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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이만 맡아주면 뭐든지 하겠소” 총성 없는 영·유아 보육전쟁… 할머니들이 등을 돌리고 친척간에 분쟁도 늘어난다
할머니들 “이젠 애 못 맡겠다”
맞벌이 부부들이 아이 키우는 고달픔을 나누는 인터넷사이트 ‘마주벌이 사랑일기’(cafe.daum.net/doublylove)에 올려진 사연이다. 사연의 주인공인 이영수(27)씨는 생후 10개월된 성현이의 엄마다. 이씨는 며칠 전 경기도 과천에서 친정이 있는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했다. 퇴근 뒤 친정에 들렀다가 집으로 가는 생활을 8개월쯤 하다가 결국은 손을 들었다고 한다. “신당동에서 안양까지 출근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지만 ‘제일 만만한 게 친정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괜히 눈물이 날 정도로 엄마께 죄송하네요.” 이씨처럼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맡아 키워주는 경우는 그나마 행복한 경우에 해당한다. 420만여명에 이르는 0∼5살 영유아의 부모들의 아이키우기는 ‘보육전쟁’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외친다. “아이 기르는 것, 전쟁이야. 전쟁. 전쟁통에 체면차리겠어?” ‘보육전쟁’은 최근의 사회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먼저 ‘손자·손녀 보기가 유일한 낙’이라던 할머니·할아버지들의 도움이 급격히 줄고 있다. 나이 들어서도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려는 노년층이 늘어나면서 아이키우기라는 ‘중노동’에 매달리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보육을 둘러싼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맞벌이 부부는 맞벌이 부부대로, 전업주부는 전업주부대로, 돈 있는 부모들은 있는 대로, 돈 없는 부모들은 없는 대로 머리를 싸맨다. 지옥 같은 보육의 책임이 두려워 여성들은 아이 낳기를 거부하고, 대안을 찾지 못한 이들은 미련없이 이민길에 오르기도 한다. 공무원 박아무개(39·서울시 길동)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중국동포(이른바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두 아이(4살, 5살)를 맡겼다. 한국말도 유창하고 부지런해 숙식 외에 한달에 110만원씩 주는 돈이 아깝지 않다. 박씨는 “둘이 합쳐 수입이 350만원 정도인 우리에겐 엄청난 부담이지만, 더이상 아내와 아이 키우는 문제로 싸우지 않아 좋다”며 웃는다. 지난해까지 박씨 부부는 놀이방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길렀는데 집안에서 큰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집안은 항상 난장판이었다. 어느 날 둘째아이가 엄마 아빠를 마귀처럼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는 박씨 부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매일 아이 앞에서 부부간에 “네가 목욕시켜라, 놀아줘라” 하고 떠넘기며 싸웠던 게 후회가 됐다. 처음에는 파출부를 찾았지만, 프리랜서인 엄마가 집에서 일을 하고 아이가 둘이라는 말을 듣고는 대부분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미련없이 소개소를 통해 중국동포 입주가정부를 두게 된 것이다. 집안어른들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며 나무라지만, 박씨 부부는 가정의 평화를 찾은 데 만족한다.
중국동포 입주가정부들 큰 인기
한때 아이들 영어교육 열풍과 함께 필리핀 여성가정부가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문화적인 차이로 요즘에는 중국동포를 훨씬 선호하는 추세다. 현재 국내에 체류중인 중국동포들의 숫자가 9만여명(법무부 추산)인 점에 비춰볼 때 입주가정부 숫자는 전국적으로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 99년 아이들 영어교육을 위해 젊은 필리핀 여성을 숙식가정부로 고용했던 김아무개(34·서울시 목동)씨는 낭패를 본 사연을 털어놓았다. 한국의 음식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 키워본 경험도 없는 그 여성은 아이들에게 콜라를 물처럼 권했다.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 건 한달도 안 돼서였다. 간장에다 밥을 말아 3살된 아이에게 떠먹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중국동포 출퇴근 가정부를 부르고, 이웃에 사는 누나에게 들여다 봐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시간제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연결해주는 베이비시터 전문소개소들도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주)아이들세상’ 정지아 실장은 “연회비 7만원을 내고 가입하면 원하는 시간에 베이비시터를 구할 수 있다”며 “비용은 2시간당 1만원이고 1시간 초과할 때마다 3천원이고 야간에는 할증된다”고 설명했다. 베이비시터들이 인기를 끌자, 1998년까지 3곳에 불과하던 전문소개소가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정 실장은 “믿을 만한 회사인지를 확인하려면 보험가입 여부를 꼭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동포 가정부, 파출부, 베이비시터 등으로 영유아들이 전통적인 보육자인 가족과 친척의 손을 떠나는 것은 노년층의 의식변화와 관련이 깊다. 