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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선고는 사형선고? “어떻게 살란 말이냐” 파산자에겐 가혹한 불이익 뒤따르고 면책결정도 ‘전부 아니면 전무’
신원증명서에 찍힌 ‘파산자’ 낙인
윤씨는 신원조회를 해보면 이름에 파산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나오는 탓에 그 흔한 휴대폰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재산을 빼돌린 것도 아니고 열심히 먹고살려고 발버둥치다가 하루아침에 파산을 맞고 만 것인데…. 해외여행 한번 가본 적 없고 신용카드로 물건을 30만원 이상 산 적도 없는데….” 자꾸만 말끝을 흐리더니 그는 “차라리 채권소멸시효 10년을 기다렸다가 깨끗이 정리하는 게 낫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은행으로부터 수억원을 끌어다 여관을 신축한 건 97년 초. 그러나 경제위기 직격탄을 맞으면서 손님은 뚝 끊기고 한달 매출은 3분의 1로 떨어졌다. 게다가 당시 빌린 은행대출금의 이자는 자고 나면 치솟아 연 30%에 이르렀고 자꾸만 불어나는 연체 이자 때문에 은행 빚은 6억여원으로 늘었다. 결국 여관까지 날렸지만 여관 경매낙찰가로도 빚을 다 털어낼 수 없게 되자 여기저기서 또다른 대출을 일으켜 ‘빚얻어 빚막기’를 하다 끝내 법원에 파산신청을 낸 것이다. 소비자(개인)파산은 법원으로부터 파산을 선고받아 채권자들한테 남은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는 빚잔치(파산절차)를 한 뒤 갚지 못한 빚을 탕감받는 것으로, 파산선고만으로 채무가 다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남은 채무를 모두 면제받으려면 파산선고 이후 다시 면책신청을 내, 윤씨처럼, 면책결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파산선고를 받으면 전문직, 교원, 공무원, 법률직으로 진출할 권리가 광범위하게 제한되고 각종 신원증명서에 파산자라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금융거래와 취직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개인 파산의 급증과 대책 보고서’에서 이런 가혹한 파산제도에서 벗어나 소비자자파산을 ‘회생을 위한 제도’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용불량자가 전체 금융거래자의 10%에 달하는 데도 파산을 신청하는 사람이 1만명 중 한명에 불과한 건 파산제도가 지나치게 가혹하기 때문이란 얘기다. 소비자파산 신청은 지난 96년 처음 법원에 접수된 뒤 98년 350여명, 99년 505명으로 크게 늘었다가 지난해 131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올 들어서는 서울지법 파산부에만 지난 3월까지 66명이 개인 파산을 신청하는 등 다시 크게 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연구원은 “미국은 개인 파산 기록이 있다는 이유로 취업을 제한하는 것을 법으로 막는 등 파산제도가 채무자 갱생에 맞춰져 있다”며 “우리도 파산자에게 돌아가는 불이익이 많지 않도록 파산법을 고쳐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산제도의 가혹성은 이른바 ‘분풀이 파산신청’을 낳기도 한다. 서울지법 파산부 손지호 판사는 “개인 파산 신청사건 중 드물게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파산시켜달라는 게 있다”며 “예를 들어 채무자가 공직자인 경우 파산선고가 내려지면 공직 취임이 금지된다는 점을 노리고 파산을 신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산자로 낙인찍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겠다거나 이를 통해 빚을 받아낼 요량으로 파산신청을 하는 셈이다.
판산절차와 면책절차 통합해야
현재 파산제도는 ‘전부 아니면 전무’다. 파산선고 이후 면책허가까지 나지 않으면 신원증명서에 파산자로 올라가 멍에만 뒤집어쓸 수도 있다. 특히 파산자는 덮어놓고 ‘몹쓸 인간’으로 취급받는 우리나라 정서에서 면책불허는 가혹한 제재만 남길 뿐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장수태 연구원은 “현재 제도는 전부면책 아니면 면책불허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그러나 채무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일부면책을 탄력적으로 허용해 파산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면책불허사유가 있더라도 채권액 중 일정비율이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나면 면책을 허용해주는 조건부 면책안도 제시했다.
‘소비자 워크아웃’제도의 필요성
파산절차와 면책절차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오래 전부터 제기되고 있다. 사실 파산선고 이후에도 채무 변제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면책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도 일부 채권자들은 강제집행이나 더 심한 빚 독촉을 통해 채권회수를 시도하곤 한다. 장수태 연구원은 “서구에서는 법원이 파산과 면책절차를 한꺼번에 판단한다”며 “면책절차중의 강제집행은 채무자를 경제적으로 재기시키겠다는 파산제도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인 만큼 이를 막기위해서라도 파산절차와 면책절차를 통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급증하는 개인 파산문제를 현재의 파산제도 안에서 해결하기보다는 아예 ‘소비자 워크아웃’ 제도를 도입해 해결하자는 주장도 눈길을 끈다. 기업 구조조정처럼 개인의 부채도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다. 소비자 워크아웃 구상은 채무를 유예하거나 연장해주는 식으로, 이른바 채무 스케줄을 조정해 회생을 도모하는 방안이다. 채무조정은 우선 일정기간을 정해 앞으로 예상되는 사업소득이나 급여소득에서 채무를 갚도록 할 수 있다. 또 금융기관은 개인의 악성 연체대출금을 조건이 좀더 유리한 대출금으로 바꿔줌으로써 자금상환의 기회를 주고, 부실채권을 줄일 수도 있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원은 “현행 소비자파산제도는 채무자를 빚더미에서 구해주는 사후적 구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법원이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서, 카드대금 연체 같은 단기 악성채무를 금리가 낮고 상환기간이 긴 일반 가계대출로 바꾸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중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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