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얼음장 경제의 숨통을 뚫어라!

오래 지속될 저성장시대의 생존전략 모색… 불안심리 떨치고 일상의 거품 제거해야

부인과 20개월된 아들을 두고 있는 ㄱ사 채권관리부 오아무개(34) 대리. 월급은 제자리 걸음인데 물가는 나날이 올라 가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다고 하소연이다.

가장 큰 부담은 전세금 인상. 서울 창동에 있는 21평짜리 아파트 전세값이 올해 5월까지 4천만원이었는데 집주인 요구에 못 이겨 5700만원으로 올려주는 바람에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나마 2500만원을 올려달라는 것을 사정사정해서 깎은 게 이 정도다.

오 대리의 회사는 페인트를 만드는 업체로 건설경기를 타기 때문에 최근 들어 형편이 무척 어려운 실정이다. 동아건설 등 건설업체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적게는 2억원, 많게는 10억원 정도의 부도어음이 무더기로 생겨나고 있다. 오 대리의 경우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축에 든다. 부인이 간호사로 일하고 있어 동료들에 비해선 그나마 다소 여유있는 편이다.

TV·컴퓨터 모니터를 생산하는 ㅎ사(경북 구미) 용해 라인에서 일하는 서아무개(34)씨. 시급제로 일하는 서씨가 야근수당을 합쳐서 한달에 받는 돈은 120만∼130만원 수준. 상여금을 합쳐 연봉은 대략 2천만원이다. “저축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가는 정도지요. 경제 난국에서 월급 인상은 꿈도 꾸지 않고, 회사가 문닫는 일이나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실업자 100만명 시대가 다시 온다면…

건설업체를 중심으로 한 2차 기업퇴출(11월3일) 발표에 대우자동차 부도 등으로 이어지는 경제 난국을 맞아 일반 서민들의 심신은 고달프기만하다. 오 대리나 서씨는 그럭저럭 굴러가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 심각한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실직한 이들도 크게 늘어났다. 또다시 실업자 100만명 시대가 올 것이란 우울한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요행히 직장에서 ‘밥줄’을 놓치지 않고 있는 이들 또한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어느새 성큼 찾아온 겨울 날씨는 서민들의 어깨를 더욱 움츠리게 한다. 내년 이후에 대한 전망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지금 당장이 고통스럽다. 연초부터 국제유가 급등으로 국내 기름값이 크게 올라 주름살이 패기 시작하더니 하반기 들어 상·하수도 요금이 올랐고 지하철 요금을 비롯한 다른 공공요금도 대폭 인상됐다.

서민층한테는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달픔 못지않게 견디기 힘든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또다시 경제가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우리 회사는 괜찮을까’, ‘나도 실업자 대열에 끼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애들 공부나 제대로 시킬 수 있을까’, 걱정과 불안이 꼬리를 문다.

정부는 올해 말, 내년 초에 걸쳐 2차 금융·기업구조조정(부실 청소작업)을 완결짓고나면 경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고 ‘분홍빛 신호’를 내보내고 있지만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다. 1차 구조조정(개혁)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고 요란하게 선전한 뒤에 또다시 맞은 경제위기라서 그렇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각 경제연구기관들이 쏟아내는 내년 경제전망에서도 서민들의 실낱같은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KDI는 최근 발표한 ‘2000∼2001년 국내 경제 전망’을 통해 올해는 수출신장에 힘입어 연 8.9%의 성장이 예상되나 내년에는 이보다 훨씬 낮은 5.4%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나마 내년 전망에는 ‘신속한 구조조정이 성공을 거둘 경우’라는 전제가 달려 있다. 여기에는 구조조정 부진으로 금융불안이 지속·증폭될 경우 더욱 급속한 경기하강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가 담겨 있다.

더구나 KDI는 교역조건 악화(수입품 값은 오르는데, 수출품 값은 내려)로, 실질구매력을 나타내는 GNI(국민총생산) 증가율이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을 크게 밑돌아 체감경기는 지표경기보다 더욱 싸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조조정 성공해도 성장률 크게 둔화

한국금융연구원도 내년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하강세에 접어들면서 경제성장률이 올해의 9.0%보다 크게 낮은 6.2%에 머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 소비자물가는 올해의 2.5%보다 높은 3.5%, 경상수지 흑자는 올해보다 대폭 줄어든 55억2천만달러에 머물 것으로 내다봤다.

