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주권을 팽개친 ‘슬픈 한국’강대국 얽힌 문제에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 굴욕적 외교에 국가의 자존심이 짓밟힌다
“불평등한 소파협정 전면개정하라.” “한국 정부는 노근리사건 해결에 적극 나서라.” “매향리 미군 폭격장을 즉각 폐쇄하라.” 12월6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맞은편 전쟁기념관 앞.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주민대책위’, ‘파주 스토리사격장 비상대책위’ 등 누가 어느 단체 소속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뒤엉킨 300여명의 시위대가 일제히 함성을 외치고 있었다. 온 곳은 달라도 함성이 향하는 곳은 주한 미8군사령부와 국방부였고 목소리 역시 하나였다. “미국은 사죄하라! 정부는 주권을 지켜라!”
종군위안부·노근리 학살·소파 개정…
순식간에 미8군 정문 앞까지 400여m에 이르는 분노의 인간띠가 형성됐다. 시위대의 외침이 매서운 찬바람을 가르고 있던 이 시간, 전쟁기념관 안에서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처리를 위한 한·미 대책단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텅빈 겨울 하늘을 뒤흔들던 시위대의 함성과 호루라기 소리는 어느새 길 맞은편 국방부를 향하고 있었다. 노근리 학살로 형과 아버지를 잃은 구재우(61)씨는 “이제서야 한이 풀리나 생각했는데 미국도 진실을 회피하고 있고 우리 정부도 제대로 나서지 않고 있는 것 같다”며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정부가 우리의 외침을 외면해왔겠느냐”고 분노를 터뜨렸다. 구씨는 이어 그동안 노근리 학살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 것뿐이었다며 몸서리를 쳤다. 옆에서 듣고 있던 노근리 피해자 양해찬(60)씨가 나섰다. “지금 꼴을 보면 미국은 축소하려 들고 우리는 미국 눈치보기에 급급합니다. 주미 한국 대사라는 사람이 노근리는 소수의 문제일 뿐이라고 허무맹랑한 말만 늘어놓고 있잖아요. 국민의 아픔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는 정부를 누가 믿겠습니까.” 노근리의 싸움은 50년전 과거와의 싸움이지만 주한미군을 둘러싼 갈등은 현재와의 싸움이다. 이날 집회에는 검게 그을린 구릿빛 얼굴이 유난히 많았다. 파주 스토리 미군 사격장과 싸우고 있는 농민들도 그랬다. 스토리사격장은 지난 73년 주민들의 동의없이 국방부가 미군에 부지를 넘겨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충돌을 빚고 있는 곳이다. 스토리사격장 주민대책위 조봉연씨는 “땅 주인들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농지를 미군에 넘겨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우리 정부는 도둑이고 미군은 장물아비인 셈”이라고 핏발을 세웠다. 얽힌 국가가 일본이지만, 집회에 나온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양순임 명예회장의 울분 역시 우리 정부를 향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일부 유골이 행방불명된 상태입니다. 진상을 밝혀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는데도 정부는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이 무성의로 일관하고 있어요.”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는 “48년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골 7천여기가 국내로 전달되면서 상당수가 유골 대신 위패만 온 것으로 추측된다”며 “미 군정 때라 누가 건네받고 어디로 전달됐는지 기록을 찾기 어렵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정부와 미군에 대한 분노는 다음날인 7일에도 이어졌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소파) 개정 협상 마지막날인 이날,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소파 전면개정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불평등한 소파개정국민행동’ 차승렬 국장은 “미국이 ‘우리가 나간다고 하면 너희들이 있어달라고 매달릴 것’이란 식의 배짱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대등한 협상테이블이 되겠느냐”며 “우리쪽도 친미적 사고에 갇히지 말고 강경하게 나가야 협상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미국이 성의있는 협상태도를 보여줘야 하지만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대등한 관계에서 국민들의 인권을 지키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상실한 과거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확보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법적인 독립에도 불구하고 정치군사적 차원에서 미국에 종속되어왔다. 하지만 현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사회학)는 “권력엘리트들이 그동안 권력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 미국에 타협적으로 적응해온 게 사실”이라며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직접 협상을 담당하고 있는 관료수준으로 가면 지레 타협하려드는 태도들이 강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친미적 사고에 인권 방치… 구겨진 자존심
