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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거들떠보지 않는 또다른 학살 미군 기총소사에 가족 잃은 홍원기씨의 증언… 정부에 탄원했지만 진상조사 여부도 불투명
서울 강북구 수유6동에 사는 홍원기(63)씨. 그는 자문위원들에게 보낸 탄원서에서, “1·4후퇴 때 피난을 가다가 미 공군기로부터 기총소사 공격을 받아 가족 10명 중 7명이 사망하고 두 여동생과 함께 살아남은 참극의 피해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일가족의 비극
12월10일 서울 강북구 미아4동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마케팅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뜻밖에 <한국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이었다. 그는 “오는 12월 중순께 미국을 방문할 자문위원들에게 이 땅에 ‘또다른 노근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고, 이를 미국쪽에 확실히 전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고 탄원서를 보낸 이유를 밝혔다.
홍씨는 미국의
미국쪽은 미육군 조사단의 이름으로 지난 5월7일 회신을 보냈다. “당신의 편지는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또다른 사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면서도 “이는 노근리사건에 대한 조사가 끝난 뒤 진행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극히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홍씨는 같은 날 한국 국방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국회의장 앞으로도 같은 내용의 탄원서를 보내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 미군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답변도 미국의 답변과 거의 똑같은 기조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국 정부쪽은 “노근리사건 진상을 규명한 뒤 증거가 명백한 사례에 대해 사안별로 소홀함이 없도록 검토할 예정”이란 회신만 한 차례 보냈을 뿐 1년이 넘도록 진상조사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홍씨는 미국 정부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당연히 국민을 보호하고 인권을 수호해야 할 한국 정부의 불성실한 자세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홍씨는 그 이후에도 새로운 정보나 조사결과를 확인할 때마다 정부에 탄원서를 잇따라 보내 진상조사를 거듭 촉구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 탄원서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사실규명입니다. 사실규명하자는데, 왜 꼭 노근리 조사가 끝나야 할 수 있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답변조차 없는 것은 한국 정부가 노근리 조사에서 보듯 진실규명의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합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는 홍씨의 비극은 반세기를 거슬러 1951년 1월12일 아침에 발생했다. 당시 홍씨네는 고향인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복지리를 떠나 용인시 수지읍 풍덕천리로 피난을 가는 중이었다. 일행은 아버지(홍성일), 어머니(이순임), 누이와 여동생 등 일가족 6명과 아버지의 외가쪽인 진외가의 진외당숙모(김계희), 진외6촌동생 윤종진(당시 13·여), 역시 진외6촌동생인 윤종효(당시 8·남) 등 모두 10명이었다.
피난길 도울줄 알았던 미군의 무차별 공격
당시 면장을 했던 아버지는 “죽든 살든 우리 아군이 있는 남쪽으로 가자”며 앞장섰다. 오전 9∼10시께 일행이 수지읍 풍덕천리 4거리를 지나 꽁꽁 얼어붙은 개천(현 기아교 근처)을 건널 무렵 갑자기 남쪽에서 미 공군기 4대가 서울쪽으로 날라왔다. 일행은 혹시 중공군으로 오인받을까봐 피난 보따리를 머리 위로 올리고 개천 가운데에 빙 둘러앉았다.
비행기 4대는 그들을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갑자기 1대가 되돌아 그들 앞으로 낮게 내려오면서 느닷없이 일행을 향해 기총소사를 해댔다.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그들을 도우러 왔다는 미군 비행기가 설마 쏠 줄이야! 주위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바뀌었다. 미군기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진외가 가족 4명의 목숨이 눈깜짝할 사이에 스러졌다. 특히 누나(홍옥기· 당시 15)는 양쪽 발에 기관총을 맞아 중상을 입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다가 얼마 뒤 사망해 더욱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 다행히 홍씨(당시 14)와, 9살과 6살난 두 여동생은 살아남았다.
“그 당시 현장은 물론 그 근처 어디에도 중공군은 단 1명도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우리 일행을 중공군으로 오인할 수 없었습니다. 가해자는 분명히 미 공군이고 사건 발생일시와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는 만큼 그 조종사가 누구였는지, 또 왜 되돌아와 기관총을 쐈는지 파악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왜 이런 것들조차 조사를 않는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미 공군에 의한 이런 무자비한 사격은 이날 전후로 풍덕천리와 죽전리 일대에서도 마구잡이로 일어났다. 홍씨와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기흥읍 신갈리에 사는 이병훈(64)씨는 1951년 1월15일, 아침 8시께 죽전리 감바위마을에서 미군 비행기로부터 공습을 받아 할머니와 친동생 등 가족 7명과 피난민 등 수십명이 사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풍덕천리에 살고 있는 강효산(64)씨도 죽전리 대지마을에 살던 큰 아버지가 역시 폭격으로 사망했고, 풍덕천리 사거리 소재 양조장 뒤 뚝방 웅덩이에 민간이 시신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하고 있다.
기흥읍 신갈리에서 수십명 사망하기도
미군에 의해 가족을 잃고 졸지에 전쟁고아가 된 홍씨 삼남매의 삶은 이후 고난의 연속이었다. 홍씨는 서울로 올라와 소년가장으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한 끝에 한국일보 소년사원으로 입사해 사건기자로 발탁되는 입지전적인 삶의 이력을 세웠다. 그는 한국일보사에서 업무1국장, 판매이사 등을 역임한 뒤 현재는 신문마케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이에 홍씨는 당시 상황을 찬찬히 재구성해본 결과, 의도적 공격이 분명하다는 확신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오산까지 후퇴했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반격을 펴 북진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도망치고 있었고, 미군은 중공군을 뒤쫓고 있는데다 미군이 폭격할 당시 마을에는 민간인들뿐이어서 중공군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미 공군 비행기는 조종사가 얼굴이 보일 만큼 저공비행을 하며 공격을 했고, 또 대부분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었던 만큼 육안으로도 중공군인지, 민간인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그때는 후퇴할 때가 아니라 미군이 북진할 때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가족의 참극은 무차별 공격을 하라는 미군의 작전명령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탄원서는 언제까지 방치하고 있을 건가
홍씨는 반세기가 거의 흐른 지난해 11월10일에야 처음으로 그날의 사건현장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는 “그때 그 참상을 잊어버리고 싶은데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돌이켰다.
홍씨는 자문위원단에 보낸 탄원서를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이 사건은 ‘몇명이 죽었는가’ 못지않게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점을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이든 민간인이든 가릴 것없이 쏴야 할 정당한 사유가 있었느냐, 하는 점을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한풀이 차원을 넘어 잘못된 과거를 사실대로 밝혀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모두 재발방지를 겨냥한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에서입니다.” 현재 노근리사건 이후 홍씨의 사연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가족 및 주민들이 학살당했다고 뒤늦게 신고된 사건은 모두 61건에 이른다. 이들 사건에 관한 탄원서와 진정서 등 관련 서류는 언제까지 정부관료의 책상서랍 안에 잠자고 있어야만 하나. “한·미관계도 중요하고 정치와 생활도 중요하지만 알 건 알고 잊어버려야죠.” 12월11일 사건 현장을 다시 찾은 홍씨의 자조어린 말이다.
이창곤 기자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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