산업연구원(KIET)와 삼성경제연구소 등 다른 경제연구기관들의 전망도,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주조는 똑같다. ‘경상수지 흑자는 대폭 줄고, 물가는 올해보다 더 오르고, 성장률은 크게 둔화된다’는 어두운 전망 일색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 이후 숨가쁜 구조조정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은 허리띠를 거듭 졸라맸는데 도대체 왜 경제는 좋아지지 않고 자꾸 어려워지기만 하는 걸까. 올해, 내년 고비를 넘기고나면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경제학)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단순한 경기순환 차원이 아니다”며 “앞으로 2∼3년, 나아가 10년 가까이 저성장 국면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문가들 사이에는 요즘 경기가 위축되는 조짐을 장기불황의 서곡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강 교수는 “우리나라 경제는 IMF 사태 이전부터 수익성이 악화되고 경쟁력이 떨어져 있었는데 그뒤 제대로 구조조정을 하지 못했다”며 “구조조정은 1, 2년이란 짧은 시일에 되는 게 아니라 적어도 5, 10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기업부도 및 이에 따른 금융 부실이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동철 KDI 연구위원은 “우리 경제가 처한 발전단계로 보더라도 낮은 성장률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조 연구위원은 우선 인구증가율의 둔화를 경제성장의 한계로 꼽는다. 경제라는 게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데, 사람이 늘지 않으면 경제의 캐파(용량)도 제자리 걸음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이란 고상한 용어도 동원된다. 알기 쉽게, 화분에 국화 꽃을 키우는 일에 비유해보자. 한 화분에 한 송이를 키우면 쑥쑥 잘 크지만 열 송이를 한 군데 몰아 심어놓으면 서로 부대껴 제대로 클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70년대 이후 정부 주도로 특정 산업에 재원을 몰아주면 투입하는 대로 경제가 쑥쑥 커왔지만 그런 식의 성장모델은 어느덧 한계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김대중 정권 들어 구시대 성장모델의 상징인 재벌을 대체할 세력으로 벤처기업이 급속히 부각했지만 ‘정현준 사건’ 등으로 업계 전체가 커다란 타격을 입고 말았다. 마땅한 자원이 없는 현실에서 두뇌자본을 무기로 하는 벤처는 여전히 희망의 씨앗이다. 그러나 재벌을 대체하고 경제 전체를 이끌 만한 힘을 발휘하기에는 아직 힘겨워 보인다.

“지금까지 흘러온 우리 경제를 한번 되돌아자. 정부 주도 아래 특정 산업에 힘을 몰아줘 거기서 ‘대박’이 터지면 잘되고 안 되면 ‘쪽박’ 차는 식 아니었나. 이젠 시장의 힘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으로 바꿔가야 하는데 착오가 많을 수밖에 없다. 지금 겪는 혼란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강석훈 교수)

결국 지난 수십년 동안 쌓여온 박정희식 고도성장모델의 쓰레기를 치우는 과정을 구조조정, 또는 경제개혁이라고 할 때 이를 1∼2년 만에 끝낼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잘못됐다는 얘기이다.

구시대 성장모델 폐기… 막연한 기대감 금물

기업들이 새로운 경제환경에 맞게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는 것처럼 가계나 개인도 구조조정에 나서야 할 실정이다. 무엇보다 기대심리를 대폭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내년 하반기쯤이면 예전 같은 고도성장세를 회복할 수 있으리는 막연한 기대감은 아예 접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각 연구소의 전망대로 내년 경제성장률이 5∼6% 정도에 이르면 경제가 미풍을 타고 순항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미국이 전후 보기드문 장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다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연간 성장률은 고작 4%대이다.

고도성장에 따른 인플레 기대심리, 이를 근거로 한 투기심리가 바로 우리 경제를 구조적 난국에 빠지게 했다. 기업의 경우 순수한 영업활동에서 이익을 내기보다, 이리저리 꿀 수 있는 돈은 마구 끌어당겨 부동산과 같은 실물에 투자하면 그 실물가치 상승에 힘입어 덩치를 계속 불려오다가 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계도 근로소득보다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로 한몫 챙기기에 더 기대를 걸어왔다. 이제부터는 기업이나 가계 모두 보유자산의 값어치가 올라갈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버텨보자는 자세로 안주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또 성장의 속도가 다소 주춤한다고 해서 각 경제주체들이 여기에 현명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했을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IMF 구제금융 직후 몇개월 동안 나타난 투자와 소비의 과잉위축 현상이 이번에는 오랫동안 지속될 수 가능성이 있다. 당시 기업들은 곧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떨면서 불필요한 비용삭감까지 단행했으며, 가계에서는 소득이 줄어든 폭 이상으로 소비를 줄였다. 심지어 중·하위층 도시근로자 가구는 의료비 지출까지 줄인 것으로 당시 통계층 조사에서 나타났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참았던 것이다.

