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부실기업주는 기죽지 않는다

최원석·박건배… 챙길 것 다 챙기고 아예 경영복귀를 호시탐탐 노려


밀린 임금을 달라며 직원들이 밖에서 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최원석씨는 자신의 퇴직금 9억원을 서둘러 챙겼다.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에 각각 10억원씩 퇴직금 지급을 요구한 것이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살아남는다.’ 경영실패로 금융기관에 엄청난 부실채권을 떠안긴 전 재벌총수들의 최근 근황은 재계에 나도는 이 말을 실감케 한다. 일부 ‘실패한 경영자’는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권토중래를 외치고 있다.

최원석의 ‘인감도장 바꿔치기’

채권단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의한 기업회생을 조건으로 지난 98년 4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 13일 불볕더위 속에 찾아간 서울 중구 장충동 최씨의 집은 말 그대로 도심 속 별장이었다. 대문 옆에 낸 쪽창문을 통해 집사 2명이 오가는 사람을 살피고 있는 최씨 집은 무려 500여평. 근처 부동산의 말로 이곳 시세는 평당 1천만원을 웃돈다. 1천만원으로 쳐도 장충동 단층 최씨 집은 50억원이다.

최씨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당시 장충동 집과 문중 선산까지 모두 동아건설에 내놓았다. 하지만 문패도 분명 ‘최원석’으로 돼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이유는 인감도장에 있었다. 동아건설 자산관리부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최 전 회장이 사재를 내놓은 뒤 곧바로 이를 매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감도장이 바뀐 것이다. 최 전 회장이 재산을 다 내놓았을 때 받은 인감증명서와 실제 인감증명이 달랐다. 알아보니 그새 최 전 회장이 인감도장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인감증명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최씨가 도장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소유권 이전을 못한 것이다. 최씨의 깜짝쇼였다.

이 관계자는 “몇번 장충동 집에 찾아가 최 전 회장을 만나 소유권 이전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을 아예 안 열어줘 만나지도 못했다. 난감할 뿐이다”라고 털어놓았다.

최씨는 동아건설에서 물러날 당시 문중 선산과 경기도 가평 별장, 청주 동막동 땅 등 10여건의 부동산을 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매각된 것은 1600만원에 팔린 동막동 땅이 고작이다. 나머지는 장충동 집과 같은 형편이다. 인감도장이 바뀌어 소유권 이전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선산은 최 회장이 “집도 절도 없어지는데 선산은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나중에 동아건설쪽에 통사정해 묵인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충동 집은 못 내놓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이 형편인데도 최씨는 지난해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채권단이 살집은 배려해줬다”며 진실을 호도하기도 했다.

퇴출된 동아건설의 엔지니어링 직원 400여명은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달라며 2년 넘게 최씨와 동아건설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전 동아엔지니어링 노조위원장 윤강욱씨는 “직원들의 못 받은 퇴직금과 체불임금이 132억원에 이른다. 최 전 회장은 당시 회사 자금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하다가 아무런 대책도 안 세워놓고 자기만 혼자 손떼고 떠나버렸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밀린 임금을 달라며 이들이 밖에서 시위를 벌이는 와중에 최씨는 자신의 퇴직금 9억원을 서둘러 챙겼다.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에 각각 10억원씩 퇴직금 지급을 요구한 것이다. 동아건설은 부실의 장본인으로서 회사에 끼친 피해를 고려해 퇴직금을 주지 않았지만 대한통운은 9억원을 최씨에게 퇴직금으로 지급했다.