12월8일, 멀리 일본 도쿄에서도 한맺힌 분노가 터져나왔다. 남북한, 중국, 대만 등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군대 위안부 문제의 국가책임을 규명하는 ‘2000년 국제여성전범법정’을 연 것이다. 이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일본이 배상회피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65년 한·일협정에 대한 해석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의뢰하라고 한국 정부에 촉구했다. 반인륜적 전쟁범죄인 만큼 국가차원의 협정과 상관없이 일본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씨도 한·일관계 훼손을 우려해 과거사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정부를 원망했다. “우리 정부는 한·일협정 타령만 하고 있지만, 일본 국회의원도 한·일기본조약으로 희생자 개인들의 문제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이 정도의 말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외교통상부는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단 65년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됐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정부차원에서 한·일협정에 대한 해석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하면 끝없는 논쟁만 계속될 뿐”이라며 “무슨 ‘큰’ 충돌이 있거나 해야 하는데 ‘그런’ 일로 국가간에 사법재판소까지 갈 일이냐”고 되물었다. 여기에는 정부차원의 일과 민간차원의 일은 분리돼야 한다는 정부의 인식이 깔려 있다. 문민정부 시절 위안부 생활안정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조처는 일단락됐다는 시각이다. 외교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일제 과거사와 관련된 배상과 보상 청구권은 양국간에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과거사를 일단락짓고 미래지향적으로 가자고 양국이 공동선언을 한 마당에 (위안부 문제로) 한·일관계가 흔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 더이상 ‘과거를 묻지 말자’는 얘기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태도는, 한·일협정이 비록 과거 정권 때의 일이긴 하지만, 한-일간 과거청산 작업이 헝클어진 것은 당시 이뤄진 정부의 비공개협정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 성공회대 이종구 교수(사회학)는 “군대 위안부 문제는 국내에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탓에 일본에 질질 끌려가는 측면도 있다”며 “한·일협정 때문에 현 정부가 자신없다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한 뒤 민간의 노력을 돕기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밤낮으로 미군 폭격이 계속되고 있는 매향리는 주권을 잃은 우리 정부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매향리 폭격장 폐쇄를 위한 범국민대책위 김종일 위원장은 “다른 나라에서는 해당 국가의 반대에 부닥쳐 폭격장을 만들 수 없으니까 미군이 만만한 우리나라에 오는 게 아니냐”며 “국민의 생존권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 정부가 주권국가인지 의심스럽다”고 개탄했다. 물론 미군이 군사훈련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훈련의 목적이 국민과 주민보호라는 점을 감안할때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매향리 폭격장은 모순을 낳고 있다. 이를 동국대 홍윤기 교수(철학)는 국가적 분별력 상실 탓으로 분석했다. 그는 “미국에 일방적으로 신세지고 있다고 생각해온 정부가 주민피해 등 여러 이해관계를 국가이익으로 뭉뚱그려 생각해온 데서 주권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며 독일의 사례를 들었다. 2차대전 직후 동맹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미군이 들어와 있던 상황에서도 독일은 미군에 의한 환경파괴가 발생하면 국가적 처지와는 별개로 보고 즉각 동등한 생활권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철저한 해결만이 건전한 국가관계 형성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말하는 진정한 한·미 우호관계는 이렇다. “소파협정이든 노근리 문제든 미봉에 그치면 여진을 남겨놓게 된다. 장기적 관점에서 건전한 한·미관계를 위해서는 철저한 해결이 이뤄져야 한다.” 역사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고 말했다. 노근리 양민학살 피해주민, 파주 스토리 사격장의 농민,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강제징용 피해자…. 그들은 오늘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며 싸우고 있다. 이들은 묻는다. 한국 정부는 과연 주권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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