특히 요즘에는 가사노동과 육아에 매달려 30대와 40대를 고스란히 바친 할머니들이 “애는 절대로 못 맡는다”고 버티는 경우가 많아졌다. 두달 전 첫아이를 출산한 김아무개(32·서울시 성내동)씨는 출산휴가를 끝내고 직장에 복귀하면서 이웃에 사는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려다 실패했다. 140만원 월급 가운데 70만원을 내놓겠다고 했는데도 거절당한 것이다. “어려운 사정을 잘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섭섭한 마음에 시댁으로 향하던 발길도 뜸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노인들은 생각이 이전 세대와는 크게 다르다. 둘째딸이 임신 9개월째라는 김순자(61·서울시 상수동)씨는 “딸이 계속 아이를 봐달라고 조르고 있지만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두달 산후조리를 도와주는 것까지는 모르지만 몇년을 아이에게 매여살기는 싫다”고 잘라 말했다. 김씨는 또 “친구들 중 손자·손녀를 책임지게 되는 사람이 나오면 모두 측은해한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21세기판 이산가족
주변 놀이방이나 개인적으로 봐주는 전업주부에게 맡길 경우 관건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이다. 아이의 보육환경이 운에 따라 결정되는 셈이다. 서울 홍은동에 사는 손주연(33)씨는 아침마다 16개월된 아들 찬솔이를 싸안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손씨 부부에게 위층 아주머니는 ‘은인’이다. 아이가 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불러 당혹스럽긴 했지만, 비용도 45만원으로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손씨는 “요즘엔 아이 봐주는 아주머니가 이사하면 따라가는 이들도 많다”며 “우리도 그렇게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반면 수원에 사는 김희재(30)씨는 아픔을 겪은 쪽이다. 김씨는 지난해 1월 정보지를 보고 이웃에 사는 전업주부에게 낮시간 동안 갓난아기를 맡겼다. 30대 초반인 그 주부 역시 6개월된 아이를 둔 터라 안심이 됐다. 보육비는 한달에 32만원이었고 우윳값과 기저귀값은 따로 냈다. 그런데 두달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 주부가 4명의 아이를 더 맡아버린 것이다. ‘도대체 6명의 갓난아기들을 한명이 안정적으로 돌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낮, 김씨는 아이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섯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잠을 자고 아주머니의 아들만 깨어 놀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김씨는 그 길로 곧바로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김씨는 그 뒤 또다른 전업주부를 찾아냈다.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봐줘 다행이지만, 퇴근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눈치가 보여 안절부절 못한다. 김씨는 “하루는 아이가 커피물에 다리를 데었다고 해서 속이 많이 아팠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며 “혹시 사고가 생기더라도 그 나이 때는 다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빨리 잊는 게 상책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가호호 보육사정이 절박하다보니 새로운 풍속도도 생기고 있다. 먼저 ‘21세기판 이산가족’을 들 수 있다. 아이가 둘인 경우 시댁과 친정에 각각 한명씩을 맡겨놓고 격주로 들여다보는 주말부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너도나도 아이를 맡기려 할 경우 ‘애 키워주기’를 둘러싸고 종종 ‘가족전쟁’도 벌어진다. 때로는 가족들 사이에 치유하기 힘들 정도의 깊은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인천에 사는 최수연(가명·32)씨는 지난해 생후 3개월된 갓난아기를 한달 동안 친정에 맡긴 적이 있었다. 친정에는 오빠의 아이가 이미 두명 있었다.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새 언니의 냉담한 얼굴을 대해야 했죠. 매일 오빠와 싸우는 것 같더라구요. 결국 오빠가 남편과 술을 마실 때 사건이 생겼어요. 오빠는 견딜 수 없는 모욕적인 말로 남편을 꾸짖더군요. 그날밤 친정은 아수라장이 됐어요. 우리는 밤 12시에 아기옷도 제대로 입히지 못하고 뛰쳐나왔어요. 사람을 왜 죽이는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미웠습니다.” 대전에 사는 김수정(가명·28)씨 역시 지난 설날 손윗동서와 다툰 탓에 지금까지 마음이 편치 않다. 김씨는 지난해 여름 낳은 첫애를 몸이 아픈 친정어머니에게 억지로 떠맡겨 놓은 상태다. “해가 바뀌면 시어머니가 길러주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운 형님댁 아이를 계속 맡아주고 둘째를 낳아도 길러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형님 아이는 4살이니 놀이방 보내고 이제 우리 아이 좀 맡아주세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옆에 있던 손윗동서가 마음이 상했나봐요. 순간 안색이 변하면서 ‘전문직인 동서는 돈을 많이 벌지 않느냐’고 타박을 하더군요. 결국 ‘아들 낳았다고 유세 떠는 거냐’는 험한 얘기까지 들어야 했죠.”
