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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부형제는 온몸으로 말했다 <한겨레21>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 문정현·문규현… 깡패신부에서 반미·통일사제의 이름을 얻기까지
두 형제 신부는 반미신부, 통일사제로 잘 알려져 있다. 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최근의 매향리사격장 폐쇄운동, 불평등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운동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자주권 확립을 위해 싸워온 형 문정현 신부. 89년 임수경씨와 함께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은 뒤로 국가보안법철폐운동, 북녘동포돕기운동을 벌이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앞장서온 동생 문규현 신부. 이 두사람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얼굴이자 민중운동사의 산 증인이다. 21세기를 벽두를 여는 2000년, 두 형제 신부는 미군기지 주변의 오염과 새만금간척사업으로 대표되는 환경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생명과 평화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익히 알려진 활동 이외에도 문정현 신부는 장애아동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꾸준히 지역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있고, 문규현 신부는 인권향상을 위한 각종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아 뛰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두 신부의 삶은 ‘반성과 행동’이라는 지난 세기의 중요한 교훈을 되살린다. <한겨레21>은 남북 정상의 첫 만남과 이산가족 상봉으로 통일 열망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2000년을 마무리하며 아름다운 단짝이자 맞수, 두 문 신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형님은 늘 비스듬히 반보 앞서 있어요”
지난 12월14일 오전 한겨레통일문화상 시상식에서 문정현(60)·문규현(54) 두 형제신부가 모처럼 한자리에 섰다. 익산 작은 자매의 집을 운영하는 형과 전주 서학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는 동생은 가까운 도시에 살면서도 쉽게 만나지 못한다. 시상식 전날 형은 태백에서 강의를 해야 했고, 동생은 늦게까지 국보법철폐운동관련 회의를 하는 통에 제각각 새벽 어스름에 서울로 온 터였다. 75년 인혁당 관계자 사형집행과 주검탈취에 몸을 던져 항의한 것을 필두로 각종 시위현장에서 육탄공격을 마다않는 문정현 신부와, 89년 방북한 임수경씨를 보호하기 위해 ‘적성국가’ 북한에 발을 디딘 이래 좌경용공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문규현 신부의 지난 삶은 깡패 신부, 빨갱이 신부라는 별명 속에 고스란히 함축돼 있다. 시상식을 마치고 문정현 신부는 “개근상도 못 받아 본 내가 평생 처음 받는 상”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문규현 신부는 축하인사를 받는 내내 벙실거리며 “노벨평화상보다 더 좋은 거”라고 자랑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전북 사람들은 형 문정현 신부를 ‘큰 신부’로, 동생 문규현 신부를 ‘작은 신부’로 부른다. 이름을 빼고 이렇게 불러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정보통신연대INP,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새만금사업즉각중단을 위한 전북사람들의 모임 등은 문규현 신부가 대표나 의장을 맡고 있는 단체들이다. 자문위원이나 고문으로 오른 단체를 꼽으면 일일이 세기가 힘들다. 하지만 온갖 공동대책위원회까지 마다하지 않는 ‘큰 신부’에 비하면 도리어 적은 편이다. “형님은 도움을 청하면 마다하질 못하죠. 그러니 각종 대책위에 이름이 빠지질 않아요. 한마디로 ‘문 대책’이죠. 하하.” 형 문정현 신부는 어느 때보다 미군문제가 시끄러웠던 올해 굵직굵직한 뉴스를 많이 탔다. 불평등한소파개정국민행동, 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 매향리미군국제폭격장폐쇄범국민대책위 등 그가 상임대표직을 맡고 있는 단체들의 이름을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70년대 이래 반독재민주화운동, 반미통일운동에서 그림자처럼 함께했던 두 문 신부가 올해에는 주요 이슈에서 업무를 분담했다. 미국문제는 형인 큰 신부가, 환경문제는 동생인 작은 신부가 맡고 있다. 의논해서 한 건 물론 아니다. “아까 시상식에서 형님 소감하고 제 소감하고 똑같았잖아요. 오기 전에 전화 한통 하질 않았는데 말이죠. 뭔가 통한다고 할까. 가다보면 형님은 항상 제가 아쉬워하는 영역에 서 계세요. 비스듬히 반보쯤 앞서서 말이죠.”
