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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동자들의 ‘애증’ 군사문화적 노사관계와 무식한 노조탄압이 현대 주력노조의 전투적 성향을 낳았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타계소식을 듣고 대부분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이 보인 반응이다.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면 고인이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지도 않는 추모를 하기에도 찜찜하다는 것이다.
‘애지중지 자식’에서 ‘머슴’의 사이
현대 노동자들에게 정 명예회장은 천민자본가의 표본으로 타도의 대상이다가, 때로는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아직도 현대 노동자들의 뇌리에는 명예회장이 ‘구사대를 동원한 노조탄압’, ‘무시무시했던 식칼테러’의 배후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노조는 회사쪽과 협상이 도저히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 상경투쟁을 전개하면서 ‘왕회장’과 담판을 시도했다.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 앞 시위현장에서는 ‘정주영을 몰아내자’라는 구호와 ‘정주영 회장과의 면담요구’라는 플래카드가 동시에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애증이 오락가락했던’ 존재의 죽음이기 때문에 현대 노동자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생전에 정주영 회장은 현대 노동자들을 “남이 아니라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라고 주장했다. 해마다 신입사원 환영회나 직원들 전체모임이 열리면 빠짐없이 참석해 씨름과 배구를 하고, <해뜰날>을 선창하며 어깨걸이춤을 즐기는 모습에서는 실제로 ‘큰형님 아니면 할아버지’로 다가왔다. 정 회장을 가까이서 모셨던 비서들은 서슴없이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주영 회장에게 ‘근로자’와 ‘노동자’는 ‘애지중지 자식’이 졸지에 ‘머슴’으로 보일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났던 모양이다. “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노조를 인정하지 못한다.” 정주영 회장이 남겼던 유명한 말이다. 80년대 말까지 그에게 노동운동은 다 ‘불법’이었고 ‘빨갱이짓’이었다. 88년 12월 현대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이런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너희들이 공산주의를 알아? 단체행동을 하는 건 좋은데, 왜 빨간 띠를 매는 거야. 다른 좋은 색깔도 많잖아. 파란색, 노란색… 얼마나 좋아.” 이렇게 노동운동을 사시로 보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탄압을 했던 ‘악덕기업주의 죽음’이지만, 울산의 현대 계열사 공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조문행렬까지 끊이지 않았다.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의장 이효선)는 지난 3월21일 저녁 정 회장의 타계소식을 접한 바로 그 다음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명복과 유가족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23일로 예정된 고려산업개발 부도원인 규명과 생존권 보장을 위한 계동 본사 앞 규탄항의 집회를 취소했다. 이천호 현노협 사무차장은 “그동안의 노조탄압에 대한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돌아가신 분에게 조의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며 “창업주의 타계를 계기로 앞으로 현대그룹 노사가 구태의연한 관계를 벗고 발전적인으로 재정립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끝내 이루지 못한 해고자들과의 화해
노동계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노무관리 스타일을 회고하며, 국내 노동운동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나 현대차 등 현대 주력기업들 노조의 선진적이고 전투적인 운동성향은 정주영 회장 재임 시절의 군사문화적 노사관계와 무식한 노조탄압, 이에 맞선 현대 노동자들의 치열한 싸움에서 싹텄다”면서, 한 가지 단적인 사례로 현대중공업이 울산공장 정문에 해병대 출신 경비원들을 대거 채용해 출근하는 직원들의 두발을 단속하던 일을 떠올렸다. 지난 87년 현대중공업에서 해고된 오종세 금속산업노조연맹 부위원장은 “아주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산재를 당해 불만이 팽배해 있으면서도 ‘왕회장이 떴다’하면 더욱 긴장해 일을 하던 시절이 눈에 선하다”며 마지막까지 현대 해고자들과 화해를 하지 못한 채 정주영 명예회장이 훌쩍 떠나버린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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