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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제 뒤돌아보지 않으련다 교직을 버리고 ‘글의 꿈’을 좇고 있는 나, 고통스러워도 그런 나를 사랑하며…
눈을 떠도 갈 곳이 없을 때…
학교를 그만 둔 처음 며칠, 아침에 일어나면 어딘가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그게 그거인 옷 고르고 둘둘 스타킹 올리고 윙윙 머리 말리는 것도 귀찮았고, 언제나 부스스한 사람은 부스스하고 날선 사람은 날선 사람인 채 조금도 변하지 않는 교무실 풍경도 지겨웠고, 이러다 점점 다양한 교보재 대신 백묵 하나 달랑 든 선배 교사들 닮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 앞날도 마뜩치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없었다면 하던 일을 단칼에 접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에둘러 말하자면 균형을 잃었던 것이고 쉽게 말하자면 배신의 충격이 컸다.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그 자체가 분노에 불타는 먼지덩어리 같았다. 처음에 마음을 열지 않던 아이는 점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분노가 폭발할 때면 집과 동네와 학교를 누비며 저지른 자신의 엽기적 범행들을, 아이들간의 문란한 성관계들을. 나는 고해실의 신부처럼 믿음이 출중하지도, 신념이 굳지도 않은 범인(凡人)이었다. 마음이 너무 무겁고 괴로웠다. 게다가 삶이 전반적으로 몹시 피로했다. 상담교사를 한 지 6년째 접어드는 해였다. 한켠에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후배 교사가 있었다. 그 역시 교사들의 폭력적 언행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차에 주임 교사와 일마다 부딪히며 싸우던 그 후배가 발병을 했다. 정신분열이었다. 귀에서 자꾸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얼마 뒤, 아이가 했던 말은 태반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전장에서 돌격을 외치던 장수가 아군의 칼에 피습을 당한 꼴이었달까. 그런 아이들이 여러 명이었다. 나는 후배처럼 어느 순간 나를 놓아버리게 될까 두려웠고 더이상 아이들 얼굴 보기가 끔찍했다. 교직 8년, 전직이었던 출판사 직원 6년 포함 직장 생활 14년 만에 나는 사직서를 썼다. 서른 중반이었다. 다시 며칠이 흘렀다. 문득 아침에 눈을 떠 어딘가 갈 곳이 없다는 게 그렇게 우울한 일인 줄 몰랐다. 2월엔 방학 기간이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그런데 개학이 되었다. 3월, 분분한 먼지를 일으키는 꽃샘 바람이 가슴속까지 스미더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집 가까이 뒷산에 올라가 등교 길의 아이들과 정든 교사를 눈이 시도록 바라봤다. 이럴 것을 왜 호기있게 그만 둔 걸까.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교사, 나는 그때 무엇을 다시 꿈꾸었던 것일까. 등이 구부러진 할미꽃의 솜털을 가만가만 만지면서, 밤이슬 젖도록 뒷산 산책로를 하염없이 헤매면서 자문했다. 단순한 지겨움이었나. 삶이 변화하기만 하면 그뿐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멀쩡히 포장도로 위를 달리던 차를 세우고 훌쩍 맨발로 뛰어내렸던 것일까.
