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표지이야기] ‘헛소리’의 재생산 구조 숱한 망언과 역사왜곡의 기저엔 무엇이 있을까… 천황제 신앙, 미군정 하의 반공정책 등
우리는 수없이 반복되는 그러한 작태에 대하여 달구어진 냄비가 금방 식어지듯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해왔으며,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대응이나 혹은 정치적 흥정거리로 이용해왔다. 우리의 대응이 얼마나 안이하고 치졸하였으며 우리의 일본인식이 얼마나 일천하고 감정적이었나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패망 뒤 부활한 전범들
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은 우리와 관계되는 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 1) 조선침략을 위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조선민족 구제전쟁론, 2) 조선불법강점에 대한 합법적 조선지배론, 3) 식민지 수탈에 대한 조선민족 시혜론, 4) 식민지론에 대한 문화와 조상이 같다는 ‘동문동조’(同文同祖)의 비식민지적 합방론, 5) 동남아 침략전쟁에 대한 대동아공영을 위한 아시아민족 해방전쟁론 등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일제시대 황국사관의 역사인식 그 자체이다. 여기에는 천황제 신앙이 작용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인 천황은 무오류의 존재이고 그가 만들어낸 역사 또한 잘못이 있을 수 없고 이를 인간이 재단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불충하다는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는 패망과 더불어 점령국인 미국에 의해 해체작업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실권 천황제가 상징 천황제로 바뀌고 집단적 자위권과 군사재무장이 헌법에 의하여 원천적으로 봉쇄당했고 재벌도 해체당했다.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과 현상만을 가지고 1945년 8월15일의 시점을 역사의 단절점으로 자리매기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정계 및 관료계의 인맥 및 구조, 역사의식과 인식, 세계관과 가치관 등을 지표로 하여 살펴보면 그처럼 간단히 단정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본질적 차원에서는 연속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제1의 전범인 천황에게 전쟁책임을 묻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실권만을 박탈하였을 뿐 계속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하게끔 하였다. 천황의 신국(神國) 신화는 무의식의 세계에 잠복하고 있을 뿐 계속 주술적으로 작용하여 유효한 것이었다. 침략전쟁의 전범들도 사면하여 이들을 정계와 관계에 복귀시켰다. 점령국 미국은 동아시아전략의 일환으로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해 군국주의자들을 반공전선에 재배치시킨 것이다. 패전 이후 전쟁 책임으로 추방된 관리(군인 제외)는 도합 1809명이다. 이중 경찰 간부가 1219명이고 일반 관료는 234명에 지나지 않았다. 관리는 군인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를 지탱하고 이끈 양대 축임에도 미국은 대소련 방위전략과 일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철저한 반공의 ‘황국관료’를 재기용하였다. 그뒤 일본은 내각제 하에서 관료 지배체제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관료에 이끌려왔다. 이 관료 집단은 역사의 단절없이 전전의 일본을 계승시키려고 몸부림쳤다. 스스로의 의식개혁 없이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단절화 요구는 그들에게 한낱 강요된 압박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분기점, 1995년
이들은 패망한 일본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미국에 굴종적으로 기생하면서 전후복구를 이루어나갔다. 그러다가 70년대 경제대국으로 비상하면서부터 마각을 드러내어 전면에 나서서 ‘대국 일본’을 외치면서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해갔다. 미국에 대해서도 감히 ‘NO’라고 외치는 급진적인 반미주의자들도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경제적 성공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나라’ 일본을 별종의 나라로 만들기에 좋은 조건이 되고 일본국민들을 천황교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었다. 과거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했을 때 ‘신국 일본’을 그려내어 천황교의 주술에 빠져들게 했던 전례와 너무나 흡사한 경우이다. 마각을 숨기고 수면 하에서 추진되던 우경화 작업은 종종 망언을 발설하면서 존재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가면이 벗겨지더니 1980년대 들어와 노골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1982년에도 ‘교과서 파동’을 일으켰으나 한국과 중국 등 주변 나라들의 반발에 부딪혀 잠복하였다. 