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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경제의 카리스마가 지다 황소처럼 밀어부치며 살다 간 정주영 명예회장의 기업가정신, 그러나 그 어두운 그림자…
청운동 자택의 풍경
유품에서 물씬 풍겨나는 검소함은 그의 실제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양복은 ‘격식을 갖추고 외부손님을 만나야 할 때나 처가에 갈 때나 입을 한벌’이면 족하지 멋내기와는 상관이 없었다. 닳아서 입을 수 없을 때까지 춘추복 한벌로, 겨울에는 양복 안에 내의를 입고 지냈다. 구두는 닳는 것을 늦추려고 굽에 징을 박고 신고 다녔다. 명예회장 비서실에서 일했던 현대 관계자는 “명동의 한 수제화점에서 만든 똑같은 디자인의 구두 세 켤레로 계속 굽을 갈아가며 30년에 넘게 신고 다니셨고 백화점에서 팔지 않는 두터운 양말만 신었기 때문에 항상 남대문에 가서 양말을 사와야 했다”고 전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도 있는 큰 부자의 검소함은 ‘희생정신’으로 비쳐져, 사람들에게 ‘보릿고개를 넘기고 국민들이 잘먹고 잘살 수 있게 하는 데 정주영씨만큼 공헌한 인물은 없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각인시킨다. 현대건설의 한 퇴직임원은 “정주영씨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자기만 호의호식하기 위해 살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은 스스로 근검절약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임직원들에게도 엄격하게 강조했다. 특히 제수씨나 며느리들, 사장 부인들이 호사스런 생활로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내리면 불호령을 내렸다. 다시 현대건설 퇴직임원의 회상을 들어보자. “64년 충북 단양에 시멘트공장을 짓고서 준공기념식을 하는데 식당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아주머니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회장 부인이 동서들을 이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회장님에게 어떻게 사모님을 직원식당에서 일을 하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대답하던군요. ‘집에서 따뜻한 밥 먹고 편하게 지내면서 돈이 조금 생기니까 여자들끼리 다이아반지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당장 호되게 일을 시켜야 그런 소리가 쑥 들어갈 것 같아서 나오라고 했지.’”
정주영은 왜 김우중을 싫어했나
기업인으로서 정주영 회장의 삶은 더욱 극적이다. 열아홉살에 공사판 막노동꾼으로 돈을 벌기 시작해 한해 매출 100조원이 넘는 대그룹을 일으켜 세우기까지 정주영식 경영방식은 국내에서는 물론 전세계 기업들과 학계의 주목대상이다. 97년에 ‘정주영 창업론’을 공식강좌로 채택한 숭실대 정대용 교수(벤처중소기업학부)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저돌적인 추진력과 실행력으로 한국경제 비약적 성장의 주춧돌을 놓은 기업인”이라고 평가했다. 한때 재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표적 기업인으로 정주영씨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꼽은 적이 있다. 맨주먹으로 거대기업을 일군 것이나 건설·조선·자동차 등 한국경제 성장의 발판이 되는 업종을 주력기업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 두 사람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 그러나 지금 한 사람은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반면에, 또다른 사람은 역적이 되어 해외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이다. 차이가 뭘까. 공교롭게도 생전에 정주영 회장은 김우중 회장을 아주 싫어했다. 김우중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회장과 정주영 회장을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여기고 해마다 인사를 갔지만 정 회장은 매번 푸대접을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김우중 회장이 현대와 중복되는 사업을 벌이며 평소에 ‘버릇없게 굴었다’는 등 여러 가지 뒷소문이 있지만, 근본적인 사업확장 방식의 차이에서 두 사람의 소원한 관계를 이해하는 게 타당한 것 같다. 정주영 회장은 ‘장사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불쾌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스스로 ‘노가다 십장’이나 ‘부유한 노동자’로 불리기를 원했다. 김우중 회장을 싫어했던 이유도 “그이는 장사꾼이지 기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는 남들이 시도하기조차 꺼릴 때 건설·조선·자동차 등 주력업종을 모두 새롭게 시작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지만, 김우중 회장은 새로 만든 제조업종이 거의 없다. 김 회장은 (주)대우의 전신인 대우실업에서 장사를 해 만든 밑천을 가지고 남들이 만든 기업을 인수해 그룹을 형성했다. 정주영 회장은 지난해 1월 인터넷신문 ‘머니투데이’에 기고한 새천년 맞이 글에서 ‘공장 말뚝론’을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갖가지 어려움을 딛고 척박한 땅에 자기공장의 말뚝을 직접 박으며 땀흘려 공장을 지어볼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업인은 공장을 직접 지어봐야 하는데 일확천금을 꿈꾸며 사고와 행동의 호흡이 짧은 사람은 장사꾼이지 기업인이 아니다.” 그의 이런 개척정신은 한국경제가 위기에 빠졌을 때 돌파구를 여는가 하면, 한국경제가 종속발전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초여건(펀드맨털)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70년대에 오일쇼크로 경제위기가 몰아닥치자 그는 거꾸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건설공사 수주 등 중동건설붐을 일으켜 막대한 ‘오일머니’를 벌어들였고, 돈키호테식 발상으로 추진한 울산 조선소 건설과 자동차 독자모델 개발은 외국의 선진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산업기반을 만들었다. 방송대 김기원 교수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기업의 세계적 진출에 앞장서고 기간산업을 개척했다는 것, 그것도 조선업 진출과 88서울올림픽 유치경쟁에서 보여주듯이 일본과 맞서려고 했다는 점이 바로 정주영씨만 인정받을 수 있는 기업가정신”이라고 평가했다.
