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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강경대응, 고민도 쌓이네 대통령 발언을 시작으로 급선회한 정부 대응… 뾰족한 압박수단 없고 재수정 가능성도 불투명
지나친 신중함, 뒤늦은 강경대응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애초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게 신중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역사 교과서 검정결과가 발표된 3일 정부의 반응부터 뜨뜻미지근했다. 이날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공식성명을 통해 “검정을 통과한 일부 교과서가 자국 중심주의적 사관에 입각해 과거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데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주변국들이 “역사적 사실과 인류의 양심에 대한 도전이며 모든 피해국 국민의 감정을 모욕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문제의 교과서가 출판되도록 방치함으로써 마땅히 져야할 책임을 회피했다”(중국), “일본 정부가 반동적인 역사 교과서 개정놀음을 처음부터 비호, 두둔하였고 끝내 그것을 정당화, 합법화함으로써 새 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인류와 역사 앞에 또다시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일본은 시대착오적인 행위에 대해 반드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북한)이라고 일본에 직격탄을 날린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점잖은(?) 것이었다. 정부의 후속조처도 미적지근했다. 정부는 4일 긴급대책회의를 열었으나 면밀히 검토한 뒤 다각적인 중장기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원칙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후 그나마 눈에 띄는 대책은 ‘일본교과서왜곡대책반’을 구성해 중단기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대책반도 주무부서 등을 놓고 교육인적자원부와 외교부, 국무조정실이 서로 미루는 등 소극적으로 나오다가 11일 겨우 출범하게 됐다. 또 최상룡 주일대사는 정부로부터 훈령이 늦어져 검정통과 6일 뒤인 9일 일본 정부에 공식 항의의 뜻을 전달했을 뿐이다. 오히려 외교당국자들은 최상룡 대사의 소환에 대해서도 “공식 소환이 아닌 정무협의차 일시귀국한 것”이라고 파장이 확대되는 것을 애써 경계했다. 정부가 뒤늦게 강경대응에 나선 것은 11일 김대중 대통령의 언급 이후였다. 김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한일경제협회 일본쪽 회장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98년 일본방문시 일본 정부는 파트너십공동선언을 통해 과거사에 대해 사죄했고 젊은 세대의 역사인식을 심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며 “그러나 이번 역사 교과서 검정문제는 이런 공동선언 정신에 비춰 매우 미흡한 데 대해 한국 국민이 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고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후부터 정부의 분위기는 강경대응쪽으로 급격하게 옮아갔다. 추규호 외교부 아·태국장은 같은 날 일본교과서왜곡대책반 1차 회의를 마친 뒤 기자간담회에서 “일본 역사 교과서에 대한 전문가들의 정밀분석 작업이 20일께 끝나는 대로 일본쪽에 재수정 요구안을 제출하겠다. 만약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새 교과서의 불채택 운동지원뿐 아니라 사용가능한 모든 카드를 열어두겠다”며 역사 교과서 문제를 다른 한-일 외교사안과 직접 연계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내비쳤다. 임성준 외교부 차관보가 불과 하루 전인 10일 외신기자회견에서 “중국 및 북한과의 공동대응은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한·일 양자적 차원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을 다할 것”, “교과서 문제해결을 일본 문화개방과 연계할 계획이 없다”고 한 소극적 자세와는 크게 다른 태도였다.
