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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과 함께 스크럼을 짰지만… 족벌신문 기자들의 영원한 숙제이자 딜레마, 사주를 보위할 것이냐 청산할 것이냐
2001년 여름, 두개의 언론자유
“아무도 외부인에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신문사 내부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사주에게 비판적인 몇 안 되는 기자들조차 대단히 격앙돼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동료들이 무더기로 해고되던 75년과 80년에도 그렇지는 않았다. 전체 공채기수가 성명서 작업에 참여한 것도 전에 없던 일이라고 했다. 정권과 시민사회단체까지 음모를 품고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것으로 믿는 것 같다고도 했다. ‘자신들’이란 기자는 물론 주필과 신문사, 사주까지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들이 말하는 ‘자신들’은 누가 봐도 하나다. 다른 생각과 다른 주장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거나 오래 전에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단일성은 단연 지면에서 돋보인다. 정권의 음모, <한겨레> 및 방송 3사를 포함한 ‘관변언론사’와의 형평성 잃은 조사, 관행을 무시한 무리한 추징…. 1면 스트레이트기사에서부터 2면 사설, 3∼7면 해설기사까지 글 하나하나가 직접적인 표현 또는 간접적 암시를 통해 지면 전체를 담아내고 있다. 또 지면 전체는 이들 글의 흐름으로 완벽한 서술구조를 완성한다. 어설픈 비평 따위가 파고들 틈새는 없어보인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권력의 살기를 느낀다.” 그들은 얼마 전 ‘기자 일동’의 이름으로 투쟁을 선언했다. ‘기자 일동’ 또한 단일성의 상징이다. 그들은 “정권이 빼앗아가려는 게 돈이 아니라 언론의 자유와 기자로서의 최소한의 명예와 긍지”라고 못박았다. 왜 아니겠는가. 어차피 800억원대의 세금 정도로 이 신문사가 망하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밥그릇 이상의 가치, 바로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하나로 뭉친 셈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그들의 믿음에서 강요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원래 믿음이란 내면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1등 신문’의 울타리 바깥쪽은 안쪽만큼 단일하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의 믿음 체계가 ‘기승’을 부린다. 1등 신문의 기자들에게는 이들이 이교도로 비칠지 모른다. ‘언론개혁교도.’ 이 붉은 이교도들은 걸핏하면 1등 신문에 ‘족벌’이니 ‘수구’니 하는 딱지를 갖다붙인다. 그것까지는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어차피 1등 신문이 오래 전부터 즐겨 써먹던 기술을 따라하는 것이다. 딱지라고 해서 다같은 딱지도 아니다. 언제나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하는 붉은색 딱지는 이교도들의 그것과 비교대상이 아니다. 눈길을 끄는 건 이교도들도 ‘언론자유’라는 똑같은 ‘주술’을 왼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 정권에 당부하고자 한다. 언론을 장악하고자 하는 권력의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우리는 ‘언론자유’의 이름으로 강력히 대처할 것이다. 민주사회의 언론은 정치권력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신문개혁국민운동 언론개혁 6월 선언문 ‘언론의 자유를 국민의 자유로’의 일부) 어쩌면 이교도가 아니라 비슷한 신을 섬기는 사이비교도인지도 모른다. 왜 하필 그들도 언론자유를 외쳐, 결정적으로 투쟁을 꼬이게 만드는 것일까. 대답은 선언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온 국민의 자유이어야 함을 엄숙히 선언한다. 언론자유는 국민의 것이다. 더이상 언론의 자유는 권력화한 언론사나 언론인들의 자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신문개혁 10대 행동지침’이라는 이들의 ‘10계명’은 이들이 1등 신문과는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음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 “비리와 불법을 저지른 언론사 대주주, 사주들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고 언론사 소유의 세습을 비롯한 사유화를 반대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1등 신문으로서는 내부를 이간질하려는 음모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1등 신문 기자들만의 딜레마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숙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딜레마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딜레마는 아무도 대신 풀어줄 수 없는, 1등 신문 기자만의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딜레마의 실체는 무엇일까. “세무조사와 부당내부거래조사는 기자와 논설위원 같은 대다수 언론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대다수 언론인의 명예와 결부시켜서도 안 된다. 소수 언론사 사주와 경영진의 비리문제일 뿐이다.” 지난 3월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그만둔 김재홍 경기대 통일안보대학원 교수(80년 해직 뒤 88년 복직)는 “딜레마의 실체는 그들이 스스로를 사주나 신문사와 공동운명체라고 여기며 자승자박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1등 신문의 기자들이 성명서를 내놓은 27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도 ‘참언론을 위한 거룩한 싸움’이라는 성명서 한장을 발표했다. 동아투위는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한 뒤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다 이듬해 3월17일 해직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의 조직이다. 그러나 제목이 말하는 ‘거룩한 싸움’은 1등 신문 기자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양쪽의 성명은 정반대의 현실인식과 정반대의 투쟁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기자로서 대선배이자 대정부 언론자유투쟁의 대선배이기도 한 이들이 성명서를 통해 1등 신문 기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일까. 성명서는 “지금 이 땅에서 가장 시급하게 청산하고 극복해야 할 개혁의 대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성명서는 “우리는 거대한 권력집단이 된 수구·족벌신문들이라고 생각한다”고 자문자답한다. “그들은 언론이 아닌, 언어폭력의 집단이다.… 군부독재정권에 야합하고 굴종했던 그들은 권언유착으로 축적한 거대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거대한 권력집단이 되었고, 언론사주들은 언론황제가 되었으며, 밤의 대통령이 되었다.” 성명서는 “바로 그들이 이제는 언론자유를 농락하고 짓밟고 있으며, 사회적 공기라는 언론을 사유화한 세력들”이라고 못박는다.