요즘 IMF 직후의 이런 이상징후들이 재발할 가능성이 커졌다. 올 하반기 들어 경기하강 압력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소비인데, 내구소비재 출하증가율은 7∼8월부터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더니 9월에는 무려 23.5%나 떨어졌다. LG경제연구원은 “소비의 결정요인이라 할 수 있는 성장률 둔화나 자산가격 하락으로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위축되고 있다”면서 “이런 ‘자발적’ 소비감소에 따른 경기하강은 새로운 하강압력을 낳아 경기회복 기간을 더욱 지연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LG경제연구원은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우리 경제가 일본처럼 ‘W자형 장기불황의 악순환’에 빠져들 가능성까지 내다봤다.

전문능력으로 무장해 적응력 키워나가야

강석훈 교수도 “지금 우리 경제는 예전과 달리 국내외 시장이 완전히 개방돼 있어 국내 시장조차 다국적 기업에 뺏길 가능성이 많아 자칫 ‘일본+중남미 경제’로 갈 수 있는 상황이며 외환위기 때만큼의 충격은 아니더라도 위기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특히 현 정부의 집권 후반기 들어 정치적 리더십이 크게 약화될 가능성을 “걱정스런 대목”이라고 꼽았다. 각 경제주체들의 지나친 위축은 미래에 대한 불안심리 때문이고 이를 제거하려면 과감하고 신속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하는데 정치적 리더십 부재로 어려워질 수 있다는 얘기이다.

어쨌든 서민들은 이래저래, 올 겨울만이 아니라 앞으로 더 길게 이어질 수도 있는 ‘경제 겨울’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경기전망, 우리 경제에 대한 장기전망까지 비합리적으로 비관한 나머지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는 없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중산층을 비롯한 국민들이 재벌 욕을 하면서도 재벌이 이끈 고도성장의 과실에 편승해 혜택을 누려온 데 따라 (성장률에 대한) 기대심리가 너무 높았다”며 “이젠 그 같은 기대심리를 벗어던지고 균형감각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이와 함께 “달라진 경제 환경에 맞춰 이젠 영구적인 직장은 없다는 현실을 바로 보고 언제든지 회사를 떠나더라도 다른 일을 곧바로 찾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신여대 강석훈 교수도 “무엇보다 직업관을 바꿀 것”을 주문했다. 평생직장은 없다는 전제 아래 자기나름의 전문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분야를 확보하는 게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특히나 40대 이상 직장인들의 경우 몸담고 있는 회사를 떠나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프로그램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선 전문분야를 확보해 스스로가 직업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넓지 않다. 평소 업무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거나 관련 연수 과정을 이수해 실력을 쌓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과 모임을 만들어 최신 정보를 주고받거나 전문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습그룹을 조직하면 실직 때 쉽게 새로운 직장을 알아볼 수 있는 채널로 활용할 수 있다.

전문분야를 확보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불가피하게 직업·직장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는 수밖에 없다. 실업률이 치솟는 가운데서도 구인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이 있다. 고용시장에서 대부분 구직자들이 직업·직군의 수평이동만 생각했지, 수직이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경직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경제행위 터득해야 살아 남는다

서민층들한테는 좀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생활에서 거품을 빼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 1대당 평균 주행량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으며, 주택수요가 고급화돼 도시민들의 1인당 주거공간도 선진국 수준이다.

서민층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는 과외비 지출도 돌아볼 대목이다. ‘굶어도 자식 공부는 시킨다’는 자세로 효과도 따져보지 않고 남들이 한다면 이것저것 다 과외를 시키는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 요즘 알뜰가계에서는 부모가 직접 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례도 있다.

양세정 상명대 교수(소비자주거학)는 “온 가족이 모여앉아 우리집 소득은 얼마이고 지출은 얼마인지를 따져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가질 것”을 권한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고,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한 경제행위를 배운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주요기관 내년 경제전망

(단위:%,억달러)

 

성장률

경상수지

물가

  KDI(10월)

5.4

68

3.7

  KIET(9월)

6.2

16

3.0

  삼성경제연구소(9월)

6.6

33.8

3.4

  현대경제연구소(6월)

5.5

-8

3.5

  LG경제연구원(9월)

6.5

25

3.3

  한국경제연구원(9월)

5.3

13.5

3.8

  IMF(11월)

5.5

65

-

  WEFA(8월)

6.0

142

4.9

  OECD(5월)

6.0

96

2.7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