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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맡길 데’는 많아도 ‘맡길 수’가 없다 부모들이 믿지 못하는 어린이집과 유치원… 시설난립에 과당경쟁·편법운영 판친다
며칠 전 둘째 손녀를 업고 길을 걷던 임아무개(60·경기도 과천시)씨는 한 원아모집 플래카드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꿈과 사랑을 키워가는 OO”라는 글자 밑으로 다음과 같이 줄줄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MBC아카데미 자매유치원. BR(뇌호흡) 유치원. 한국유아교육개발원. 현장연구회 오르다코리아. 한국행동과학적성연구소.” 대체 저것들을 다 한다는 건지, 저런 단체들과 손잡고 한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관리감독 손놓았나
임씨는 두 손녀를 거두고 있다. 한데 큰손녀가 다닐 유치원을 아직 못 정하고 있다. 벌써 일부 유치원은 원아모집이 끝났다고 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할지 정보도 없고 믿을 수도 없어 마음만 급하다. 지난해 가을 인근 ㅇ유치원에서 원아 수를 속여 과밀반을 만들고, 각종 비용을 편법으로 거두었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더욱 그렇다. 과천 o유치원 사례는 학부모 113명 명의로 관할 안양시교육청에 민원이 제기되고 교육부에도 진정서가 접수됐던 사항이다. 감사결과 학부모쪽의 주장이 상당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ㅇ유치원은 정원 35명인 7살반에 57명을 뽑았으나 학부모에게는 계속 40명이라고 속였고, 수업료, 재능교육비, 재료비 등을 과도하게 거두어 부당이득을 취해왔던 것이다. 두 아이를 이곳에 보냈던 학부모 이아무개(39)씨는 “다른 데보다 비싼 유치원이라 시설이나 교육내용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씨는 참교육학부모회와 전교조 등을 쫓아다니며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서 ㅇ유치원의 경우는 비리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인천지역에서는 성추행을 했던 사람이 시설 문을 닫은 뒤 또다시 이름만 바꿔 같은 자리에 보육시설을 세운 경우고 있고, 부산에서는 일수놀이를 하는 사람이 교육자로 둔갑해 어린이집을 세운 사례도 있었어요. 하지만 행정 차원의 관리감독이나 지도기능은 거의 유명무실한 것 같아요.” 이씨는 관할 120개 유치원이 있는 안양시교육청의 경우 담당공무원이 딱 1명이고 장학사도 1명뿐이었다며 답답해했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취학전 아이를 위한 보육제도는 교육부-교육청 관할의 3∼5살 대상 반일제 유치원과, 보건복지부-지자체 관할의 0∼5살 대상 종일제 보육시설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유치원, 어린이집, 놀이방, 학원, 선교원 등의 시설이 난립하고, 민간부분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인가제인 유치원의 경우는 전국 8500여곳 중 사립유치원이 과반수를 넘고, 신고제인 보육시설은 민간시설이 80%를 넘는 형편이다. 2000년 6월 현재 전국에는 국공립보육시설 1290곳, 법인보육시설 1992곳, 민간개인시설 8846곳, 놀이방 6664곳이 설치·운영되고 있고, 단체 및 직장보육시설은 각각 311곳, 222곳이다. 국공립보육시설은 점차 감소하는 반면, 민간개인의 보육시설은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다(도표 참조). 이는 95년부터 국민연금기금을 이용해 민간보육시설을 세우려는 이들에게 저리의 융자제도를 실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제도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지역별로 시설이 집중되거나 과당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몇백명씩 줄 서서 대기하는 시설이 있는가 하면, 바로 옆 시설은 정원에 미달돼 문을 닫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50명 규모의 어린이집을 경영하는 김아무개(41·서울시 신림동)씨는 “사실 애들 머릿수가 돈이다. 경영도 원칙대로 하고 교육자적 양심도 지키기란…, 내 돈 쓸어박고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털어놓는다. 김씨는 공식적인 보육료를 깎아주는 대신 비공식적인 특별교육비, 예능교육비 등을 받아 재정을 충당한다. 남들과는 다른 교육내용을 선전해 아이들을 끌어오지 않으면 수지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과잉경쟁에는 교사들도 내몰린다. 서울 장위동의 한 어린이집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양아무개(29)씨는 “분반을 해서 지원금을 받은 다음 학부모 모르게 한 교사에게 두반을 돌보게 하기도 했다”며 “원아모집을 할당하는 건 그렇다쳐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수업내용이나 간식에 대해 집에 가서 부풀려 이야기하도록 아이들에게 시키는 것이었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어느 어린이집 교사의 양심선언
미술학원 스포츠센터까지 유치원으로 둔갑하고, 어린이집과 놀이방에서 예체능을 가르치는 희한한 풍토 속에서 부모들은 괴롭다. ‘맡길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맡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중삼중으로 보육시설을 이용하거나, 각종 방문교육과 소모임 등으로 아이들을 ‘돌리는’ 부모들도 많다. 경기도 안양에 사는 정현자(32)씨는 아이를 시간제로 분산시켜 각 시설에 보낸다. 정씨는 “하루에도 몇개씩 시설이 생기고 또 문을 닫으니, 한 군데에만 보내기가 몹시 불안하다”고 말했다. 시설난립과 과당경쟁 속에서는 소신있는 부모의 철학이나 선택권이 무시되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인천에 사는 이선기(35·교사)씨는 지난해 봄 다섯살된 아이가 ‘깍두기공책’에 받아쓰기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유치원에서 내준 숙제였다. 알고보니 아이는 국어, 영어를 포함해 수학까지 배우고 있었다. 이씨는 원장을 찾아가 “우리는 아이에게 학습을 일부러 안 시킨다. 적어도 숙제는 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건의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원치 않으면 옮겨달라”는 것이었다. 요즘은 어디나 그렇다는 게 원장의 설명이었다. 이씨는 다른 시설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교육내용을 부모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데가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유치원에서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내용은 특별교육이다 재능교육이다 해서 별도의 돈을 내는 항목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부모들이 모두 돌아간 뒤 안경자(37) 원장은 “사회운동하는 심정으로 일한다”고 털어놓았다. 보육교사들이 자본금을 공동출자해 세운 이 어린이집은 시설환경을 비롯해 원아 수, 교사 수, 수업료, 간식까지 법적인 기준을 지키고 있다. 안 원장은 “시설마다 보육철학도 다르고 대상 아이들의 가정환경도 다른데 지원방식은 너무나 획일적이다. 그러니 과당경쟁, 편법경쟁이 더 심해진다. 말로만 공보육을 외칠 게 아니라 현실적인 정책이나 제도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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