차라리 군사정권 때 사주로부터 자유로웠다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사장이 편집국에서 농담처럼 던지는 말 한마디가 그날의 신문제작에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참담했던 순간들을…. 편집국의 한 기자는 기자 초년병 시절 편집국에서 목격한 하나의 ‘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편집권 행사의 최고회의체로서, 신성불가침한 것으로만 알았던 편집국장 주재하의 부장단회의가 예고없이 방문한 사장의 ‘고함’ 한마디에 풍비박산 나버리는 장면을….”(88년 12월28일치 <조선노보>) 그러나 10여년의 시간은 너무 긴 세월이었던 걸까. “사내 언론자유를 위한 저항세력들은 완전히 도태된 상태다. 족벌언론사에서 제대로 노조위원장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쫓겨나거나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지금은 안으로는 사주의 입김에 짓눌리고, 밖으로는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어느 누구도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돌아오지 않을 유학을 떠나는 정도가 소극적인 ‘저항’인 셈이다.” 그 자신도 문화방송에서 해직을 겪었던 최문순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똑같은 탄압을 받아도 임기제인 공영언론사는 족벌신문보다 숨통이 열려 있었기에 오늘날 사내 민주세력이 남아 있는 것”이라며 “이제 족벌언론사 기자들에겐 밖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어느 때이고 언론사주와 언론인이 공동운명체였던 적은 없다. 누구라도 언론자유의 적이 정권이라고 믿던 80년, 신군부의 언론인 강제해직 과정에서 언론사주들은 정권의 강요보다는 오히려 제손으로 언론인의 명줄을 끊었다. 1980년 8월11일 문공부가 작성한 ‘언론정화중간보고’에는 “각 언론사 사장은 자체 선정 언론인과 문제 언론인을 해임”하였으며 “조치된 524명 중 151명은 정부 선정 정화대상자, 373명은 각사 자체 선정 대상자인 바 이중에는 연로, 무능자 등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된 자들이 포함돼 있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오히려 중견언론인들은 정권의 노골적인 언론통제 아래 놓여 있던 시절이 그나마 지금보다 언론인의 사내 언론자유가 컸던 것으로 회고한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는 “70년대에 기자 생활을 할 땐 사주와 편집국장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으나 요즘은 사주가 정한 논조가 편집국장과 데스크까지 그대로 관철되는 실정이어서 조금이라도 전향적이고 진보적인 기자는 입사하기도 어렵고 버티기는 더욱 어렵다”며 “논설위원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른 건 아니다”라고 전했다.
언론사 노조는 사주의 시다바리인가
대한민국 기자에게 언론사주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2년 전 또다른 ‘최고 신문’ 사주가 구속됐을 때 그 신문사의 어떤 기자는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주가 구속됐으니 쓰지 못할 기사가 없다. 이제 자기검열은 사라졌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내뱉은 이 말에서 대한민국 사주와 기자의 관계는 매우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성명서가 기자들의 자발적인 결의에 의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난 한결 마음이 가볍다. 젊은 기자들이 제기한 권력의 언론 길들이기 의도가 실제로 있다면 젊은 기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힘을 합쳐 언론개혁의 이름으로 강력히 대처할 것이다.” 동아투위 해직기자인 성유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은 “언론인의 자부심을 짓밟는 건 언론자유를 개인의 특권으로 전락시킨 족벌언론 사주들에게 있음을 젊은 후배기자들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주를 보위할 것인가 청산할 것인가. 이젠 언론인의 자세로 선택할 때라는 당부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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