소설 탈고 뒤의 고통
아픈 허리를 치유하기 위해 국선도를 배우기 시작했고 난생 처음 헬스에 등록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도장으로 나갔다. 테이프를 틀어놓고 선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으면 지난 시간의 원망과 회한을 잊을 수 있었다. 러닝 머신에서 매일 기록을 늘려나갈 때면 백두대간과 안데스와 파미르 고원들을 무슨 주문처럼 외웠다. 그리고 하루 일과를 스스로 다잡았다. 아침 식사 뒤 산책, 2시간 글쓰기 작업, 식사 뒤 운동, 2시간 다시 작업, 식사 준비, 집안일, 다시 4시간 글쓰기. 그렇게 반년을 보냈다. 그리고 1300매 장편소설의 탈고를 했다. 다음해 1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소설가로 전직(轉職)을 이룬 것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더욱 아프고 쓰린 시간의 반추이다. 후회도 있고 미련도 많다. 나는 작가가 되고 내 소설이 세상에 발표되면 대한민국의 학교가 다 바뀔 줄 알았다. 주먹들은 소탕되고, 폭력교사는 추방되고, 학교는 신나고 살맛나는 곳으로 휙, 뒤집어질 줄 알았다. 옛부터 책이 가진 주술적 힘을 터무니없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책을 쓰는 일을 통해 경제적 자립도 당연히 이룰줄 알았다. 요즘처럼 철저히 시장 조사하고 준비하여 기획소설 내듯이 책을 낸다는 것을 당시엔 좀체 인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좋은 책은 어떻게 나오든 독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행운의 축복에서도 나는 비켜나 있었다. 출판 도매상들이 줄줄이 쓰러지던 무렵 내 책은 세상에 나왔다. 하여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책과 함께 모든 것을 다시 잃어 버렸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가족들과 마찰만 더 커졌다. 더욱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린 책의 내용이 걸렸는지 지역주민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제사 때 생선전을 부치다 말고 어쩌다 지방에 오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슬며시 사라지는 여자, 한밤중에 악몽에 눌려 공장에서 독가스가 나오니 산으로 가야 한다고 소리치는 여자, 유원지에 놀러와 행패를 부리는 주먹들한테 아이들이 얻어맞는 게 분통 터져 무술을 배워야겠다고 설치는 여자, 왜 엄마들만 아이들 급식부터 교통정리까지 도맡아야 하냐고 애꿎은 남편을 들들 볶던 여자….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이상한’ 여자일 뿐이었다. 처음엔 남편더러 어디론가 함께 떠나자고 했다. 고향이 가깝고 노모가 있는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숨을 쉬기도 음식을 먹기도 어려운 갑갑증 속에서 결국 나는 가족과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도리어 그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절 같은 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규정당하기만 한 삶, 그것을 야기한 그 모든 인연을 쳐부수고만 싶었다. 그랬다. 세상에 산다는 것이,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그저 버거웠다. 벌떼 같은 비난이 귀에 밀려왔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나, 때리길 하나, 돈이 없나, 애가 속을 썩이나.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내가 천하에 미친년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사회에 맞지 않는 미친년이다. 그래서 신성한 가족의 인연을 이 거룩한 사회에 기꺼이 반납했다.
이젠 결코 도망가지 않겠다
이제 나는 어디 서 있나.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희랍의 신화에 보면 레테의 강이 있다고 했다. 이승에서 저승까지 아홉 굽이를 돌아 건너다보면 지난 기억은 망각의 강물에 스러지고 만다는. 매일을 칼날 위에서 걷는 기분이다. 나는 이달 말까지 한편의 긴 소설과 두 번째 희곡을 끝내야 하고, 비록 한권도 내지 않았지만 새로 등록한 출판사를 책임지는 가운데 한편의 출판 기획을 진행중이며, 녹색대지 위의 전원주택에서 걸어나와 먼지 자욱한 도심의 단칸 작업실에 홀로 구겨박혀 있다. 그러나 결코 도망가지도 지치지도 않으려 마음먹는다. 오히려 많이 아플 때마다 껄껄, 호기롭게 웃는 나를 사랑한다. 옥상만 있던 이층 양옥에 포도주 보관실까지 딸린 지하실이 새로 생긴 까닭일까.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먼 훗날의 꿈, 발길 닿는 대로 세상을 돌며 쓰고 싶은 글을 그림 그리듯 쓰는 일, 하여 어느 날 붉은 석양을 보다 빙그레 웃으며 흰나비처럼 훨훨 날아오르는 꿈, 그런 걸 다시 꾸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언젠가 한번은 만나야 했던 사람, 까마득한 절망과 솟구치는 비상의 기쁨을 동시에 안겨준 ‘그’가, 아직은 내 주위를 서성이며 잠 못 드는 밤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일까. 비록 내일을 기약하기 서러운, 안개 같은 인연이라 할지라도.
이숙인/ 소설가 sookin8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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