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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학도 평준화로 가자”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의 파격적 대안… 3만∼5만명을 일렬로 세울 수 없게 해야
지난 7월14일, 일단의 교육문제 전문가들이 모여 토론회를 열었다. 주제는 ‘학력사회, 무엇이 문제이고 그 극복방안은 무엇인가’. 교육계의 젊은 학자들의 모임인 ‘21세기 한국교육포럼’ 주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내남없이 학력사회의 문제점을 꼬집고 나름의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토론회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는 토론자를 비롯해 많은 참석자들은 똑같이 “학력사회에 대한 해법이 사실상 없는 게 아니냐”는 절망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다수의 명문대를 만들자
‘졸업한 최종학교가 어디인가? 즉 고졸이냐 대졸이냐에 따른 학력차별, 출신대학이 일류대냐 이류대냐 삼류대냐에 따라 기회가 달라지는 학벌풍조, 또 일류대라도 인기학과를 나왔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른 학과차별.’ 능력보다 이런 ‘출신성분’에 따라 차별해 사람을 평가하는 뿌리깊은 학력사회 구조를 깨뜨릴 ‘전가의 보도’는 없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진짜’ 결론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학력사회 풍조는 너무나 뿌리깊고 비비꼬인 삼 가닥처럼 어지럽게 뒤얽혀 있어 본질적인 해소방법은 없습니다. 이런 인식은 학자들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기에 학력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식만은 일류대를 보내려는 이기주의만 팽배합니다.” 당시 이 모임에 참석한 한 학자의 말이다. 그러나 ‘학벌없는 사회의 모임’은 바로 이런 학력사회에 대한 체념과 절망감이 학력사회 해결을 가로막는 큰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몇 가지 제도만 바꾸면 학력사회의 풍조는 어느 정도 바꿀 수 있습니다. 다만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이를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학력사회의 대안, 분명히 있습니다” 이 모임의 주요 멤버인 김상봉 전 그리스도신학대 교수의 말이다.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은 10월21일 인터넷 홈페이지(http://antihakbul.org)를 개설하면서 등장한 모임이다. 김씨를 비롯해 홍훈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대표), <대학서열깨기>의 저자인 김경근 전북대 교수,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인 국민대 김동훈 교수, 그리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이철호 배문중학교 교사 등 5명의 교육전문가들이 참석하고 있다. 이 모임은 학력사회 철폐를 위한 가장 구체적인 대안의 하나로 대학의 단계적인 평준화를 든다. 대학의 단계적 평준화란 궁극적으로는 대학의 서열을 없애는 일로 상위권 대학부터 평준화를 꾀하자는 말이다. “학벌사회 철폐는 하루아침에 되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차차 단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다수의 명문대학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3만∼5만명 정도가 만점을 받을 수 있도록 수능시험을 쉽게 출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수능 성적으로 아이들을 1등부터 3만∼5만명까지 일렬로 세울 수 없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 자연스레 평준화를 이끌어내도록 하자는 거죠. 이럴 경우, 많은 우수한 중·고등학생들은 책을 읽고 비판적 사고를 키울 여가를 얻을 수 있으며, 대학도 간판이 아닌 실질적인 경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재벌 독점 만큼 나쁜 학벌 독점
김상봉씨는 이어 이런 대학평준화를 위해 특히 국·공립대학과 사립대학 사이의 교육여건의 격차를 줄이는 일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모임은 또 학력사회 철폐를 위한 가장 현실성 있는 또 하나의 대안으로 “정부가 인재할당제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공무원, 판·검사, 대학 교수 등 공공 직종에 있는 이들을 새로 채용할 때는 반드시 대학이나 지역별로 할당을 두도록 해 학력신화를 해소한다는 계획이다. “이제 우리는 사석에서나 이야기되는 ‘학벌’(學閥)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고자 합니다. 원래 벌(閥)이란 출신이나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끼리 서로 뭉친 패거리를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출신 대학을 기초로 조직화된 패거리와 그 문화를 가리킵니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가 재벌에 의한 독점이라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부문과 그 배후의 의식구조에서 가장 큰 영향을 가지는 것은 바로 학벌, 특히 몇몇 대학에 의한 학벌 독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은 현재 격주마다 모여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다양한 논의를 하는데, 조만간 창립 기념식과 기념 심포지엄을 열면서 본격적인 학벌사회 철폐를 위한 시민운동의 기치를 높일 예정이다. 강치원 강원대 사학과 교수(역사문화아카데미 원장)는 “우리 사회의 학력구조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데다 사회적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하는 근본요인이 되고 있다”면서 그 극복대안을 ‘교육의 공공성 확보’에서 찾는다. “교육의 공공성은 국가가 대학교육을 부담하고 책임지고 투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육은 한 개인의 입신출세 방편이 아닙니다.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복지의 부분일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과의 연계성, 새 직업과 고용창출, 생산력 향상을 위한 인재양성 등을 위해 국가가 기업과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강 교수는 따라서 교육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간접세 방식의 현 교육세 제도의 개선을 주장한다. “서민 대중이 부담하는 교육세를 통해 교육재정을 확보하겠다는 것은 교육의 공공성을 내팽개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교육의 공공성은 조세제도 개혁을 통해 확보해야 합니다. 조세의 본질은 소득세와 재산세의 누진율에 있습니다. 즉 직접세 방식을 통해 교육재정을 확보, 국가가 교육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해야 학력사회가 없앨 수 있습니다.” 강 교수는 이와 함께 △고르기 시험을 철폐하고 구술식, 토론식 평가제도 도입 △‘학력사회를 조장하는’ 두뇌한국21 사업 중단 △초·중등학교 정책권한을 교육부에서 지방정부로 이전 △지방대학 육성 △대학을 대학원 중심대학과 학부 중심대학으로 분류개편 △사법시험, 교원임용시험제도 개혁 등을 제시한다.
학력사회는 영혼을 짓밟는다
김흥주 한국교육개발원 학교교육연구본부장은 “학력을 기준으로 나뉜 노동시장을 개선하고, 학력에 따른 취업기회를 완전 개방하며, 학력간 임금 격차를 줄이고, 학력 또는 학벌을 기준으로 하는 승진 기회를 능력기준으로 운영하고, 일부 대학에만 입사원서를 주는 행위를 금지하도록 하는 다양한 방법을 동시에 진행해야 학력사회를 철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 본부장은 그러나 “이런 조처에도 불구하고 결국 학력을 인간 평가의 유일한 잣대로 삼는 풍토가 남아 있는 한 개선의 여지가 없다”면서 “학력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보상을 감소시키지 않으면 고학력사회는 결코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밖에 학력사회 철폐를 위한 대안으로 △학벌사회의 중심인 서울대 폐지론 △ 대학입학시험 폐지론 등도 이미 몇몇 학자들에 의해 거론돼왔다. 기실 학력사회 및 학벌사회 철폐를 위한 방안은 이밖에도 이른바 내로라하는 교육 전문가 등에 의해 수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게 또 이 학력사회의 풍조다. 문제는 실천이다. 진정 학력사회가 얼마나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짓밟고 있는지를 직시하고 이를 없애기 위해 당장 무언가 실천할 때 학력사회와 학벌이란 계급은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며 깨져 나갈 것이다.
이창곤 기자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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