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그들은 늘 엎드려있는가방향감각 상실하고 오락가락하는 공직사회… 도대체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쓰리고!’ 고스톱판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하는 일은 미루고, 잘못은 덮고, 남의 일은 말리고…’를 압축한 말이다. 바로 요즘 공직사회를 빗댄 세간의 우스개이다. “공무원들이 일을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뛰기는 뛰죠. 그런데 문제는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 빚어지는 겁니다.” 한 경제부처 간부의 토로이다.
완전히 움추려든 보건복지부
공직사회의 밑바닥 정서는 더욱 심각하다. 의약분업 시행과 관련해 지난 6개월여 동안 홍역을 치른 보건복지부. 하도 이리저리 치여서 그런지 복지부 직원들 사이에는, ‘규정상 처리해야 할 일 말고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말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한다. 한 직원은 “그동안 힘을 다 빼 이제는 더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도 없고 주어진 일도 마지못해 한다”고 털어놓는다. 공직사회를 나무라는 여론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있다. “자리를 잠시라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정말 죽자사자 일했죠. 하지만 남은 게 뭐죠? 온갖 욕이나 얻어먹고…. 의약계, 시민단체 등에 이리저리 끌려다녀 하고 싶은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게 오늘의 공무원 아닙니까?” 공직자로서 ‘국민을 위한 개혁정책’을 집행하려고 하는데도 되레 ‘국민의 반발과 원성’만 사는 일을 더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이다. 여기에다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사정이 전개된다고 하자 공직사회는 더욱 움츠러들고 있다. 아니 불만이 많다. 부정과 비리가 있으면 조용히 처리하면 될 것이지, 나팔을 불어가며 모두가 범죄자인 듯 시작하느냐는 것이다. “수술할 때는 마취제를 놓아야 하듯이 사정을 하려면 대상자들이 모르게 조용히 다스려야 하는데 동네방네 떠들면서 시작하면 공무원들은 복지부동하는 게 당연한 생리이다. 수없이 사정작업을 겪어봤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상습적 부정·비리 공무원들은 고객을 팍 숙여 살아남고 어쩌다 한번 실수한 사람들만 전시용으로 걸려든다.”(재경부 관계자) 공무원은 개혁의 ‘손발’이다. 국정 목표가 있으면 이를 실행하는 사람들이 공무원이다. 그런데 요즘 이런저런 어수선한 이유로 개혁의 손발이 마비상태에 빠져 있다. 손발의 마비현상은 혹독한 추위와 같은 외부환경 탓으로 생길 때도 있지만, 두뇌에 이상이 생기거나 기초체력이 지나치게 떨어졌을 경우가 더 많다. 즉 내부요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고치기 힘든 병세이다. 요즘 공직사회의 문제를 말하자면 더욱 그렇다. 금융·기업구조조정의 야전사령부격인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실무관계자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지난 2년여 동안 구조조정 작업을 되돌아보면 문제를 풀어나가는 큰 틀을 정해놓지 않고서 그냥 대증적 요법에 매달렸다. 대우와 현대사태가 단적인 사례이다. 우리 보고 왜 금융논리로만 접근하느냐고 비판하는데 그러면 누가 다른 차원의 정교한 논리로 해법을 제시해줘야 할 것 아니냐. 하지만 대부분 나 몰라라 하며 나중에 뒤에서 욕만 한다. 암환자를 외과의사한테만 맡겨둔 격이다.” 금감위의 또다른 관계자도 “요즘에는 도대체 국정운영의 지표가 있는지, 경제개혁의 구체적인 이정표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식 처방만 하고 있는 처지를 스스로 개탄했다. 공직자들의 이런 방향감각 상실이 바로 부처간 불협화음과 ‘오락가락 정책’을 낳는다.
