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DJ정권, 학벌경쟁 부추겼다

사교육비 증가 부른 ‘어정쩡하게 쉬운 수능’… 신지식 운동도 엘리트주의 교육으로 귀결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려고요.”

10월27일 서울시 동대문구의 한 대학입시학원. 10시20분 2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와르르 쏟아져나온 수강생 가운데 김아무개(19)씨가 ‘준비된 대답’처럼 대뜸 말했다. 물론 그가 학원에 다니고 있는 이유다. 그는 올해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으나 두어달 다니다 그만뒀다. 같은 지방대에 입학했던 그의 친구도 자신처럼 똑같이 재수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학벌사회의 철옹성을 넘기 힘든 바에야 늦더라도 아예 ‘내딛는 첫발’을 최소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여놓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른바 명문대 또는 서울 소재 대학문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재수생들의 끊임없는 행렬로 입시학원마다 북새통이다.

역시, 특단의 교육정책은 없었다

서울 노량진 대성학원의 경우 학원수강생 5천여명 중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거나 자퇴한 경우가 1천여명에 이른다. 대부분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다 그만뒀다. 물론 이들이 지향하는 곳은 김씨처럼 ‘서울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 세칭 명문대학이다. 강북대성학원 강사 길종각씨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꿈이나 비전도 없이 오직 ‘서울에 있는 대학’에만 매달리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이런 학벌따기 경쟁은 김대중 정부 들어 더욱 치열해졌다. 김덕중 전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새로 들어선 교육부 장관들은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수능시험 만점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수능시험을 쉽게 출제하겠다”고 밝혀왔다. 물론 ‘쉬운 수능’ 정책에는 사교육비를 줄이고 이를 통해 학력위주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교육당국의 ‘기대’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달리 현실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어설픈 수준의 ‘쉬운 수능’은 정작 재수생 폭증 같은 사교육비 증가를 불러왔고 결국 학벌결쟁을 되레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성학원 이영덕 평가실장은 “시험이 쉬워져 3∼4점 차이로 떨어진 수험생들이 학벌사회에 진입을 위한 끝없는 무한경쟁에 죽기살기로 계속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학벌경쟁을 수능으로 해소하려면 아예 획기적으로 쉽게 내거나 교육과 사회 등 다방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종합대책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란 견해를 보인다.

대구 일신학원 윤일현 진학실장은 “김대중 정권의 교육정책은 실패”라고 규정했다. 윤 실장이 말하는 근거는 이렇다. 일신학원이 지난 7월 이 학원수강생 2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순수한 재수생은 26.5%에 그쳤다. 반면 대학에 합격하고도 아예 등록을 않거나 1년 이상 대학에 다닌 뒤 휴학하고 학원에 온 경우가 무려 73.5%나 됐다. 윤 실장은 “사설학원이 불황에 허덕일 때마다 교육당국이 입시제도를 바꿔줌으로써 사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조장하고 있다”고 정면 비판했다. 간판위주의 학벌사회와 이로부터 빚어지는 10대 후반기의 한판 승부가 입시제도 탓에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김대중 정부 들어 딱히 학벌·학력위주의 사회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추진된 교육정책은 없다. 이에 대해 교육부 정봉근 교육정책기획관은 “우리 사회에 고착화된 학벌구조를 타파한다는 측면은 여러 교육개혁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며 “평생교육 강화, 2002년 대학입시제도 등에 그런 면이 있다”고 말했다. 학벌구조를 깨기 위한 특단의 교육정책은 없고 대신 찬찬히 살펴보면 교육정책에 흐르고 있는 철학적 개념이 학벌사회 개선과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얘기일 뿐이다.

‘서울대 괴물’만 키워준 BK21

이런 인식은 지방대학육성 특별법을 바라보는 교육부의 시각에서 뚜렷이 읽을 수 있다. 지방대학들의 거센 요구에 떠밀리다시피 지방대 특별법을 추진하고 있는 교육부 관계자는 “학력·학벌사회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를 교육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 교육적 처방으로 될 성질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지방이 소외돼 있는데다 지방대 출신은 취업도 안 되고 그래서 다들 안 가려 하는 판국인데 이런 상황에서 법을 제정해도 육성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가야 사람 구실할 수 있다고 여기는 학부모만 탓할 뿐, 교육정책적으로 풀 길은 없다는 포기선언이나 진배없다.

