사회가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으며, 논의 행태도 폭력성·천박성·폐쇄성에 사로잡혀 있는 등 가히 위기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이진우 교수는 “이성적 지식인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무장한 대중적 지식인만이 판을 친다”며 “지식인들이 선명성 경쟁을 위해 편가르기를 하면 할수록, 그들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공론영역을 파괴함으로써 결국 자기 무덤을 파게 된다”고 개탄했다. 정과리 교수는 “깊은 앎이 배척당하는 가운데… 지식의 쪼가리가 전체적 진실인 양 호도되며, 구체적 검증도 논증도 생략된 채 마구잡이로 사실을 규정하고 단죄하는 사태가 날마다 벌어진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한국의 ‘일급과 일류 지성, 문·사·철의 원로’들이 지적하는 이 위기의 징후에 많은 사람들이 깊게 공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 깊고 넓은 위기 담론에 대해 공감어린 지지보다는 그 배후와 이면의 속내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냉철한 시선이 오히려 더 큰 반향을 얻고 있다. 냉정한 성찰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선일보의 위기 담론은 전체 지식인사회가 아닌 특정 부류 지식인들의 위기감이 짙게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으로 ‘특정 부류’는 한국사회의 주류로 행세해온 보수·우익계열의 지식인들이다. 가령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아예 “지식인사회에 무슨 위기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위기라면 그것은 친조선일보 지식인의 위기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전엔 조선일보라는 거대 언론에서 지식인의 이름을 걸고 발언하면 곧 사회적 진리로 통용됐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지식의 외관에 속지 않는다. 지식인사회 안에서도 공개적인 논박이 이뤄진다. 그게 불편한 거고, 위기로 느껴진 거다.” 최근 <독립적 지성은 존재하는가>(삼인)라는 책을 낸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사회학)도 지금 보수적 지식인들의 위기를 ‘엄살’로 일축한다. “조선일보와 보수적 지식인을 논쟁의 타깃으로 삼는 진보 지식인 진영의 공격적이고 폭로적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을 지식인사회 전체의 위기로 과장하고 엄살을 떠는 것”이며 “구체적인 논거와 제대로 된 연구성과조차 내놓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발언의 독점을 누리던 이들이 그 안온한 독점체제가 깨어지려 하자 위기감에 휩싸였다”는 진단이다.
물론 조선일보에 글을 썼던 지식인들은 이러한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과리 교수는 “내가 기고문을 쓰며 염두에 둔 것은 전반적 지식인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기조가 되면서 지성이 무시되고 전문기능인에 불과한 신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 대접받는 미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지성의 위기의 근간을 이룬다는 주장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내가 진지함 없이 가슴속을 후벼주는 상말과 헛말들이 활개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압도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꼭 진보적 지식인만이 아니라, 보수적 지식인들까지 아우른 것”이라고 했다.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에서 나치 괴벨스를 떠올렸다는 이문열씨와 언론개혁 세력을 ‘악령’으로 몰아친 유석춘 교수 등의 글도 마찬가지로 헛말, 상말의 사례가 될 수 있냐는 물음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 또한 지식인의 발언이 활용되는 사회적 측면을 고려하지 못한 비지식인적 발상이라는 반박을 벗어나진 못한다. 진중권씨는 “정과리 교수의 글이 설령 보편적이고 올바른 소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그런 주장이 지금 시점에서 조선일보라는 지면에 실릴 때 조선일보의 수구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효과를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며 “지식인이 사회적 그물망 속에서의 자기 위치를 보지 못한다는 건 지적 태만의 증거”라고 비판했다. 김동춘 교수도 “자신의 발언이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이용될지를 고려하지 못했다면, 그 지식인은 정말 순진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동원되는 지식인들이 진정 지식인의 위기를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조선일보와 사회를 향해 진보적 이념에 대한 포용을 대놓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 정도의 지적 용기없이 지식인의 위기를 말하는 건 결국 자신들의 위기를 진보지식인의 위기로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식인의 위기는 보수적 지식인이 만들어낸 한낱 ‘허깨비’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바로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우리 지식인사회의 진짜 위기를 배태한 토대라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김동춘 교수는 “진정한 지식인의 위기는 지식사회의 압도적인 우익지배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저쪽은 국가보안법 등 현실적 물리력 위에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침묵의 문화를 강요한다. 차분하고 지성적인 토론을 주장하지만, 극우지배체제 아래에선 지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 그는 “정치적 현실을 뛰어넘는 학문이 나올 수는 없다”며 “조선일보가 그토록 강조하는 지식사회의 위기가 배태된 1차적 배경은 바로 극우적 지식환경”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모든 위기의 원인을 이런 극우적 환경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보수지식인의 위기를 전체 지식인의 위기로 과장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자유로운 지적 토론을 봉쇄하는 극우체제의 토대를 이유로 지적인 게으름을 당연시하는 지식인들의 개별적 실천의 위기도 원인에서 빠질 수 없다. 김 교수는 “한층 치열하게 현실을 사고하고 뛰어넘어야 할 진보적 지식인들마저 현실의 제약 앞에 쉽게 무너지는 것 또한 우려스런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의 나태함을 지식에 대한 극우적 지배의 현실만으로 돌릴 수 없다는 데 지식인사회의 깊은 고민이 있다. 