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표지이야기] 탈근대 시대의 전근대 가부장은 죽지 않는다. 단지 대물림될 뿐이다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그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북한에서 조문사절이 온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 중국도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애도문을 전해왔다. 전체 조문객은 무려 33만명을 헤아리고, 장례식장에는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왕회장’이 아니라 ‘왕’이 죽은 것 같다. 한 방송사의 저녁 뉴스를 통해 그의 장례 과정을 보았다. 우선 그 엄청난 규모 자체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탤런트 최불암씨가 흐느끼며 추모사를 읽는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꽤나 친했던가보다. 하기는 두 사람이 ‘회장’으로서 남달리 친했을 수도 있겠다. 비록 ‘왕회장’에 비할 수야 없지만, 최불암씨도 오랫동안 ‘회장’이지 않은가?
군바리 정신과 무대뽀 정신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이 이 영상물의 논리를 거의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정주영씨는 살아서도 이미 ‘신화’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러모로 ‘때묻은 신화’였다. 그 추모영상물의 논리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언론의 보도는 그 신화에서 때를 벗겨내는 작업으로 보인다. 이건 아무래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다카키 마사오)가 죽었다고 그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듯, 정주영씨가 죽었다고 그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다. 정주영씨가 죽었다고 해서 그 자신이 상징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문제가 함께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대를 앞선 경영철학’을 대학에서 강의하겠다는 보도를 접하고서는 황당한 심정을 넘어서 심각한 우려마저 갖게 된다. 그에게도 물론 남다른 ‘경영철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무데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정희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면 된다’는 정신, 그것이 바로 ‘무데뽀 정신’이다. 박정희의 철권통치 속에서 정주영씨의 ‘신화’가 만들어졌거니와, 여기에는 ‘군바리 정신’과 ‘무데뽀 정신’의 일치가 크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이런 것이 어떻게 ‘시대를 앞선 경영철학’이 될 수 있을까? 정주영씨는 살아 있을 때도 ‘시대를 앞선’ 사람이라기보다는 ‘뚝심’이 센 사람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리고 사실 그는 여러 면에서 시대에 뒤진, 이 탈근대의 시대에 전근대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이런 사실은 그의 가부장적 풍모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가부장으로서 정주영은 그를 둘러싼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박정희와 정주영
정주영씨는 가부장이라는 점에서도 박정희와 여러모로 비교될 만하다. 흔히 말하길 박정희는 청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상식은 언론에 의해 교묘히 조작된 착각이다. 박정희는 국가와 자기를 동일시했던 인물이다. 전두환이나 노태우야 노후를 생각해서 가능한 한 많이 챙길 필요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자신이 곧 국가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국가 가부장제’였다. 정주영씨는 경제면에서 박정희와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가부장이다. 가부장은 우선 ‘보호자’로 나타난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가부장은 또한 ‘통치자’이기도 하다. 그는 가족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통치를 무시하고 그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 가부장의 통치할 권리를 무시하면, 그는 보호할 의무부터 팽개친다. 가부장은 군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부장인 것이다. 정주영씨는 아직 건강하던 시절에 반드시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아침식사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 많은 식구들이 아침마다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자면, 귀찮고 어렵고 힘든 일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정주영씨는 조회를 하듯이 아침마다 가족의 유대를 확인하고 가부장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인받는 동시에 확인시키는 의례로서 그것을 고집하지 않았을까? 가부장으로서 정주영씨가 갖고 있던 문제는 박정희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는 박정희가 국가를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처럼 ‘현대’라는 거대기업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그도 박정희처럼 단순한 동일시를 넘어서 ‘현대’라는 거대기업을 자신의 사유물로 여겼다. 그는 불행하게도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기업을 사유물로 여기는 전근대적 기업관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물론 그 가장 성공적인 구현자는 ‘삼성 세습재벌’이겠지만.
선진적 삼성 대 후진적 현대?
가부장은 오직 자신의 능력과 취향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는다. 그 결과 수많은 가부장들이 집에서 일상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인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자신의 통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군사적 의미의 ‘적’으로 몰아붙여서 고문하고 투옥하고 살해했다. 마찬가지로 정주영씨는 자신의 ‘소유물2인 현대의 노동자들에게 ‘식칼테러’를 비롯해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흔히들 삼성과 현대를 대비시킨다. 그것은 보통 ‘똑똑한 삼성 대 무식한 현대’나 ‘선진적인 삼성 대 후진적인 현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적어도 뒤의 대비는 잘못된 대비이다. 정주영씨가 분명히 전근대적이었고 이런 그의 특성이 기업에 크게 반영되기는 했지만, 현대와 비교해서 삼성을 선진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도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삼성은 노동조합조차 없는 기업이다. 게다가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하여 세습을 성사시킨 기업이다. 이보다 더 후진적일 수는 없다. 삼성은 똑똑하다거나 선진적인 기업이 아니라 ‘잔대가리’에 능한 기업일 뿐이다. ‘왕회장’으로 불리던 유명한 가부장이 죽었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다만 대물림되고 있을 뿐이다. 좀더 선진적인 기업과 사회를 위해 이제 낡은 가부장제의 죽음을 요구하자.
홍성태/ 상지대 교양과 교수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