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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좀 더 다치고 깨져주세요 ‘평생동지 순희’가 드리는 글- 당신들의 삶에서 ‘아름다운 운동의 삶’을 봅니다
오늘 저녁에는 모처럼 70년대의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다들 흩어져 있다보니 총회라고 이름 붙이지 않으면 얼굴 한번 보기 어렵더군요. 며칠 전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열린 소파개정 집회에서 큰 신부님은 쓰레기차 위에 올라 지팡이를 휘두르며 예의 ‘난리’를 치시더군요. 부디 건강부터 챙기십시오. 30여년간 두들겨맞은 몸,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있겠습니까.
“화염병 더 가져와 이놈들아”
<한겨레21>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전북에 있는 ‘문 패밀리’의 식구들이 저한테 떠넘긴 모양입니다. 두분의 헌신적 연대를 짧은 글솜씨로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70년대 말 동일방직에 민주노조를 세우려다 구사대 똥물까지 뒤집어써야 했던 우리는 숨이 막혔습니다. 무작정 문규현 신부님이 계신 군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신부님은 우리에게 바닷가에서 회를 사주셨죠. 소주잔을 기울이다 한명이 울음을 터뜨린 걸 시작으로 온통 눈물바다가 됐죠. 우리가 마신 소주보다 훨씬 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작은 신부님, 우리는 그 시절 눈물의 힘으로 운동했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마지막으로 ‘처리’했던 우리 원풍모방 해고노동자들은 현장 곳곳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갈 곳이 없었습니다. 삼청교육대로, 감옥으로 끌려가 죽도록 고생하다 나온 뒤였습니다. 익산에 공업단지가 들어서 그쪽으로 갔지만 왕빨갱이가 내려왔다면서 우르르 해고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때도 작은 신부님은 농성중인 옥상에 빵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다 공권력에 의해 길거리에 짓뭉개지면서도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셨죠. 당신의 실천으로 사제단까지 움직이게 했죠. 80년대를 거치는 동안, 사실 두분 신부님께 답답한 점도 있었습니다. 왜 좀더 전투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주시지 않을까 하고. 돌이켜보면 사제의 입장에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을 텐데. 특히 큰 신부님은 가톨릭노동사목 활동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서슬퍼렇던 시절에 전주교구의 지원을 받아 익산 창인동성당에 노동자의 집을 꾸며주셨죠. 기억나세요? 우리가 밤새 달그락거리며 화염병을 만들다가 신부님께 들켰죠. 신부님이 호통을 치셨어요. 살상무기라면서. 그러나 웬걸, 다음날 집회에서 신부님은 싸우다가 소리를 지르셨죠. “화염병 더 가져와 이놈들아. 왜 이것밖에 안 만들었어” 하면서. 작은 신부님은 농민들의 벗이었죠. 80년 소몰이싸움 때 집회를 봉쇄하니까 농민들과 밤새 소를 끌고 고산에서 장수로 넘어온 적이 있으시죠. 큰 신부님에 비해서 온순한 성품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번 화를 내면 작은 신부님이 더 무서웠어요.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 지 배웠습니다
두분 신부님, 따지고보면 작은 신부님은 저보다 두살, 큰 신부님은 저보다 여덟살 많은데 왜 항상 당신들은 크게만 느껴졌을까요. 지금도 그래요. 이제 잔소리도 좀 하고 살렵니다. 19살, 공장에 처음 발을 디뎠던 여성노동자 순희도 벌써 쉰줄을 넘겼답니다. 평생 동지로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운동가이기 전에 사제이시니 사제단 안에서 좀더 정치력과 조직력을 가질 것과 지금까지 많이 다치고 깨졌지만 좀더 다치고 깨지시라고. 왜냐면 우리는 아직 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한해가 마무리됩니다. 이 겨울 두분의 삶은 제 귓가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으며 이렇게 속삭입니다. 운동하는 삶이 아름답다고. 2000년 12월16일 박순희 아녜스 올림.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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