말로만 ‘백의종군’한 박건배

경영에서 물러난 지 2년 남짓. 얼마 전 최씨는 묻어두었던 경영복귀의 꿈을 펼쳐보기도 했다. 고병우 전 동아건설 회장이 물러난 뒤 채권단이 지난달 실시한 경영자 공채에 응모한 것이다. 서류심사에서 탈락해 일단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이제는 최씨의 부인인 전 한국방송공사 아나운서 출신 장은영씨가 최씨 ‘부활전선’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장씨는 각 언론사에 보낸 편지에서 “얼마 전 집 앞에 동아직원들이 찾아와 최 전 회장의 경영복귀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을 때 최 전 회장이 눈물을 훔치며 가슴아파했다”며 “이 순간 최 전 회장만큼 동아를 사랑하고 그 운명을 염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최씨는 경영복귀를 위한 사전포석으로 측근을 통해 경영에 간섭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아건설의 한 관계자는 “지난 5월 고병우 전 회장과 함께 동반퇴진한 이창복 전 동아건설 사장은 최씨의 매제다. 고 회장이 반대했지만 최 전 회장의 집요한 요구 때문에 이씨가 사장으로 임명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동안 최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리비아 대수로공사 수행을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싶다”며 근신할 만큼 했다는 뜻을 내비쳤다. 가족들과의 얽히고 설킨 재산다툼으로 법정을 자주 들락거렸던 최씨가 요즘 다니는 곳은 역시 법원이다. 리비아 공사대금 수백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린 혐의에다 김포매립지 용도변경과 관련해 뇌물을 건넨 혐의로 기소돼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최씨도 동아건설을 떠나면서 백의종군하겠다는 변을 남겼지만, ‘실패한 오너’인 박건배 전 해태제과 회장도 “해태를 살리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미련이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하지만 박씨는 두달 전까지 백의종군이 아니라 회장으로 건재하고 있었다. 해태제과 주채권단인 조흥은행 홍상철 상무는 “해태제과는 사적 워크아웃이다. 워크아웃플랜이 확정 안 된 상태에서 100여명의 채권자들이 합의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시간을 끌어온 것이다”라고 박씨가 회장자리를 지킨 이유를 설명했다. 박씨의 공식 직위는 경영일선에서 손을 뗀 해태제과 이사회 의장이었다. 하지만 월급은 회장직에 해당하는 1천만원가량을 받아왔다. 벤츠도 그대로 타고 다녔다. 박씨의 월급은 따지고보면 국민의 세금이나 다름없다. 기업이 부도나거나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채권은행에 안겨진 부실을 털어주기 위해 공적자금이 투입되므로 출자전환된 부분은 공적자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한장의 주식도 없으면서 경영 간섭

박씨는 지난 5월 새 전문경영인이 들어오면서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하지만 아직도 남영동 해태제과 사옥으로 출근하다시피하고 있다. 9층 사무실도 한층을 그대로 쓰고 있고 회사차를 타고 다닌다. 해태타이거즈 구단주 자리는 아직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태제과 관계자는 “볼일 보러 들르는 것뿐이다. 보고를 받거나 결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회사에 나와 있는 것이다”라고 얼버무렸다.

박씨는 98년 11월 부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태제과 소유주식 전량을 소각했다. ‘물적토대’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주식을 단 한주도 갖고 있지 않은 박씨의 경영 간섭은 채권관리단이 파견한 전문경영인의 중도하차를 가져왔다. 박씨와 경영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다 지난 4월 취임 두달 만에 떠난 이태욱 전 해태제과 사장은 “해태가 워크아웃 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잠재부실 5700억원을 숨긴 사실이 확인돼 이를 주거래은행에 알렸는데, 박씨가 즉각 구사대를 조직해 나를 축출했다”고 주장했다. 조흥은행 홍상철 상무는 “애초 채권단이 경영은 대표이사 사장인 이씨가 맡고 박씨는 이사회 의장으로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못박았다”며 역할을 명확히 했다. 오너 지위를 잃은 박씨가 완전한 회장복귀를 노리고 자신의 역할을 넘어 경영에 간섭해왔다는 것이 이씨의 말이다.

서울 이태원동 박씨의 집은 대지 250여평에 시가로 30억원을 웃돈다는 게 주변 부동산중개업소들의 얘기이다. 조흥은행 등 10여개가 넘는 곳으로부터 이미 가압류된 상태지만 여전히 이 집에 살고 있다. 재계는 일단 떠났지만 박씨는 아직 건재(?)하다.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을 망친 뒤 자숙하기는커녕 여전히 사회 지도층으로 행세하고 있는 실패한 오너는 수두룩하다. 워크아웃에 들어간 미주그룹 박상희 회장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직을 발판으로 16대 총선에서 국회에 진출했다. 박 회장은 기업이 부도날 뻔했던 처지에도 지난 5월 모교에 2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가 말썽을 빚기도 했다.

워크아웃기업인 고합그룹 장치혁 회장도 전경련 남북경협 위원장을 맡고 있고 신원그룹 박성철 회장도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물론 워크아웃 조건으로 약속한 사재출연은 ‘공수표’가 된 지 오래다. 부실경영에 따른 국민들의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부실 기업주들은 여전히 속으로 부르짖고 있다. 꿈이여 다시 한번!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