수입의 20∼30%가 유아보육에 투자?
서울 청담동에서 미술학원을 하는 유숙(38)씨가 딸 예린이(5)에게 고정적으로 쓰는 돈은 한달에 70만원이 넘는다. 유치원비 20만원, 문화센터 발레 8만원, 레고닥터 8만원, 베이비시터 35만원 등이다. 유씨는 “아이에게 과도한 학습을 시키지 않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며 “아이를 놀게 하는 데도 돈이 드는 형편”이라고 혀를 찼다. 경기도 평촌에 사는 일준이(4)의 경우를 보자. 일준이에게 매달 들어가는 돈은 어린이집 15만원, 피아노 방문레슨 12만원, 글쓰기 모임 7만원, 영어방문교사 4만원(교재 별도 30만원), 태권도 8만원 등 교재비용을 빼고도 모두 46만원이다. 분당, 일산, 평촌 등지의 주부들에 따르면, 이렇듯 유아교육을 위해 한달에 들어가는 평균 비용은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남들이 하는 것 정도만 따라가도 적어도 50만원 안팎이라고 한다. 특히 최근에는 생후 3살 미만의 영아들에게조차 교육 개념이 도입돼 사교육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늘어가는 실정이다. 국내 유아교육 관련 회사들이 개발했다는 영아용 학습지 등은 이미 필수과목처럼 돼버렸고, 생후 4∼5개월부터 시작하는 ‘시치다’(플래시 카드를 이용한 일본식 영유아교육방식)나 ‘오르다’(이스라엘 영재교육법) 등 교육상품도 자꾸 쏟아져 나온다. 외국인 교사가 영어만 쓰면서 가르친다는 이른바 ‘영어유치원’의 경우 이미 서울 강남→분당→일산→서울 강북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유아교육 문화의 전파경로를 밟은 지 오래다. 영어유치원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강북지역이나 신도시의 경우 한달에 30만∼40만원, 강남의 인기있는 학원은 한달에 50∼70만원 정도에 이른다. 게다가 최근 강남에선 유아의 재능을 조기에 발견해 키워준다는 영재학원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상위 1% 또는 3% 안에 속하는 유아들을 테스트를 통해 선발한 뒤 집중적인 영재교육을 시킨다는 학원들의 선전에 학부모들이 솔깃해 하면서, 압구정동에 사는 유명 탤런트 ㅇ씨의 아이는 6번이나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서울 대치동에 사는 주부 임균식(33)씨의 말을 들어보면 강남의 영유아교육 열풍은 부모들 사이에 도미노처럼 번져 과잉학습을 부채질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이 또래 친구들을 보면 취학 전에 예체능은 물론 국어·영어·수학·과학까지 배우는 걸 당연하게 여겨요. 소신껏 아이를 기르겠다고 다짐했지만 마음이 흔들립니다. 혹시 이런 문화를 접해보지 않아서 친구가 없어지거나 왕따를 당하지는 않을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부터 학습부진아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죠. 정말 방법을 모르겠어요.”
‘보육의 질’을 고민할 겨를이 없다
보육시설과 내용은 학부모를 혼돈상태에 빠뜨릴 정도로 포화상태이지만 그나마 선택할 여지가 있는 이들은 다행이다. 저소득층의 아이들은 ‘요람’에서부터 보육기회를 박탈당하기도 한다. 소득수준이 낮은 부모들에게 그럴듯한 사교육 기관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여섯살된 아들과 갓 두돌이 지난 딸을 두고 있는 신순자(35·서울시 대림동)씨는 한달 수입이 70만∼80만원인 미싱 일을 하고 있다. 신씨가 찾아낸 방법은, 딸은 비슷한 시기에 애를 낳은 시누이집에 데려다 놓고 아들은 동네 놀이방에 맡겨놓는 것. 하지만 일이 몰릴 때면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신씨는 밤 늦은 시간까지 큰애를 맡아줄 놀이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한 군데를 찾아 웃돈을 얹어주고 2년째 보내고 있다.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놀이방에서 하는 교육이 어떤 것인지, 보육의 질은 어떤지 등에 대한 관심을 쏟기에는 신씨는 너무 시간이 없고 피곤하다. 그냥 큰 사고없이 잘 데리고 놀아주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돈이 있는 부모들은 ‘보육의 질’을 고민하지만 마땅한 잣대가 없어 혼란스러워하고, 돈이 없는 부모들은 안정적인 보육시설을 찾느라 허덕이고 있다. 부산대 유아교육과 임재택 교수는 “우리 사회의 미래이기도 한 아이를 기르는 일이 아직도 개인과 개별 가정의 책임으로만 남겨져 있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등 사회유지의 기본틀마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총성없는 전쟁, 영유아 보육전쟁을 멈추게 할 묘책은 없는 것일까.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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