‘현대사태’ 정부태도를 향한 비아냥
정책일관성 실종의 대표적인 사례는 현대건설 처리과정에서 보여준 정부 태도이다. 정부는 처음에 현대건설 스스로 자구노력을 해 상거래어음을 막지 못하면 곧바로 법정관리에 넘기는 게 ‘확고한 방침’이라고 했다가, 며칠 만에 ‘어떻게 해서든 다시 살린다’는 쪽으로 방침을 틀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씨 가족들이 나서야 한다”며 현대 전체 계열사는 물론, 친족 관계사들까지 동원해 현대건설 유동성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진념 재경부 장관과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직접 정씨 형제들을 만나 “가족들이 현대건설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설득을 했다. 이는 현대그룹과 그 관계사들을 ‘정씨 일가들만의 기업’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정부 스스로 그토록 강조해온 ‘계열분리에 의한 독립경영의 원칙’과는 어긋나는 처사이다. 현대건설의 부도에 따른 엄청난 파장을 감안했을 때 이런 고육책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재경부 장관까지 나서서 정씨 형제들을 압박한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증권가에서는 ‘만약 현대사태가 악화됐을 경우에는 전체 현대계열사들의 소액주주와 채권단이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됐다’는 비아냥까지 나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 관료들은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책임을 회피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지난 9·10월에 한보철강과 대우차의 매각이 잇따라 무산됐을 때 정부 관료들은 그 책임을 대우구조조정협의회와 제일은행 등 민간 협상창구로 몰아갔다. 정부가 한보철강과 대우차의 해외매각방침을 정하고, 실무협상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모든 책임을 민간에만 떠넘긴 채 책임론을 비켜가는 염치없는 행태를 보였다. 정부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기까지 1년 동안만 모든 투쟁과 정쟁을 중단하자”(진념 재경부 장관)라는 제안이 제대로 먹혀들 리가 없다. 개혁은 반드시 책임과 고통 분담이 따라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서민과 노동자들의 고통만 컸을 뿐 정작 책임져야 할 계층이나 사람들은 별로 변한 게 없다. 개혁은 법과 제도를 바꾸는 데서 출발한다. 또 법과 제도는 사람이 바꾼다. 그런데 이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운용할 주체들, 즉 관료들이 요즘 개혁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많다. 정부가 개혁할 능력 이전에 개혁의지를 실종했다는 것이다. 가령 정부가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한 기업지배구조개선 관련 법안을 보면, 집단소송제나 집중투표제 같은 핵심과제가 빠지거나 유보됐다. “집단소송제는 기존 소송법체계와 맞지 않고 집중투표제는 재계의 반발이 워낙 커 장기과제로 넘길 수 밖에 없다”는 게 정부 관계부처인 재경부와 법무부의 설명이다. 정부의 설명대로라면,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기존 질서 안에서 개혁방안을 찾아야 하며 개혁의 대상에 동의를 얻어야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된다. 이 밖에도 정부가 다른 주요 개혁법안들은 추진하는 과정을 보면 ‘개혁에 대한 철학과 소신의 부재’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늬만 개혁법안이지 막상 성사단계에 들어가면 저항세력들의 논리에 밀려 알맹이가 빠지는 게 다반사이다. 반부패기본법에는 검찰과 감사원의 반발에 밀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반부패특별위원회의 조사권이 빠졌으며, 자금세탁방지법은 정치권의 저항 때문에 정치자금을 처벌대상에서 제외했다.
의약분업 시행과정의 교훈
의약분업 시행이 진통을 겪은 것도 따지고보면 관료들의 개혁의지 부족과 무사안일한 태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다. 의약분업은 지난 93년 한약분쟁과정에서 성사된 약사법개정안에 99년 7월부터 실시하도록 일찍이 확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때는 물론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복지부 장관들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 수 있겠느냐’는 듯 준비를 소홀히 했다. 의약분업을 하기 위해서는 의사와 약사들의 동참을 얻기 위한 설득작업, 의료재정의 확보, 약효시험과 분업대상 약품의 체계적인 분류, 대국민 홍보, 시범사업 등을 충분히 밟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복지부 관료들은 이런 걸 알면서도 “미리 평지풍파를 초래할 필요가 없다, 그때 가면 되겠지” 하는 식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야 허겁지겁 움직였다. 허윤정 건강연대 건강네트워크 실장은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 보여준 복지부 공무원들의 태도를 보면 이들이 의약분업을 할 의지가 있는지 근본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국민건강을 위한 주요한 보건개혁 과제였음에도 의약분업은 급기야 의사, 약사, 시민단체 모두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했다. 오늘은 이 자리에서 합의해놓고 내일은 딴 소리해서야 누가 신뢰하겠느냐. 의약분업의 진통을 겪는 과정에서 현 정부 관료들에게는 원칙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이창곤 기자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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