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0년12월05일 제337호 

[표지이야기] 입양, 고통 속에 다가선 기쁨

남의 아이를 키우는 일을 숙명처럼 여긴 한연희씨가 네 아이를 입양하기까지의 애틋한 사연


(사진/한연희씨의 단란한 가정. 많은 아픔을 딛고 부모가 다른아이들이 행복을 일궈간다)


입양은 나에게 신의 계시였다. 숙명이었으며 또한 약속이었다. 1980년, 당시 나는 결혼 여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찍이 고아들에게 필요한 건 가정이란 생각에 결혼하면 꼭 남의 아이를 입양해 제 아이처럼 잘 키우는 게 이 땅에 내나름대로 사랑을 펼쳐보이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혼해 오던 남자에게 결혼 약속으로 입양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는 순순히 약속을 했다. 그러나 실제 입양을 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81년 7월, 아들을 낳았지만 건강이 좋질 않았다. 경제적 여건도 나빴다. 게다가 남편은 결혼 전과 다른 태도를 나타냈다. 그는 결혼할 욕심에 별 생각없이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결혼 뒤 첫애를 낳고 나서 석달 뒤에 영구불임수술을 받았다. 불임수술 사실을 말했을 때 남편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출세를 위해 다그친 아이에게 사과하며

그냥 넘기기엔 너무나 하고 싶었던 입양. 어느 날 114에 전화를 해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고아원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제일 어린(4) 아이를 후원하기로 했다. 매주 찾아가 놀기도 하며 책도 읽어주기도 했다. 그러기를 7년!

이제는 급한 대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랜 약속 지연의 실망감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네살짜리 남자아이를 후원하게 되면서 그 아인 나를 ‘약엄마’(양엄마)라고 불렀다. 매주 보육원을 들락거리며 늦은 저녁, 애들이 쳐다보는 마당 끝을 뒤로하고 아들과 둘이서 내려오는 뒤통수는 마냥 부끄러웠다.

1990년 시아버님은 내게 예쁜 여자아기를 입양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셨다. 뛸 듯 기뻐서 입양기관을 다니면서 서류를 준비하면서 또다시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제 일곱살이 된 그 아이, 날 약엄마라고 부르는 그 아이는 왜 안 되는 걸까?

보고 오는 날이면 우느라 잠을 못 잤다. 허락하신 대로 입양을 하면 모든 것이 편안한데 싶다가도 입양의 근본동기를 생각하면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허구한날 우는 내가 불쌍했던지 남편이 나서서 입양을 제시했고 1990년 4월8일 일곱살짜리 사내아이가 우리집으로 오게 되었다.

후원할 땐 기특하게 생각하던 시아버님이 강력하게 반대하셨지만 삼일 만에 승낙해 주셨다. 후원관계였을 땐 우리집에 오는 걸 서로 원했는데 막상 아들이 되어 새로운 생활에 접하자니 온 가족이 적응하느라 무척 어려웠다.

외부적인 반응에도 아주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게 되었고 어떡하든 잘 키워서 떳떳한 사회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해줄 유일한 사랑이자 임무라고 믿었다.

뭐든 다 시키고 싶고 잘하길 바라는 마음은 제대로 따라오지 않는 아이에 대해 실망과 초조함을 가져왔다. 내가 점점 더 초조함을 가지게 된 것은 주변사람들의 염려와 부정적인 예상을 뒤엎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4년여가 흐른 뒤에야 내가 입양의 본질에서 상당히 많이 빗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양은 한 아이에게 가족이 되어 주고 사랑과 신뢰를 통해 균형있는 가치관을 갖게 하는 것인데 사회적인 출세를 위해서 마구 다그쳤으니 그 동기가 아무리 사랑이라고 우겨도 그건 정당화될 수 없는 나의 시행착오였다.

결국 아이에게 사과하고 어렵지만 다시 양육태도를 바꿔서 키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자유롭게 됨을 경험하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상당히 자유로웠다.

또 한 아이, 또 두 아이….


(사진/매년 수많은 아이들이 가정을 잃고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사진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그러면서 두 번째 입양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고 몇년간 남편과 상의를 했지만 거절당했다. 마침 IMF로 아이들이 가정을 잃게 되었다는 매스컴의 보도를 접하고 남편의 동의를 얻어 2차입양을 하기에 이르렀다.

입양을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정말 많은 염려를 하면서 걱정해줬다. 대부분은 다시 생각해 보라는 권유였다. 그러나 가족이 하나도 없는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고 시부모님들의 우려 섞인 허락으로 98년 6월22일, 97년 12월생 아기를 아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2차입양은 우리 가족에게 놀라운 변화와 성숙을 가져왔고 날마다 새롭고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1차입양 때와 달리 친생자와 조금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문득문득 아파서 우는 아기를 업고 있노라면 아직도 가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아가들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1999년 12월 해체가정의 방치된 형제가 또다시 우리 가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결정하기까지 너무나 망설여지고 떨리고 두려웠다. 최종 결정을 하던 날, 나는 몹시 울었다.

아이들의 어려움보다 나의 고통스런 앞날이 더 많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던 유치함 때문이었다. 이들은 우리 가족의 부족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안정돼가고 있다. 변화돼가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우리 가족들이 누리는 유일한 기쁨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가정에서 아이들이 커야 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9년 11월 해외입양인인 스티브 모리슨를 만나게 된 것은 또다시 우리 가정이 가야 할 방향을 전환하는 놀라운 변화였다.

그는 내게 강력하게 공개입양을 통해 입양의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고 국내입양의 활성화를 위해서 모범적인 입양가정의 공개(매스컴 등)의 필요성과 입양부모모임의 필요성과 그것이 가정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가 주장하는 부분들은 이미 나도 충분히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긴 했지만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강력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었다.

결국 그의 제안에 따라 국내에서 한국입양홍보회 회장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모두 입양홍보요원이 돼야 했다. 각종 인터뷰와 양부모모임 등 하루도 입양이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는 날이 없게 되었다.

입양의 ‘전령사’로 나서다



다른 입양가정들을 만나게 된 것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같은 생각과 경험을 서로 나누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힘이 되는지 만날 때마다 즐겁다.

나만 겪는 것 같아서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많은 입양가정에서 공통으로 겪는 고통임을 알게 되었고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지는 것을 보면서 머잖아 우리나라도 입양문화가 크게 달라질 것임을 기대해 본다.

입양! 이는 가정이 필요한 아이에게 영구적인 가정이 되어주는 것이다. 법적 사회적으로 자녀를 얻는 것이지만 사회적인 인식변화가 성공적인 입양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국가에서도 확고한 정책의지를 가지고 국내입양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해줬으면 한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우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모든 아이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어른들의 보살핌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이 자랄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이 매년 7천여명 발생하고 있고 이중 2500여명은 해외로 1600여명은 국내로 입양되고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3천여명은?

한연희/ 한국입양홍보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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