늘 장거리여행에 익숙한 두 사람
인터뷰는 내내 길 위에서 진행됐다.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장거리여행을 해야 하는 두 사람에게는 도통 안정적인 시간이 없는 탓이다. 형 문정현 신부의 세피아 승용차에 올라타자 가장 먼저 발에 차인 것은 코펠과 버너, 그리고 라면 봉지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니 필요한 것들이지.” 동생 문규현 신부의 무쏘 승용차에서는 이동식 텐트와 플래카드 등과 자리다툼을 해야 했다. 며칠 전 국보법철폐 농성 때 사용했던 것들이다. 97년 교통비를 절약하려고 장만했다는 무쏘의 계기판은 어느덧 13만4천km를 가리키고 있었다. 문정현 신부가 장거리여행을 떠날 때 꼭 차에 싣고 다니는 것은 지팡이와 간이호흡기. 다리는 75년 인혁당 관련 시위 때 크게 다쳤고, 협심증은 시위 현장에서 몇 차례 구급차에 실려갔을 만큼 위험한 상태다. 귀향 내내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문정현 신부는 운전 도중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몰∼아내자, 몰∼아내자, 여기는 우리의 땅, 주한미군 몰아내자∼.” 얼마 전 배웠다는 <주한미군철거가>이다. 입에 붙은 이 노래처럼 요즘 ‘반미’는 그의 일상이다. “누군 반미를 하고 싶어서 하나? 소파가 불평등한 걸 뻔히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매향리 사람들은 죽어가는데 폭격은 멈추지 않으니까 미국을 좋아할 수 없는 거지. 지금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보이지만, 옳은 길로 가면 종래에는 이기는 게야. 유신시대를 생각해 보라고.” 형이 익산으로 떠난 뒤 문규현 신부는 서울 용산에 있는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사무실로 향했다. 각종 단체를 돌아다니다보니 서울지리에 택시기사 못지않게 훤했다. 민간통일운동의 방안 등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전주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문규현 신부가 기다리던 신도들과 어울려 김치찌개 안주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이 형 문정현 신부는 전북 익산 작은 자매의 집 사제관에서 쉬고 있었다. 들쭉술 한잔을 걸친 이 초로의 사내는 아코디언을 들쳐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아코디언 가락에 실린 <님을 위한 행진곡>은 투쟁가보다 구슬픈 서정시에 가까웠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지그시 감은 그의 눈자위에 지난 세월이 스치는 듯했다. 문정현 신부는 스스로를 “남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함께 싸우다가 이제는 제도 속으로, 일상 속으로 떠난 이들에 대한 소회를 묻자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느 구비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형제의 말없는 약속, 눈물과 신념
76년 3월 동생이 사제서품을 받을 당시 형은 3·1구국선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겨울 삭풍이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의 어느 날 면회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긴 설명없이 부둥켜안고 맹세했다. “우리 주위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말자.” 두 사람을 밀고 가는 힘은 눈물과 신념이다. 그것은 형제 사이의 말없는 약속이기도 했다. 전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건만 다음날인 12월15일 아침 동생 문규현 신부는 말끔한 얼굴로 누룽지 밥상을 앞에 두고 있었다. “끓인 누룽지가 내 영양식이요. 그 전에는 운동도 많이 했지만 요즘에는 숨쉬기운동만 하죠.” 어릴 때부터 형 문정현 신부가 음악 등 예능에 소질이 있었다면 그는 체육을 훨씬 잘했다. 구기종목이면 가리지 않고 즐겼다. 어머니가 정성껏 꿰매준 옷을 입고 들판을 뛰놀던 소년은 이제 로만칼라의 사제복을 입고 다시 들판을 누빈다. 전북의 평야가 몸을 푸는 갯벌에 이르기까지 생업의 현장을 찾아서. 아침 미사를 마친 뒤 문규현 신부는 다시 여행채비를 한다. 사제복을 벗고 허름한 점퍼에 코르덴 바지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청년들과 함께 갯벌 근처로 나가 작업을 해야 한다. 해마다 성탄절을 앞두고 형상제작을 하는데, 올해의 테마는 ‘생명과 평화로 오신 하느님’이다. 그래서 새만금을 지키는 장승과 솟대를 성당 마당에 세우기로 했다. 솟대 위에는 망둥어, 굴, 맛조개, 게 등 갯벌의 생명들을 나무로 깎아 올려놓을 작정이다. 89년 방북으로 옥고를 치른 뒤 문규현 신부는 93년 김제의 요촌 성당에 파견됐다. 그는 “그곳에 6년 가까이 있으면서도 갯벌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 죄”가 가슴에 사무친다고 말한다. “공사가 91년부턴가 시작됐는데 솔직히 땅이 커지면 좋은 줄로만 알았죠. 정보도 없고 출입도 못했으니까. 근데 날이 갈수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거예요. 썩어가는 갯벌의 신음소리, 알량한 보상금에 파괴되는 주변 공동체…. 고기잡고 조개캐는 것밖에 모르던 사람들은 생계위협을 받고. 그렇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문규현 신부가 새만금간척사업 중단을 외치고 나선 배경에는 이런 ‘반성’이 담겨 있다. 변산반도의 해창갯벌에서 올 1월에는 주민들과 매향제를 지냈고, 봄에는 환경운동단체와 손잡고 장승을 깎아세웠다. 폐선을 끌어다놓고 확성기를 들고 올라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문규현 신부가 새만금으로 달려가는 동안 형 문정현 신부는 군산 미군비행장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은 156차 금요집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집회로 향하던 차 안에서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청와대였다. 며칠 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으로 청와대에서 종교인 만찬이 있으니 참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안 되겠습니다.” 단박에 거절하는 문정현 신부. 통화를 마친 그에게 왜 한번 참가해보지 그러느냐고 묻자, “싫어, 이 사람아!” 하면서 버럭 화를 낸다. 그리고는 연신 “이거 늦겠는걸…” 하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정 많고 장난을 좋아하는 신부님