갈수록 심화되는 상업주의, 자본주의의 유혹에 무릎꿇는 지식인의 행태는 지성의 위기를 부르는 또 하나의 사회적 배경이다. “문학에선 상업소설이 압도하고, 학계에선 치열한 지적 토론이 실종됐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 돈이 안 되는 연구엔 관심을 쏟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 이런 상황에서 연구비 지원의 도움없이 노동운동이나 민간인학살 등에 관한 연구를 뚝심있게 밀고나갈 지식인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적 담론의 소통공간을 대규모 언론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도 지식인사회의 독립적 발언을 제약하는 원인의 하나다. 강준만 교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지식인들은 거대 미디어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내몰리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비판적이고 독립적 지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주장한다.(<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 보수·우익지식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좌파·진보적 지식인들마저 “자기들의 공론장을 키우려는 시도가 대실패로 돌아간데다 사회적 여건이 워낙 열악해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의 발언욕구 충족을 위해 이념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거대매체 또는 비대매체에 너무 쉽게 투항해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상업화의 침공 앞에 지식인사회조차 흐물흐물 녹아내리면서 지식의 가치가 새롭게 위계지워지는 현상 또한 두드러지고 있다. 돈으로 바로 바꿀 수 있는 전문지식은 사회적으로 우대되는 반면, 돈과 거리가 먼 보편지식의 추구는 따돌림당한다. 법률과 경영학, 공학이 판치는 반면, 인문학과 순수학문은 위기의 비명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전문가적 지식만으론 사회의 도도한 흐름을 가늠하고 나아갈 바를 일러주는 지식인의 역할을 대체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점 또한 분명해보인다. 최근 김대중 정권의 개혁노선을 비판한 대한변호사협회의 ‘법치주의’ 파문은 전문가들이 지식인 아닌 이익집단으로 공동체의 진로에 개입하고자 할 때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진중권씨는 “변협은 법치가 뭔지, 왜 법치가 아닌지에 대한 분명한 근거도 대지 못한 채, 무조건 개혁을 몰아붙였다”며 “현 정권의 법조개혁에 따라 밥줄의 위협을 느낀 변호사들이 이익집단으로 뭉쳐 정권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것일 뿐 결코 지식인의 발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현기영 이사장(소설가)은 “이른바 법률전문가들이 얼마나 깊숙이 기득권 구조에 빠져 있는가를 말해주는 사례일 뿐”이라며 “사물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과 배후를 들여다봐야 하는 진정한 지식인의 발언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지식인의 위기 징후는 다층적이다. 침묵을 강요하는 지적풍토와 경제성을 지식활동의 제일가는 고려사항으로 삼게끔 하는 상업주의의 지배가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의 진로를 가로막는 배경이 되고 있다. 조선일보가 지적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공격적인 논쟁방식은 오히려 이런 첩첩한 장벽을 깨기 위한 지식사회의 무기인 셈이다. 변협의 법치주의 성명 바로 다음날인 7월25일 나온 문학가들의 언론개혁 촉구선언은 양심적 지식인의 보편적 통찰이 보수파의 지식사회 위기론을 한눈에 꿰뚫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이날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문학인의 견해’라는 성명서에서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자유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족벌언론의 주장을 일축하고 철저하고 공정한 언론사 세무조사를 촉구했다. 또 언론과 사주들이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뼈아픈 반성없이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편견에 사로잡혀 왜곡된 사고의 지식인들을 동원해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며 지식사회 내부를 향해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현기영 이사장은 “언론과 문학이 맺어온 특별한 관계에 비추어 고민스러웠지만, 지식인적 양심에서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홍위병, 악령 등으로 비열한 선동을 퍼붓는 수구언론과 극우지식인들의 발언을 철저히 규명하지 않고 현 시기를 미봉하면, 한 세대 뒤 이 시기는 야만의 시대, 무지의 시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인들마저 본격적으로 논란에 개입한 것은 바야흐로 은인자중하던 지식인들의 발언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다. 문인에 이어 대표적인 지식인집단인 교수들도 동참을 선언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공동회장 김윤자 한신대 교수)는 7월30일 ‘<조선일보> 구독거부와 언론개혁 촉구선언 기자회견’을 열어 안티조선·언론개혁운동에 나선 것이다. 지식인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지식인사회의 응전이 본격화한 것이자, 보수적 지식인들과 수구언론에 의한 담론의 독점구조가 깨어지고 백가쟁명의 광장이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 수 없다. 김동춘 교수는 “지식인의 위기는 무엇보다 자유롭고 정상적인 담론규칙의 붕괴로 귀결돼왔다”며 “이제 그 담론의 질서를 재구축하기 위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과 대중의 반응을 두려워말자”
그리고 공정한 담론의 규칙은 지식인들이 모두 동등한 조건으로 지적 토론의 광장에 나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나는 극우다 또는 보수다, 자유주의다, 좌파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뚜렷이 하고, 그에 따른 일관된 정책대안을 두고 토론해야 한다. 이럴 때라야 보수와 우익은 색깔론의 장막 뒤에서 누려온 독점의 기득권을 포기하게 되고, 진보와 좌파 역시 침묵의 구조를 핑계로 안주해온 지적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 교수는 “그 시작은 결국 지식인의 커밍아웃”이라고 짚어냈다. 나아가 지식인만의 밀실이 아닌 사회의 모든 성원들에게 열린 담론의 광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진중권씨는 “인터넷과 대중의 반응을 두려워 말자”고 말한다. “그곳이야말로 발언의 적확성이 바로 바로 검증되는 지적 광장이 아닌가. 대중의 무책임성과 마구잡이 공격을 탓하지 말라. 그런 담론의 규칙과 모범을 세우고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책무가 아닌가.” 지식인의 위기야말로 자유로운 담론의 광장을 열고 사회적 공론을 세워갈 기회로 다가온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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