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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국정, 당을 바꿔라!” 민주당 지도부에 직격탄 날린 소장파 의원들… DJ정권 최악의 위기 돌파할 뾰족수 있나
“집권당 사람 가운데 누가 레임덕을 바라겠느냐. 가만히 있는다고 레임덕이 안 오는 것이냐. 지금 중요한 것은 권력누수문제가 아니다.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정권 재창출이다. 그러나 이러다가는 권력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우리당 지지자를 다시 부르기 위한 충정이다.”(민주당 초선의원)
충성메모 파문 뒤 당·정쇄신 주장
먼저 일어난 것은 초선들이었다. ‘충성메모’ 파문 다음날인 24일 김태홍·김성호·박인상·이종걸·정범구·정장선 등 민주당 초선의원 6명이 성명을 냈다. “국가적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정책이 공적 시스템에 의하지 않고 이른바 ‘비공식라인’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야말로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인사정책의 기틀을 전면적으로 쇄신할 것을 요구한다. 먼저 이번 법무장관 인사에 개입한 사람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앞으로의 모든 인사를 공적 절차에 따라 투명하게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천정배·신기남·송영길 의원 등 3명이 뒤따랐다. “당·정의 요직에는 능력과 자세에 문제가 있는 인사들이 일부 포진해 견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공식라인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적 수행을 가로막고 있다. 이번 법무장관 인사 파동은 이들의 역량 한계를 드러낸 일례일 뿐이다. 이에 우리는 당·정 수뇌부의 전면쇄신을 요구한다.” 투명한 인사 시스템 구축을 요구한 초선들보다 한발 더 나아간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초·재선 9명의 목소리, 파문은 컸다. 특히 민심은 최악이고 시기적으로는 집권 후반기라는 점 때문에 여권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사실 여권 지도부에 대한 소장파의원들의 집단적 문제제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9월 여야 대치국면이 장기화하고 한빛은행 대출외압 의혹 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이른바 ‘13인의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13인의 반란’의 경우 토론내용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파문을 불러온 것인데다, 내용도 지도부의 정국운영 방식을 비판하긴 했지만 퇴진까지 요구하진 않았다. 지난해 연말 정동영 최고위원이 권노갑 당시 최고위원의 퇴진을 요구했을 때도 공개회의가 아닌 비공개회의에서였다. 초·재선의원들이 잇따라 공개적으로 성명을 내고 당 지도부와 특정세력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그만큼 청와대와 당 지도부도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자칫 논란이 증폭될 경우 분란으로 이어지고 인사권자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져 김대중 대통령의 권위 추락도 우려되기 때문이다. 지도부는 우선 초선의원들의 당직사퇴서를 반려하고 ‘항명’이 아닌 ‘충정’이라며 선의로 해석하는 등 파문을 최소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또 초·재선의원들을 잇따라 접촉해 대통령 면담 주선 등을 약속하며 자제를 호소하고 나섰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들로부터 여러 차례 연락을 받았다. ‘우리 행동에 대해 충정은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상황에 이렇게 나서면 적전분열로 비쳐진다. 내부적으로 건의해서 해결해야지 이렇게 하면 되겠느냐. 자제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동안 내부적으로 건의해서 해결된 게 하나라도 있느냐.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참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민주당 재선의원)
DJ 권위 추락 우려해 파문 최소화
그렇지만 어떻든 이번 ‘거사’는 예정된 수순이라고 봐야 한다. 최근 잇단 실정과 심각한 민심이반에 따른 위기의식이 여권내부에 크게 확산돼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개혁성향 의원들 사이에 여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당 정체성 혼란과 국정난맥, 이에 따른 심각한 민심이반, 그럼에도 변변한 대책을 찾지 못하는 지도부의 무능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온 것이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듯 그동안 여권 내부에서는 ‘5월 거사설’, ‘6월 거사설’ 등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한 재선의원은 “애초 6월 국회가 소집돼 외유 나갔던 동료의원들이 모두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지도부의 무능력과 잇단 실정 등에 대해 짚고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으로 시기가 빨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 성명서 초안은 발표내용보다 훨씬 더 강경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위기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동교동계 등 이른바 비공식라인을 겨냥해 ‘국정농단세력’, ‘권력에 안주하는 신기득권층’으로까지 규정하고 이들의 퇴진을 주장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구체적인 표현은 밝힐 수 없지만 원문에는 상당히 격렬한 용어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하는 게 목적인 만큼 쓸데없이 서로 감정을 자극하는 내용은 빼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반영됐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민심이반이 거사 불러… 청와대, 선별수용