복직된 남편이 근무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날엔 아이를 들쳐업고 부인들이 나선다. 98년 익산 만도기계 파업 진압현장에서 사지를 들린 채 끌려나오고 99년 군산 기아특수강 해고노동자 농성장에서 단식 끝에 쓰러졌던 문정현 신부의 모습을 기억하는 지역의 노동자들은 그를 ‘노동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군산 집회가 끝나자 다시 한통의 전화가 그를 찾았다. “뭐? 조개 먹고 가라고? 안 돼, 나 지금 바빠.” 농성중인 군산 개정병원 해고노동자들이 청하는 전화였다. 문정현 신부는 “바쁘다”면서도 채근이 싫지는 않은 듯했다. 결국 핸들을 돌려 군산시청 옆의 농성장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말한다. “나 꼭 조폭 두목 같지?” “야이 나쁜 놈들아!” 하며 경찰을 호통치는 깡패 신부는 익산 ‘작은 자매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어구∼ 내 새끼들”이라며 아이들을 보듬는 자상한 할아버지로 돌아간다. 버림받은 이중삼중의 중복 장애인 서른아홉명을 일일이 챙기고 보살핀다. 그는 86년 전북 장수군 장개성당에 있을 때부터 장애인을 돌보아왔다. 부모가 일나가면서 감나무에 묶어놓은 아이를 데려다 키운 일이 그 시작이었다. 88년 지금의 자리에 집을 짓고 15년째 운영해오지만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92년이던가….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 내가 직접 봉고차에 싣고 다니면서 밥 사먹이곤 했지. 두놈씩 식당으로 데려다가 밥을 먹이는데 한놈은 도망가고, 차 안에서는 소리치고 울고…. 사실 그땐 문 닫을까도 생각했어. 근데 다행히 도와줄 수녀님이 나타나더라고. 하느님의 뜻이겠지.” 함께 사는 보육교사들은 한결같이 그를 “정 많고, 눈물 많고, 애들하고 장난치기 좋아한다”고 말한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하는 <산장의 여인>을 애창곡으로 삼고 있지만 문정현 신부는 외롭지 않다. “천주교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 신앙이야. 미움과 나뉨없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이지. 그러니 ‘미워하라! 증오하라!’고 강요하는 국가보안법을 모른 척할 수 있겠으며, 이 민족을 갈라놓은 분단을 두고볼 수 있겠어? 신앙에 따라 살다보니 여기까지 온 게지.”
끊임없이 움직이면 없던 길도 열린다
올해 들어 환경운동가로 거듭난 문규현 신부. 문 신부에게 통일운동과 환경운동은 화해와 일치, 생명과 평화라는 궁극적인 지향 안에서 몸을 섞고 있다. 도시가 중요하면 농촌도 중요하고 농지가 소중하다면 갯벌도 소중하다. 세계자본이 평정한 속도와 물량의 시대에도 결국 인간은 두엄냄새 위에서 먹고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눈앞의 이익을 내세워 수많은 이들의 삶을 지켜주는 생명의 터전 갯벌을 파괴하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이 문규현 신부의 생각이다. 그걸 막는 방법은 “몸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언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책을 바꿀 책임자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방법은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또 외치면서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겁니다. 몸으로 세상을 견디는 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요.” 농민들과 함께 78년 노풍벼 파동, 80년 소싸움을 겪으며 얻은 결론이다. 89년 외세에 의한 분단 무효를 선언하며 판문점을 건널 때에도 그랬다. “내딛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너무 많이 망설이고 따지다보면 자꾸 더뎌지기만 할 뿐이죠. 끊임없이 움직이면 없던 길도 열립디다.” 형 문정현 신부에 비해 문규현 신부는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냉철한 스타일이라는 평도 듣지만, 확실히 이성적 인간이 아니라 감성적 인간이다. 이 땅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존재하는 이상 감성적 인간 문규현은 외롭지 않다. 하물며 동생보다 정많고 눈물많은 형 문정현 신부임에야.
의로움의 승리는 하느님의 섭리
두 신부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내 식탁으로 초대하는 ‘식탁의 우정’과 ‘의로움의 승리’를 하느님의 섭리라 여긴다. 간난신고의 세월을 헤쳐온 두 사람은 앞으로도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북녘형제들을 소박한 밥상으로 초대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 의로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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