일본은 무반응으로 일관
애초 역사 교과서 문제로 한-일 우호관계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쪽에 무게를 두던 정부의 태도가 이처럼 강경대응쪽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여론의 압력 때문이다. 여야는 국회 대정부질문과 통일외교통상위에서 “국민들이 더 분노하는 것은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대처”(서청원 한나라당 의원), “일본 교과서의 문제는 ‘군국주의적 시각’이 있는데도 외교부가 공식문서를 통해 ‘자국중심주의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부터가 의지부족”(김원웅 한나라당 의원), “일본 대중문화 추가개방 중단은 물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묵인하지 않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박상천 민주당 의원)고 연일 정부를 몰아부쳤다. 항의시위와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여왔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국내 시민단체들도 ‘일본교과서 바로잡기운동본부’(가칭)를 상설연대기구로 발족할 계획을 세우는 등 조직적인 대응에 나서는 동시에 정부쪽에도 적극적인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그렇지만 이처럼 한국이 교과서 문제로 들끓는 것과 달리 일본쪽 분위기는 ‘소 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연상될 정도로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교과서 검정 결과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국회의원들도 “한국과 일본의 분위기가 너무 대조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감상을 밝혔다. 이런 일본 정부의 태도는 한국쪽이 교과서 문제에 대해 강수를 둔 것에 대해 국내 여론용이라고 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노 요헤이 외상이나 정부쪽 관계자들은 “한국의 여론이 매우 안 좋다는 것을 엄중하게 받아들인다”고 제법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국내용 조처’로 본다는 시각의 외교적인 언사인 것이다. 또 일본이 별 반응을 하지 않는 데는 한국쪽이 재수정 요구를 해와도 이를 현실적으로 수용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즉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반응을 보여봐야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해 사건이 더욱 악화될 수 있으므로 ‘무반응과 시간끌기’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셈이다. 교과서 검정 관련 주무부처인 문부과학성의 마치무라 노부타카 장관은 12일 박상천 민주당 최고위원 등 한일의원연맹 대표단의 재수정 요구에 “객관적인 사실에 명백한 잘못이 있으면 재수정을 교과서 회사에 권고할 권한은 있으나, 이번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재수정 불가방침을 재확인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행정개혁담당상,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후생상 등 차기 총리에 오를 것이 유력한 자민당의 총재선거 출마자 4명도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재수정 불가’ 입장을 확실하게 밝혔다.
강경책 고집은 역효과 낳을 수도
정부는 우선 20일께 일본 역사 교과서의 정밀 분석이 끝나는 대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일본에 재수정을 요구할 방침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본이 재수정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사실 일본은 86년 황국사관 등의 비판을 받은 <신편일본사>가 검정합격된 이후 한국·중국 등의 항의를 받고 4차례나 추후 수정을 거친 전례가 있어 재수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의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그때는 자민당 안에서도 <신편일본사>를 지지하는 의원이 소수였고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가 있어 수정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어서, 현실적으로 수정이 어렵다고 보고 있다. 또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일본정치 일정도 역사 교과서 재수정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자민당이 보수성향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런 사정 때문에 단기적인 접근보다 장기적인 해결방안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교과서왜곡대책반 관계자는 “이번 일본 중학교 교과서 문제의 경우 내년부터 시작되는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까지 염두에 두고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교과서를 정밀분석해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할 방침”이라고 귀뜸했다.
직접 행동에 나선 국내 시민단체들
한편 국내 시민단체들은 일본 시민단체와의 연대투쟁을 계획하는 등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다. 정대협 등 5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일본 역사교과서 개악 저지운동본부는 이미 3월26일 서울에서 일본의 시민단체인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과 공동으로 ‘올바른 교과서를 위한 한-일 연대 세미나’를 열고 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한 공동대응 방안을 협의했다. 양미강 정대협 총무는 “일본 교과서의 재검정을 요구하는 국민서명운동과 함께 앞으로 일본 시민단체들과 문제 교과서의 채택저지운동도 전개할 방침”이라며 “장기 대책으로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한-일 공동 교재개발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재수정쪽보다는 문제의 교과서가 채택되지 않도록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사실 이들 시민단체들은 검정제도 자체를 반대해 온데다 일부 수정을 하더라도 필자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가 없으므로 재수정 요구가 무용하다고 본다. 따라서 연대의 끈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시민단체들과의 조율을 통해, 당장은 불채택 운동에 주력하고 장기적으로는 공통의 역사교재 만들기 등 역사를 공유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쪽은 채택률 10%를 목표로 하고 있다.
도쿄=오태규 특파원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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