그렇다면 청와대의 이런 기류를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일반적인 민심이반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당 지지자들의 동요와 이탈이다. 당이 정체성도 흔들리고 개혁을 주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세우고 당을 실세개혁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을 둘러싼 비정상적인 환경, 비선조직의 문제를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당 대표가 되더라도 지금처럼 비공식라인이 전횡하는 상황에서는 아무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면서 똥바가지만 뒤집어쓰는 꼴이 된다. 전면적으로 비공식라인을 정리하고 당을 개혁해야 한다.”(정범구 의원) 선별수용은 자신들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 초·재선의원과 청와대의 현실인식에는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인다. “청와대쪽은 민심이반의 원인을 경제난 때문으로 돌리는 것 같다. ‘경제가 안 좋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각종 지표상으로 보면 연말께 경제가 좋아질 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더 중요한 것은 국민에 대한 신뢰상실이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일을 안 했기 때문에 국민신뢰를 잃었고, 이게 민심이반의 핵심이라는 생각이다. 국민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당·정 쇄신이 필요하다.” 천정배 의원은 “당·정 쇄신은 윗분에 건의하고 하회를 기다리는 식의 ‘시혜’ 대상이 아니다. ‘쟁취’의 대상이다”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한 재선의원쪽 관계자는 “구체적인 정풍운동, 정치개혁까지 생각하고 있다. 차기주자들에게도 자기 조직을 챙기고 옛 세력에 업혀 후보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며 구체적인 정치프로그램을 제시하고 그런 속에서 국민지지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앞길은 산 넘어 산이다. 우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뾰족한 수가 없다. 자신들의 뜻에 동참하는 이른바 ‘건전세력’을 결집해 당 지도부를 압박할 계획이지만, 이마저도 둘쨋날 성명발표 참여의원이 3명에 그치는 등 처음부터 기대에 못 미쳤다. 정동영 최고위원이 28일 확대간부회의에서 “문제를 제기한 의원들로 인해 당이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당에 희망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있게 떠맡아 최소한의 대답을 해줄 필요가 있으며 분열로 규정해선 안 된다”며 초·재선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지지세력을 규합해 지도부를 압박하기에는 시간이 좀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동안 초·재선의원들의 ‘비공식라인 퇴진’ 공격에도 대응을 자제해온 친동교동계쪽에서 28일 확대간부회의를 계기로 “초·재선의원들이 당분열을 획책한다”고 몰아붙이는 등 반격에 나서 당내 분란으로 확대되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신기남 의원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나선 것은 국민여론의 뜻이다. 설혹 우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는 국민이 결정할 것이다. 우리는 국민 요구대로 할 것이다”며 “외유나갔던 동료의원들이 돌아오면 함께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권위에 직접 맞서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도 부담이다. 인사 파문을 문제삼을 경우 결국 논리적으로 인사권자의 책임론으로 연결된다. 이 경우 자칫 대통령의 위상추락에 따른 조기 레임덕의 ‘원흉’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이번 성명이 김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문제제기로 비쳐지는 것을 극력 피하고 있다. 정범구 의원은 “보좌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5공, 6공 때도 인사 잡음은 있었다. 그러나 시스템 중심으로 움직인 흔적은 있다. 사사건건 공식기구 제치고 비공식라인으로 흙탕물 끼치는 세력이 문제”라고 말했다. 신기남 의원도 “우리는 국정운영 시스템, 인사 시스템을 문제삼는 것이다. 우리 행동을 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몰고 가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논리다”라고 잘라 말했다. 여권 내에서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낼 구체적인 당·정 쇄신의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고민이다. 동교동계 등 비공식라인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이후 당·정 쇄신의 구체적 면모에 대해서는 초·재선의원들 사이에도 의견이 엇갈린다. 천정배 의원은 이와 관련해 5월18일 목포대 강연에서 “정권 재창출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니면서도 스스로는 ‘대권’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있는 인사가 당의 중심이 돼서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과연 여권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다른 초선의원은 “당을 개혁 정체성이 분명한 실세 대표체제로 이끌어야 한다”며 “대권주자는 안 된다고 단언할 필요는 없다. 당내 민주화는 어디서 오는 것이냐. 밑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지난해 전당대회에서 1, 2위를 한 최고위원이면 당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 아니냐. 대표의 대권포기는 나중 문제다. 우선은 정면승부할 수 있도록 당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초선의원은 “인재풀이 부족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세울지는 한참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개혁체제로 라인업한다는 각오로 의견을 모아보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민심이반 현상이 심각한데다 집권 후반기의 권력누수가 우려되는 최악의 위기상황. 이런 악조건에서 소장파의원들이 들고나온 당·정 쇄신론. 과연 여권이 어떤 선택을 할지 관심거리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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