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일본 연구 아직도 멀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양적 증가… 자족적 연구기반 미비, 객관적 시각 미흡 등 문제점 산재

“바로 우리의 문제와 직결된 사안이었음에도, 국내의 연구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일제의 범죄상을 증명해줄 만한 구체화한 연구결과를 찾기 어려웠다.”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관련 ‘성노예전범국제법정’에 참여했던 조시현 교수(성신여대 법학과)는 재판에서의 증거수집을 위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 국내와 일본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했는데, 천황과 일제 정책결정자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관여했는가에 대한 증거자료들은 대부분 일본에 있었다. 국내의 연구는 거의가 식민정책 등 거시적 분야에 한정돼 있어 단순히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조 교수는 “재판 앞뒤로 내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연구수준이 결국 이정도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떨치기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규탄의 함성은 높으나…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분노와 규탄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던 전임 대통령의 호기찬 목소리가 그립다는 복고적 반응까지 한쪽에선 들려오는 판이다. 그러나 정작 일본의 되풀이되는 역사왜곡 시도의 근원을 차분하게 되짚고 대처하려는 학문적 노력에 대한 제대로 된 사회적 조명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물론 전반적인 국내의 일본 관련 연구 수준은 과거에 비해 크게 높아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이제 연구자의 수와 논문 등 양적 지표에선 일정 궤도에 올라섰다”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 73년 설립된 국내 대표적 일본학 관련 연구자 모임인 한국일본학회의 회원은 1500여명. 일본 관련 학과가 설치된 대학도 98개나 된다. 어문계열 연구자가 전체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많긴 하지만,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쪽 연구자도 적지 않게 늘었다. 서울대 국제지역원 일본자료센터의 지난 98년 조사에 따르면, 어문계열을 뺀 국내의 박사급 일본 연구자 수는 경제학 63명, 법학 16명, 사회학 22명, 역사학 35명, 인류학 11명이었다. 정치학은 무려 103명이었다.일본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기점을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보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외국어대 일본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용구 박사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까진 이승만 정권의 극단적 반일정책 여파로 일본에 대한 연구 자체가 백안시됐다”며 “65년 이래 꾸준히 증가한 일본 연구자 수는 8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일본자료센터는 “81∼85년 22명에 불과했던 일본학 관련 박사학위자가 86∼90년엔 49명으로 급증했고, 91∼95년엔 90명으로 다시 배 가까이 늘어났다”며 “이때부터 비로소 일본 연구가 지역학으로 자리잡게 됐다”고 평가했다.

일본 관련 각종 학회활동도 급성장했다. 한일관계사연구회(93년), 일본역사연구회(94년) 등이 잇따라 설립됐고, <한일관계사연구> <일본역사연구> 등 각종 학술지들도 선을 보였다. 한국일본학회도 <일본사상총서> 10권을 93년 완간한 데 이어, 전 12권으로 계획된 <일본연구총서>를 이미 5권까지 냈다.

한국사 연구도 일본이 앞서

그러나 놀라운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내실이 그에 못 따른다는 불만의 목소리 또한 곳곳에서 들려온다. 전문가들 스스로가 자족적 연구기반의 미비와 객관적 연구시각의 미흡, 일본에의 예속성 등을 풀어야할 문제점으로 진단내리고 있다.

한국일본학회 회장 이덕봉 교수(동덕여대 일문과)는 “연구자들이 어문계열에 치중해 있고, 서울대, 연세대 등 이른바 명문대학에 아직 일본 관련 학과가 설치되지 못한 탓에 국내적으로 일본 전문가의 자족적 배출 기반이 마련되지 못한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인하대 일본학과 이계황 교수(일본사연구회 회장)는 “일본에서 공부를 한 분들이 많다보니 일본 학문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답습하는 부분도 있다”며 “특히 일부 연구자들은 일본의 대표적 우익학자들과 사제관계로 맺어지는 바람에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해 정면대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아쉬움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40년대 일본의 전시동원체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하종문 한신대 교수(일본학과)는 일본에 비해 양과 질에서 모두 열악한 한-일관계사 연구의 맹점을 지적했다. “근현대사에서 일본의 구체적 식민활동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일본쪽에 기대고 있다. 국내 연구가 독립운동사 중심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령 종군위안부 문제는 90년대 초반부터 문제제기가 돼왔지만, 국내에선 이를 실증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며 “국내 정부기록보존소의 관련 자료를 찾아낸 것도 일본의 한 교수였다”고 털어놓았다.

일본의 한국학 연구현황과 비교해보면 이런 문제점은 한층 도드라진다. 일본 문부성 국립정보학연구소(NII)의 2000년 10월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한국학 연구자는 2311명에 이른다. 조선사 연구자만 267명이고, 고구려(26명), 백제(46명), 신라(66명), 발해(44명) 등 고대사 연구자도 212명이다.

이덕봉 교수는 “4~5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 연구자 수가 국내보다 일본에 더 많았다”며 “지금은 숫자는 비슷해졌지만, 여전히 연구실적은 일본이 더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많은 국내 연구자들이 일본의 연구결과를 참고하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국내 일본 연구가 질적 도약을 이루려면 좀더 보편적인 시각에 입각해 연구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반일’이라는 가치판단에 근거해 이뤄졌던 과거의 연구행태는 많이 지양됐지만, 아직 한-일관계의 특수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 중국, 동남아 등 일제의 식민침략을 함께 경험했던 지역민의 시각까지 포괄할 수 있는 보편적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박용구 박사)

국내 일본학계의 이런 전반적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처방은 크게 연구 네트워크 형성과 일본 연구자들에 대한 사회적 발언권 확대로 모아지고 있다. 전자는 연구 내적 요소를, 후자는 연구 바깥의 사회적 요인을 각각 강조하고 있지만, 둘 다 객관적인 관점에 선 일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네트워크 형성과 사회적 발언권 확대를

하종문 교수는 네트워크 형성에 방점을 찍었다. 사회적 분야별로 흩어져 있는 연구자들을 지속적으로 연결시켜주고 기본적 자료들을 묶어줄 수 있는 일본학연구센터의 수립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박용구 박사도 “사회과학이나 역사쪽은 여전히 구체적인 전문분야별로 나눠보면 연구자 수가 적은 편이라, 내부 토론과 교류를 통한 자족적 이론생산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인접 분야의 연구자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 형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덕봉 교수는 전문가들의 차분한 진단이 사회성원들에게 전달되는 채널이 확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을 제대로 연구한 전문가들의 발언채널은 여전히 제한돼 있다. 신문과 방송은 건수가 생길 때마다 전문가들의 차분한 진단보다는 격한 반일감정을 쏟아내는 데 더 익숙해 있다. 이래서는 한순간의 카타르시스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이고 근본적 대응은 불가능하다.”

이계황 교수도 “일본 교과서 문제에 대해 일본사 연구자들이 학문적인 대응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일부에선 이런 논리적 대응을 미진하다고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있다”며 “학문적 지피지기를 위한 노력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