아직은 여건이 성숙돼 있지 않다는 것과 역부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패망하여 50년이 지난 1995년은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전후 50년이 지나면서 자타가 공인하듯 일본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세계 강국으로 재도약하여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내건 ‘전후 50주년 총결산’이란 다름 아니라 이러한 상황 아래서 패전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대 일본의 ‘원죄의식’을 청산하고 세계 속의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야망을 실현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우익세력이나 보수적인 세력은 50주년을 계기로 우경화 프로젝트를 노골적으로 진행시켜나갔다. 국회에서는 ‘부전결의’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과거의 수탈과 침략의 역사를 애매모호한 문구로 수식하여 그 책임을 회피해버리면서 ‘전후 총결산’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군사재무장을 금지한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실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는 97년 9월 미-일 방위협력 신지침(신가이드라인)을 채택하고, 98년 5월에는 신지침 관련 3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공격적인 군사력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98년 6월에는 실권천황제 국가의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와 국기인 히노마루(日の丸)를 상징천황제 일본의 국가, 국기로 하였다. 정치지도자들의 망언이 기승을 부렸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새로운 세대의 ‘일등 국민의식’
이제 일본은 전쟁 체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가 모든 분야에서 자연적 세대교체의 흐름을 타서 주역이 되고 있다. 이 세대는 부흥과 고도성장의 모습을 보면서 성장하였고, ‘일등 국민의식’으로 정신구조가 짜여 있다. 전전(戰前)의 황국신민관료 출신들이 전후 재등장하여 집권하면서 펼친 세뇌교육의 일정한 작용을 받으면서 의식이 형성된 세대이기도 하다. 경제적 풍요 속에서 불감증에 걸리고 천황교의 주술에 걸린 ‘별난 나라 별종인간’의 군상들이다. 정계의 세대교체와 함께 형성된 신보수주의는 ‘총체적 대국 일본’의 건설을 본질로 한다. 이들 세력에 의해 보수·우경화가 더욱 촉진되고 망론적 일본상식은 확대 재생산돼간다. 곧 보편적 가치와 시민적 상식 대신 일본만의 가치와 상식이 일본에서 보편화돼가는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도 우익이나 우경적 정치가에 의해 망언이 줄곧 발설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를 ‘망령된 헛소리’ 정도로 간과해왔다. 그러나 결코 그러하지가 않다. 패망하고 나서도 스스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일본의 구조적 한계라는 점, 제국주의시대의 역사인식과 정신구조를 현대 일본이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는 점, 망언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그를 통하여 스스로 애국자연할 수가 있고 일본국민을 애국주의로 무장시키려는 파쇼적 책략이라는 점, 그 배경에는 천황제의 주술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 그들의 망론이 이제는 일본적인 상식이 되고 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가 있다. 역사는 비판정신에서 시작된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밝고 바른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용기이다.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일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역사를 역류시키려는 책략이다. 패망한 뒤에도 황국 관료에 의해 장악된 일본은 그들에 의하여 농락당해왔다. 경제적인 풍요와 천황제의 주술 속에서 다수의 일본인이 나라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조직된 소수에 맡겨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다. 그들의 역사왜곡과 진실은폐의 정신구조화가 지금 당장 주변 나라들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인식은 또다시 강도적 논리인 뺏고 빼앗는 시대의 역사를 재현하는 충동으로 작용하고 그러한 역사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토양이 된다.
침략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토양
우리는 평화와 인권의 기치 아래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동아시아 시민의 연대 구축으로 21세기를 열어가고자 한다. 과거사의 반성은커녕 역사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일본 정부와 보수 우경주의자들의 책동에 대해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역사 개악운동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몰역사적 반인도적 범죄이고 침락행위이기 때문이다.
강창일/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