지방대 육성은 고착화된 학벌구조를 깨는 길의 하나로 줄곧 제시되어왔다. 그럼에도 교육당국의 지방대에 대한 푸대접은 여전하다. 지난 10월30일 서울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지난 한해 대학교수들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6천2백억원의 연구비중 서울대가 받은 지원비가 20.8%인 1천250억원에 이른 것으로 밝혀졌다. 국회 교육위소속 임종석 의원(민주당)은 “이는 비슷한 규모의 지방 국립대와 견줘볼때 10배 이상에 달한다”며 “학벌사회의 정점에 서있는 서울대 키워주기가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학벌구조 타파에 대한 철학 부재 상태에서 펴고 있는 현 정부의 교육정책은 신지식인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예체능 과외수요까지 부추긴 대입선발 방식

신지식인 양성이 교육적으로 표현된 대표적인 것으로는 BK21사업이 꼽힌다. 그러나 BK21사업 과학기술분야의 1년 지원예산 2천억원 중 서울대가 900억원, 연세대와 고려대가 65억원씩 지원받고 있다. ‘선택’된 명문대에 예산의 절반 이상이 ‘집중’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만큼 BK21사업은 서울대라는 괴물을 더 키워주고 학벌사회를 오히려 부추기는 사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신대 김종엽 교수(사회학)는 “BK21사업은 불균형 성장정책”이라며 “이 사업은 연구중심 대학과 학부중심 대학을 더욱 한줄로 세워 더이상 넘볼 수 없는 벽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가 기득권 확대를 위해 스스로 만든 서울대특별법이 무산되자 교육부가 변형된 형태로 이를 충족시켜준 것이 BK21사업이라고 진단했다.

신지식인 운동은 학벌사회의 틀을 깬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시작됐지만 교육부문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철학은 엘리트주의 교육관이다. 치열한 경쟁구조를 뚫고 ‘승리’해나가는 엘리트가 신지식인인 것이다. 이는 실업고를 바라보는 교육부의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올해 신입생 모집정원 미달률이 10%에 이를 정도로 이미 곪아터진 실업고 몰락에 대한 교육부의 대책은 일반고로 전환하거나 일반고 과정을 함께 가르치는 통합형고교로 개편하는 게 고작이다.

취업경쟁력에서는 전문대에 뒤지고 대학진학에서는 일반고에 밀리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실업고 와해를 가속화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 교육부의 판단이다. 이런 판단은 서울시교육청의 실업고에 대한 국고지원예산이 지난 98년 144억7천만원에서 올해 45억원으로 크게 줄어든 데서도 읽을수 있다. 실업계도 일반고로 전환해 신지식인 엘리트 경쟁대열에 합류시키겠다는 것이다. 진보교육연구소 천보선 연구원은 “신지식인은 어차피 소수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엘리트를 이념적 인간형으로 본다”면서 “오직 소수 엘리트를 잘 키우는 데만 관심을 두는 것이 김대중 정부 교육패러다임의 본질”이라고 꼬집었다.

각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내세우는 신지식인 양성철학은 또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수 있다’는 2002년 대입제도로 구체화됐다. 그리고 2002년 대입제도는 명문대 학벌 획득을 위한 조기교육론의 모습으로 당장 나타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의 조기 영어교육이나 조기 컴퓨터교육 바람이 그것이다. 김종엽 교수는 “입시에 다양한 요소를 도입하겠다는 2002년 대입제도는 의도처럼 한줄 세우기를 여러 줄 세우기로 바꾸기는커녕 그나마 입시에서 비껴나 있던 영역까지도 경쟁의 요소로 변질시킬 위험이 크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특기에 입각한 대입 선발방식은 영어·수학뿐만 아니라 예체능 과외 수요까지 부추키고 있다. 비정한 학벌주의사회에 적응하도록 어릴 때부터 ‘길들이는’ 쪽으로 2002년 입시가 왜곡되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공교육체제를 벗어나 신지식인 양성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자립형 사립고는 고교까지 학교를 서열화해 일찌감치 학벌경쟁에 뛰어들게 만든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진보교육연구소 천보선 연구원은 “학교의 상품화를 핵심으로 하는 자립형 사립고는 그나마 학벌위주사회를 깨는 데 기여해온 평준화 제도까지 뒤흔들고 있다”며 “‘누구나 신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허구적 신화가 학벌사회를 확대재생산하는 구호 노릇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신대 김종엽 교수의 분석은 사립고에서 출발한 학벌사회의 뿌리를 설명해준다. “해방 직후 지배계급으로 형성되어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경기고나 경복고 등 명문 사립고다. 이는 국민들에게 교육이 출세의 통로가 되고 학력이 자본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준 계기였다.”

해방 이후, 교육은 투자한 자본이 절대 망하지 않는 ‘불패의 신화’를 기록한 대표적인 분야다. 이는 지속적인 학교와 학원 팽창의 역사가 보여준다. 물론 이런 신화의 바탕에는 뿌리깊은 학벌주의가 있었고 이제 신지식인 교육 이데올로기가 학벌주의를 다시 떠받쳐주고 있는 셈이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