황제경영의 잇단 과잉·과오투자
정주영식 경영에는 축배만 있었던 게 아니다. 자서전에서 고백한 대로 오히려 고배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 쓴잔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고 시련으로 받아들이며 앞만 보고 걸어나갔을 뿐”이었다.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 기업인인 그는 디지털 충격에 대해서도 똑같은 철학으로 접근했다. 지난해 초 한 인터넷매체에 실은 칼럼에서 그는 “인터넷이 세상의 변화과정에서 커다란 전환점에 해당한다는 점을 평생 쌓아온 사업가적 안목으로 분명히 인식한다”고 밝히며 그렇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고 했다. “95% 이상의 벤처기업이 쓰러진다고 할 경우 그것은 100번의 시도 중 95번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얘기이지, 100명 중 95명이 곧장 인생실패자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한두번의 시도로 좌절해서는 애초에 기업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새로움에 대한 도전정신은 언제부턴가 ‘무모함’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경제 최대성과의 발판이 되었던 ‘정주영식 기업문화’가 지금은 한국경제의 어두운 그림자로 전락했다. 현대의 위기는, 여느 재벌기업과 마찬가지로 문어발 사업확장에서 비롯됐다. 현대는 80년대 초반부터 전자, 금융, 석유화학 등 비주력분야로 사업을 뻗쳐 한때 계열기업 수가 83개에 이러렀다. 황제경영은 신속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했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과잉·과오투자를 유발하는 촉매제 구실도 했다. 가령 현대전자가 80년대 중반에 미국의 한 반도체장비제조업체를 인수할 때 정주영 회장은 사업타당성 보고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다. 당시 삼성전자도 이 회사를 인수하려고 2년 동안 검토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현대전자는 뒤늦게 인수전에 뛰어들면서도 “삼성이 검토하는 것을 보면 보나마나 할 만한 사업”이라는 ‘왕회장의 의견’이 떨어지자 곧바로 인수해버렸다.
정경유착의 수혜자이자 정경마찰의 희생자로
현대의 선단 문어발경영의 절정은 정치사업. 정주영씨는 87년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전문경영인들에게 기업을 맡기고 재계의 원로로 지내는가 싶다가 92년에 느닷없이 대선후보로 나섰다. 선거운동에서 현대 임직원들은 모두 당원으로 참여했고, 막대한 기업자금이 여기에 흘러들어가 정치판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었다. 낙선을 하고 난 뒤 그는 “인간 정주영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뽑아준 국민들의 실패”라며 호기를 부렸다가 김영삼 정부 집권기 내내 현대그룹이 금융핍박에 시달리게 했다. 70∼80년대 정경유착 구조를 한껏 이용했던 현대그룹이 이 시기에는 ‘정경마찰’의 최대 희생자였다.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뒤에는 정주영식 기업문화 그 자체에서 위기의 요인이 본격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숭실대 정대용 교수는 “현대 기업문화의 최대맹점은 허술한 리스크관리이다. 늘 먼저 시작해 억세게 밀어붙이는 정주영식 경영방식이 실패를 하더라도 예전에는 정부가 그뒤를 밀어줬지만 시장의 통제가 작동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더이상 성공하기 어려운 방식이 되어버렸다”라고 분석했다. 현대의 카리스마는 사라졌다. 문제는 그 공백을 누가 메워주지 못하면서도 카리스마에 의한 경영방식은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 정몽구·몽헌·몽준씨 등 2세들의 경영능력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심판대에 올랐다. 현대차·기아차를 중심으로 하는 몽구씨 계열사(자산 35조7000억원, 재계 4위)와 현대중공업을 축으로 하는 몽준씨 계열사(자산 12조, 재계 9위)는 상대적으로 전망이 밝아보이지만, 현대건설과 전자, 상선 등을 물려받은 몽헌씨 계열사(자산 24조2천억원, 재계5위)는 시장에서 언제 불붙을지 모르는 ‘위기의 도화선’ 취급을 받고 있다. 단지 자금난 때문이 아니다. 최고경영자가 심어놓은 기업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한 가운데 새로운 최고경영자의 능력도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 탓이 적지 않다. 기업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더구나 몽헌씨 계열의 전자나 금융과 같이 규칙적인 업무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기업에서는 최고경영자의 카라스마가 아니라 정교한 조직규율과 분업체계가 경쟁력의 핵심요소이다. 그런데도 현대의 대부분 계열사는 아직까지 대규모 공사를 수주해 인건비를 따먹는 사업에나 걸맞은 기업문화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지난한 세월동안 쌓아온 삶의 궤적은 현대그룹은 물론 한국경제 전체에 빛과 그늘을 함께 드리우고 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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